끊임없이 미술, 철학, 문학의 경계를 초월하며 치열하게 작업해온 예술가 안규철이 에세이 『아홉 마리 금붕어와 먼 곳의 물』을 펴냈다. 월간 《현대문학》에서 2010년 1월호부터 4년간 ‘안규철의 내 이야기로 그린 그림’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 글과 그림 쉰세 편을 단행본으로 내놓은 것이다. ‘의자의 안부’, ‘다섯 개의 질문’, ‘모래의 힘’, ‘단 하나의 책상’, ‘아직 쓸어야 할 마당’의 다섯 개 장으로 구성된 이 에세이는 독자로 하여금 한 권의 책으로서, 매달의 지면이 주는 것과는 또 다른 새로운 호흡으로 연장되어 보이는 그의 글과 그림을 음미할 수 있게 한다. 비단 예술가로서의 안규철을 알고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누구나 쉽게 집어 들어 마음을 울리는 아름다운 글귀와 사유하는 그림 속으로 빠져들게 만드는 책이다.
미술품을 곁에 두고 완상을 누리는 호사는 대개 언감생심이다. 안규철은 고마운 작가이다. 그의 글과 그림 덕분에 전시장 하나가 안방에 들어앉았다. 그의 책은 작품이 완성되기 이전에 착상한 과정을 그린 설계도 같지만 그 자체로 이미 번듯한 작품이다. 그중에는 더러 미처 꽃을 피우지 못해 그의 마음에만 남은 씨앗 같은 것도 있고 어떤 것은 제 몫을 다한 후 먼지로 돌아가기도 했을 것이다. 그의 책은 예술품이 되는 과정뿐 아니라 한 사람이 예술가로 변모하는 여정도 보여준다. 그 자전적 여정은 확신과 자부심보다 의혹과 모색이 여전하고 구름, 모래, 먼지를 통해 소멸과 이별을 더듬다가 마침내 침묵으로 마무리된다. 그래서 안규철은 고맙고 귀한 작가이다. _이재룡(숭실대 교수, 문학평론가)
책머리에
1 의자의 안부
달콤한 내일|잎|어둠의 책상|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의자의 안부|아홉 마리 금붕어와 먼 곳의 물|사물을 위한 여백
2 다섯 개의 질문
어린 시절 창가에서|다섯 개의 질문|자기 고백을 위한 가구|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나선형의 벽|두려움의 종류|공항의 사물들|쥐스킨트의 방|새해 소망|그러나 그래도 그렇지만|모방과 착각|매미의 두 인생|다른 방법
3 모래의 힘
먼지|그리운 맛|두려움에 대하여|유리병 속의 편지|보이지 않는 작품|대위법|떠나는 사물들|모래의 힘|이별
4 단 하나의 책상
직전의 시간|필담|마음속의 지평선|거절당한 사랑 이야기|구름 메시지|구름이나 한 점|실패하지 않는 일|동시대라는 감옥|단 하나의 책상|단 하나의 연필|3인칭의 그림|돌의 종류
5 아직 쓸어야 할 마당
먼지 드로잉|변신|움직이는 신|양의 탈을 쓴 늑대/늑대 탈을 쓴 양|뒤로 걷는 구두|행위예술가|나는 괜찮아, 아이 엠 오케이|새로운 삶|그림의 속도|삼각대|주사위는 던져졌다|아직 쓸어야 할 마당
『아홉 마리 금붕어와 먼 곳의 물』은 안규철이라는 한 예술가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그리는 궤적이다. 예술과 예술가에 대해 깊은 물음의 시선을 던지고, 예술가의 정체성을 탐구하면서, 그가 예술가로서 변모해가는 과정이 오롯하게 담겨 있다. 《현대문학》 연재 당시의 제목이었던 ‘내 이야기로 그린 그림’이 시사하듯이, 그리고 안규철이 “우리는 궁극적으로 하나의 이야기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103쪽)라고 말했듯이 이 책에는 그 자신의 이야기 위에 한 점 한 점 그림이 켜켜이 쌓였다.
그림 「어린 시절 창가에서」를 통해서는 자신을 지금의 삶으로 이끈 어린 시절을 더듬어가고(“그때 나는 처음으로 세상이 하나의 책처럼 읽을 수 있는 대상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놀라운 책은 읽고 또 읽어도 항상 새롭고 끝이 없었다.” 43쪽), 그림 「커튼 뒤에서」를 통해서는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한다(“초상화와 묘지의 장식조각, 그리고 기념비들은 삶이 아무 흔적도 없이 바람처럼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내가 나 아닌 다른 존재가 되고 버려지고 잊히는 것에 대한 두려움의 산물이다. 예술이 하는 일은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두려움을 다루는 일이다.” 62쪽). 또한 그림 「의자의 안부」를 통해서는 예술가로서 첫발을 내디뎠던 순간을 떠올리고(“그 이름 없는 예술가는 나무 의자 하나를 화분에 심고 가꾸면서 그 의자가 잃어버렸던 나무의 본성을 기억해내서 다시 자라는 것을 상상하는 사람이었다.” 28쪽), 20년의 세월이 지나고 난 후의 삶을 돌아보며 반성하기도 한다(“내가 그것을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것을 부끄러워하며 의자가 아직도 그 화분 속에 있는지, 그 불가능한 꿈을 포기하고 다시 누군가의 의자로 되돌아가버린 것은 아닌지를 물었다. 아침저녁으로 화초의 안부를 묻듯이 이 질문들이 매일 새롭게 던져졌어야 했다는 생각이 가슴을 친다.” 29쪽).
그뿐만이 아니다. 그림 「추락」(“허공에 던져진 모자가 땅바닥으로 떨어지는 예정된 결말이 제거됨으로써,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공회전 상태가 끝없이 이어지는 영화, 어떤 극적인 요소도 들어 있지 않은 이야기를 만들어보려는 것이다.” 131쪽)이나 그림 「구름」(“수많은 구름 사진들을 참조하고 수시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석고 모형을 깎고 사포질을 했다. 어떤 것은 감자 같았고 어떤 것은 돌멩이 같았다. 이 작업의 역설은 그 어떤 것과도 닮지 않아야 구름 비슷한 것이 된다는 사실이다.” 150쪽), 그림 「뒤로 걷는 구두」(“이 간단한 트릭을 이용해서 출발했던 지점이 도착 지점으로 되거나, 눈밭 한복판에서 종적 없이 사라져버리거나, 어디선가 느닷없이 시작되는 발자국들을 만들 수 있다. 추적자를 따돌리고 과거와 현재를 뒤섞거나 뒤집을 수 있다. 과거를 지울 수도 있고 과거 속으로 달아날 수도 있다.” 196쪽) 등에서는 예술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과 마주하게 된다.
아울러 그림 「먼지」(“내가 먼지를 싫어하는 더 근본적인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운명을 일깨우기 때문이라고 나는 주장하고 싶다. 그것은 언젠가 내 옷이었고 내 살갗이었고 내 책이었다. 그것들은 이제 닳아서 가루가 되었고 돌이킬 수 없이 세계 밖으로 추방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95쪽)나 그림 「수업」(“중요한 것은 새로운 삶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현재를 견딜 수 없어 한다는 사실일지 모른다.” 209쪽) 등을 통해서는 사물의 이면을 좇고 일상의 경계를 탈피하려는 시도 또한 포착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는 이에 그치지 않으며, 그림 「Arbeit macht frei」(“일자리 창출, 실업 대책이 전 세계적 과제인 이 시대에도 이 구호는 유효하다. 재난과 위기가 일상이 된 세상에서 일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굶주림과 가난, 질병과 불행에 대한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지려면 일하는 수밖에 없다.” 25쪽) 등에서 보듯이 현 세태를 향해 예리한 시각을 빛내기도 한다.
■ 책 속으로
이른 아침 책상에 앉아 스케치북을 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검정색 표지를 열고 하얀 종이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가족들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시간에 한 시간 남짓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린다. 대개 한두 페이지를 겨우 채우는데 어떤 날은 단 한 줄도 쓸 만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도 이 일은 하루도 거를 수 없다. 그것이 내가 하는 모든 일의 시작이고 중심이기 때문이다. 새벽의 어스름한 회색빛 속에서 어제를 되새기고 어제와 다른 오늘을 생각하는 것. 이 일은 마당을 쓰는 일과 비슷하다.
_「책머리에」 중에서, 7쪽
그림 속에는 상반된 두 개의 생각이 들어 있다. 한편에는 달콤한 내일의 초콜릿에서 한 조각을 미리 베어 먹으며 쓰디쓴 오늘을 잊고 싶었던 스스로에 대한 자조와 연민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내일이 던져주는 장밋빛 약속에 의지하지 않고 현재에 몰입하고자 했던 나 자신에 대한 독한 다짐이 있었다. 이것은 미술가로서 불확실한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상태로 오늘을 견뎌야 했던 그 시절의 내 모습이다.
그 얼마 뒤에 나는 한 토막의 쇠를 깎아서 이 그림 속 초콜릿과 모서리의 잇자국을 그대로 묘사한 작은 조각품을 만들었다. 얼핏 실물처럼 보이는 그 가짜 초콜릿은 달콤하고 부드러운 내일을 기대하지 않겠다는 것, 더 이상 내일을 뜯어먹으며 오늘을 살 수는 없다는 나 자신에 대한 선언이었다.
_「달콤한 내일」 중에서, 11~12쪽
그런데 한 가지 지금도 분명하게 기억하는 일이 있다. 공부 시간에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벌을 받는 일이 있었다. 그 벌이라는 것이 특이하게도 창문 앞에 의자를 놓고 올라서서 바깥 풍경을 내다보며 설명을 하라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길 건넛집 빨랫줄에는 빨래가 널려 있고 마당에 해바라기가 피어 있고 해바라기 옆에는 담장이 있고 담장 너머에는 가게가 있고 가게 앞 공터에는 강아지가 낮잠을 자고 있어요……” 하는 식이다. 벌을 받는다기보다는 무슨 새로운 놀이를 하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익숙하게 보아온 세상의 모습을 하나도 빠짐없이 말로 설명하기란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더 할 얘기가 없어서 “다 했는데요”라고 말하며 고개를 돌릴 때마다 선생님은 내가 무심코 빼놓았거나 얼버무렸던 것들을 신기하게도 찾아냈다. 보이는 것은 하나도 빠뜨리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은 종이 위에 물감 대신 말로 풍경화를 그리는 일과 같았다.
_「어린 시절 창가에서」 중에서, 42쪽
피아노 앞에 앉은 사람이 어떤 곡을 연주한다. 연주가 진행되는 동안 피아노의 건반이 하나둘씩 없어지기 시작한다. 마치 연주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여기저기서 건반들이 연달아 사라지는데, 그런데도 피아니스트는 자신의 연주를 멈추지 않는다. 건반 하나를 누를 때마다 자기 손가락들 사이에서 흰색과 검은색 건반들이 빠져나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연주를 계속하려는 노력과 연주를 중단시키려는 노력이, 하나의 철길 위의 두 대의 열차처럼 서로를 향해 돌진한다. 가까스로 연주가 끝나고, 피아노에는 건반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_「대위법」 중에서, 114쪽
가을이 오자 새삼 하늘에 눈이 자주 간다. 비와 먹구름과 찌는 무더위가 짓누르던 여름 내내 땅바닥만 보며 살다가 갑자기 머리 뒤쪽이 허전해 고개를 들어보니 텅 비어 있는 하늘이 무척 낯설다. 무슨 색면파 추상회화처럼 파란 그 하늘은 깊이도 공간감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고요하고 비현실적이어서, 가장자리에 구름 몇 점이 떠 있는 걸 보고서야 비로소 그 빈 공간의 엄청난 부피가 현기증 나는 실체로 다가온다. 하늘을 그리기가 쉽지 않다는 것은 그려본 사람만이 안다. 하늘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고 허공에는 아무것도 그릴 것이 없기 때문이다. 종이나 캔버스 또한 텅 빈 허공이므로, 하늘을 그린다는 것은 허공 위에 또 하나의 허공을 겹쳐놓는 일이 된다. 결국 우리는 구름이나 새, 비행기나 지평선같이 하늘 아닌 것들을 그려놓고 하늘을 그렸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_「구름 메시지」 중에서, 145~146쪽
원래 미술에는 3인칭 화법이 없다. 대부분의 그림은 ‘나는’으로 시작하는 일종의 독백이다. 완성된 그림의 모서리에 서명을 하는 오래된 관습은 이 그림이 ‘나’의 그림이며, 그것에 대해 내가 권한과 책임을 함께 갖는다는 의미이다. 풍경화든 정물화든 인물화든 모든 그림은, 그런 점에서 그리는 사람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것은 그 결과물과 자신 사이에 유일무이하고 진정한 관계를 축적하는 과정이고, 작품의 가치는 그 관계로부터 나온다.
_「3인칭의 그림」 중에서, 169쪽
최근에 시작하게 된 이 작업은 이러한 변신의 다른 가능성에 관한 것이다. 나는 우선 나무가 되어보기로 했다. 인간의 몸으로 나무가 되기가 쉬울 리는 없다. 무엇보다도 인내하고 기다리고 침묵하는 식물의 미덕을 배워야 한다. 한 줄의 문장을 한나절 걸려서 읽고 마음의 힘으로 사물을 들어 옮기는 연습을 한다. 그리하여 언젠가 지평선이 있는 한적한 풍경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서, 해가 뜨고 바람이 불고 구름이 지나가고 노을이 지는 동안 한 그루 나무로 아무런 노여움도 회한도 없이 가만히 서 있어볼 생각이다. 나는 의자가 되고 책상이 되고 문이 되고 사다리가 될 것이다.
_「변신」 중에서, 18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