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서 가장 권위 있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 대상 수상작가이기도 한 알베르 코엔은 60년 가까운 창작활동 기간동안 금세기 어떤 문예운동에도 동참하지 않았으며, 어떤 문학사상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지 않은 독특한 작가다. 그의 대표작《내 어머니의 책》은 프랑스 대학입시 시험문제에 해마다 출제될 만큼 필독서로 읽히는 작품이다. 서사시 같은 아름다운 문체로 명성을 떨친 그의 소설 가운데 대표작으로 꼽히는《내 어머니의 책》은 발표되자마자 프랑스 언론의 초점을 모았으며, 전세계 독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이 책은 세상을 떠난 어머니에게 보내는, 어머니를 추억하며 쓴 애가이자 사모곡이다. 유대인이었던 그가 당시 유대인을 저주하는 언어인 프랑스어로 현대 프랑스 문학사에 금자탑을 세운 것은 그의 운명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거의 평생을 마르세유, 주네브, 런던, 파리를 떠돌던 그가 찾아낸 조국은 지도상의 어떤 땅도 아닌 프랑스어 자체였고, 자신의 작품이었다는 점은 주지할만하다.
지은이 알베르 코엔 1895년 그리스령 코르푸 섬 출신. 다섯 살 때 부모와 함께 프랑스로 이민. 마르세유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스위스 주네브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 스위스 국적 취득. 이집트에서 일 년을 보냈으며, <유대인의 말>이라는 제목의 시집을 파리에서 출간. 그 후 주네브 국제연맹 노동사무국에서 근무. 1930년에 소설 <솔랄>을 발표하여 명성을 떨쳤다. 프랑스가 독일에 함락된 후 드골의 임시 정부에 합류해서 런던에서 7년 동안 근무(국제난민기구 법률자문)했으며, 1946년 난민 지위에 관한 국제협약을 작성했다. 1947년 주네브로 되돌아와서 국제난민기구의 사무총장을 지냈다. 1952년에 문학활동을 재개하여, <솔랄>에서 시작했던 유대인 4부작 <망주끌루>, <영주의 연인>, <용감한 형제들>을 완성했다. 연애소설의 걸작 <영주의 연인>은 출간되던 해에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대상을 수상했다. 그밖에 <오 그대, 형제들이여>, <노트>, <망각이라는 독약>등이 있다. 옮긴이 조광희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과 같은 대학 대학원 불문과 졸업했다.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한 바 있다. 옮긴 책으로는 뤼시앵 골드만 <인문과학과 철학>(공역, 1980.문학과 지성사), 장 루이 카바네스 <문학비평과 인문과학>(1995,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롤랑 바르트 <카메라 루시다>(1998, 열화당), 제임스 발라드의 <엄마의 마지막 산 K2> 등이 있다
본문 중에서 이런 일요일에는 어머니와 나는 우스꽝스러울 만큼 옷차림에 모양을 냈는데, 지금 생각하면 연민이 느껴지는 것은, 그 옛날 순진한 우리 두 사람이 필요 이상으로 잘 차려 입었어도 아무도 우리와 함께 있지 않았고, 아무도 우리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물론 남에게 잘 보이려고 그렇게 정성들인 옷차림을 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어울리지도 않는 어린 왕자 같은 복장에 계집애 같은 얼굴을 하고는, 남들이 놀리는 것도 모르고 천진난만하게 몹시 좋아했다. 그녀는 평민 여인의 옷을 입고 코르셋으로 바짝 몸을 조인 시바의 여왕이었는데, 그 호사스러움에 감격해서 약간 얼이 빠져 있었다.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은 그녀의 길다란 검은 레이스 장갑, 여러 가지 주름장식으로 부풀린 벌집과 흡사한 모양의 블라우스, 모자에 드리워진 베일, 깃털로 장식한 모피 목도리, 손에 든 부채, 그리고 허리가 잘록한 긴 치마 등인데, 치마를 손으로 살짝 받쳐들면 그 밑자락으로 진주빛 단추들이 달려 있는 반장화가 드러나고, 장화의 가운데는 금속으로 만든 작고 동그란 고리가 붙어 있었다. 간단히 말해 우리의 일요일 나들이 옷차림은 상류층 저택의 오후 공...이런 일요일에는 어머니와 나는 우스꽝스러울 만큼 옷차림에 모양을 냈는데, 지금 생각하면 연민이 느껴지는 것은, 그 옛날 순진한 우리 두 사람이 필요 이상으로 잘 차려 입었어도 아무도 우리와 함께 있지 않았고, 아무도 우리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물론 남에게 잘 보이려고 그렇게 정성들인 옷차림을 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어울리지도 않는 어린 왕자 같은 복장에 계집애 같은 얼굴을 하고는, 남들이 놀리는 것도 모르고 천진난만하게 몹시 좋아했다. 그녀는 평민 여인의 옷을 입고 코르셋으로 바짝 몸을 조인 시바의 여왕이었는데, 그 호사스러움에 감격해서 약간 얼이 빠져 있었다.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은 그녀의 길다란 검은 레이스 장갑, 여러 가지 주름장식으로 부풀린 벌집과 흡사한 모양의 블라우스, 모자에 드리워진 베일, 깃털로 장식한 모피 목도리, 손에 든 부채, 그리고 허리가 잘록한 긴 치마 등인데, 치마를 손으로 살짝 받쳐들면 그 밑자락으로 진주빛 단추들이 달려 있는 반장화가 드러나고, 장화의 가운데는 금속으로 만든 작고 동그란 고리가 붙어 있었다. 간단히 말해 우리의 일요일 나들이 옷차림은 상류층 저택의 오후 공연에 출연할 통속 가수들과 다름없고, 다만 손에 악보뭉치를 들고 다니지 않았을 뿐이었다. 마침내, 바다 바람의 습기로 낡아빠진 카지노 맞은 편 '해변' 정류장에 도착한 우리는 점잔을 빼면서, 설레이고 얼떨떨한 기분으로, 녹색 테이블 앞의 철제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는 '오카스쿠르트'라는 조그만 스낵식당의 웨이터에게 소심한 표정으로 맥주 한 병과 접시와 포크를 갖다 달라고 부탁한 다음, 그의 호감을 사기 위해 푸른 올리브 몇개를 주문했다. 웨이터가 물러가자, 즉 곤란한 순간이 지나가자, 그녀와 나는 좀 당황스러웠지만 만족한 미소를 교환했다. 그리고 그녀는 보자기에 싼 먹을 것을 꺼내 나에게 내밀면서 혹시 다른 손님들이 우리를 보고 있지는 않는지 약간 계면쩍은 표정을 지었는데, 그것은 근동지방의 일품요리인 시금치를 곁들인 완자, 치즈파이, 어란젓, 코렝트 건포도 빵, 그리고 여러 가지 맛있는 것들이었다. 그녀가 나에게 건네준 약간 빳빳하게 풀을 먹인 냅킨은 전날 밤 정성스럽게 다림질해서 준비해둔 것이었는데, 그녀가 "루치아 디 라메르무르"를 콧노래로 부르면서 다림질할 때 느꼈던 그 말할 수 없는 행복감은 내일 아들과 함께 바닷가로 놀러간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지금 이 세상에 없다. --- pp 51~53 심장병 환자인 내 어머니는 항상 자동차를 무서워했고 자동차에 치일까 무서워서 (---중략---) 그녀는 절대로 죽어서는 안 되는 자신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용기를 내어 돌진하다시피 길을 건넜고, 몹시 겁을 내면서도 나의 지혜와 능력을 믿었고, 보호자인 아들만 있으면 어떤 나쁜 일도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pp 75p 그녀와 함께 있기만 한다면, 나는 온 세상 사람들과 떨어져서 살 수도 있었다. 그녀는 나를 판단하지도, 비판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처럼, 내가 이제는 책을 쓰지 못할 것이라거나, 혹은 늙어간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 아들"이라고, 그녀는 마음속 가득한 믿음으로 말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당신에게서 받은 선함을 눈 속에 담고, 공간과 침묵을 넘어, 이 동일한 믿음의 증거를 당신에게 건네며 조용히 말한다. -엄마라고.--- pp 123~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