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하는 예술가’ 그리고 많은 예술가 중에서 유독 글 잘 쓰는 작가로 소문난 조각가 안규철의 산문집『그 남자의 가방』이 현대문학에서 출간되었다. 사물에 대한 사유로부터 시작하여 육체와 삶, 그리고 일상까지 특유의 예민한 시각으로 성찰하고 있는 그의 산문들은 예술적인 시각과 문학적 상상력이 어떻게 소통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될 만하다. 빈틈없는 장인 정신으로 일관하며 삶의 모순을 명쾌한 조형언어로 꼬집는 오브제 작가로 평가받아온 안규철은 이 책에 자신의 작품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배경, 창작의 단초뿐만 아니라 예술과 삶에 대한 고민, 단상도 풍부하게 담고 있으며 작품과 드로잉 작업 사진 53점도 수록했다.
1. 책머리에 - 사각형의 눈
2. 머리, 영혼의 집
싸움과 인사 / 초상화와 참수형 / 블랙홀 / 머리카락이 하는 말
3. 손, 인간의 조건
손에서 입 사이 / 손안의 세계 / 변증법 / 진화 / 폭력 / 인사와 체포 / 지문 / 장갑
4. 손을 닮은 마음
약속 / 매와 기도 / 오른손과 왼손 / 글쓰는 손 / 노와 삽
5. 생각하는 발
형사 콜롬보와 수도승 / 최초의 노예 / 식탁 / 다리와 길
6. 길 위의 집
길의 시작과 끝 / 헨젤과 그레텔 / 붙박이 인간 / 비밀 / 타인으로서의 집
7. 의자
움직이는 의자 / 서 있기와 앉기 / 움직이지 않는 의자 / 흔들리는 의자
8. 상자와 가방
물고기의 관 / 책상과 서랍 / 판도라의 상자 / 책가방 / 그 남자의 가방
9.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물의 뒷면 / 낯선 대륙들 / 진실과 사물
10. 껍질과 속
간판 / 의사와 조각가 / 죽음의 극복
11. 잃어버리기, 잃어버리지 않기
버리기와 잃어버리기 / 수집가들 / 문신
12. 사소한 사건
코카콜라코카콜라 / 로만 오팔카 / 사소한 사건
13. 그림과 말
인터뷰 / 경계선 위에서 / 그림의 침묵
14. 일하기와 놀기
재미없는 인생 / 식물적 인간 /내 속에 있는 폭약
15. 뉴스, 코미디, 사디즘
뉴스 / 코미디 / 사디즘
16. 사냥꾼과 토끼
17. 덧붙이는 글 - 세속화 시대의 새로운 도상학 사전 - 이재룡(숭실대 교수, 문학평론가)
안규철은 아홉 살 때 서울로 유학을 떠나온 이래 줄곧 혜화동 주변에서 초중고교를 다녔다.
이렇게 낯선 도시에 보내져 성장한 덕분에 그 어느 곳에도 온전한 고향이 없으며 삶은 전적으로 혼자 감당할 수밖에 없는 것임을 일찍이 받아들였고 그림을 그리고 무언가 만드는 취미를 갖게 되었다. 고3 때 뒤늦게 마음을 정해 서울대학교 미대 조소과에 들어가 미술을 공부했으나 막상 조각보다는 문학과 연극 등 다른 장르에 관심이 많았고 대학 졸업 후에는 7년 간 에서 기자로 일했다.
서른셋에 유학을 떠나 독일 슈투트가르트 국립미술학교에서 수학했고, 재학 중이던 1992년에 첫 개인전을 열면서 미술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두 차례의 개인전과 여러 기획 전시회를 통해, 주로 익숙한 사물을 낯선 상황에 배치하여 일상적인 삶의 이면을 드러내는 개념적인 작업을 발표해왔다. 서구 현대미술의 체험을 기록한 『그림 없는 미술관』을 썼고, 1997년부터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로 있다.
사물과 일상, 그리고 그 뒷면에 대한 한 예술가의 관심과 집착
월간 현대문학에 사물들, 그것은 무엇인가 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던 글들을 2년 만에 다시 손보아 내놓은 그 남자의 가방 은 사각형 의 틀, 즉 고정관념과 제도, 규범 등에 갇혀 있는 모든 사물과 일상의 바깥으로 시선을 옮겨보려는 시도이다. 스스로는 돌을 쪼는 조각가의 정(釘)처럼 무디고 느슨한 산문 이라고 겸손해하지만 연재 당시 사물에 대한 시각적 관찰력과 상상력이 전개되는 과정을 세밀한 언어작업으로 구성하고 있다 는 호평을 받은 바 있다.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우선 하늘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면서 인간의 아이덴티티를 함축하는 기호인 머리, 인간의 운명과 한계를 함축하고 있는 손, 그리고 가장 아래에서 사유와 노동의 도구로 기능하는 발 등 신체에 대한 탐구가 시작된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훑었던 그의 눈은 이제 길을 걸어 집으로 들어가 그 안에 존재하는 의자, 책상, 상자와 가방에 이른다. 하찮고 사소한 사물을 꼼꼼하게 살피는 이러한 작업은 단선적이고 고정된 우리의 시각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고 그 뒷면을 들여다보자는 권유인 것이다. 이렇듯 신체와 사물에 대한 조각가의 관심은 외형을 투과하여 그 내면에 대한 진지한 탐구로 이어지는데, 철학적이고 문학적인 사유로의 확장(또는 변형)은 필연적으로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구체화시키는 과정에 이르게 된다.
보이는 것과 안 보이는 것, 그림과 말의 경계에 대한 예술가의 고민
이 책의 제목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그 남자의 가방」에서 가져온 것이다. 천사가 맡겨놓은 한 쌍의 날개 가 들어 있는 가방을 통해 진실과 눈에 보이는 것의 차이를 보여주고자 했던 그의 의도는 우리에게는 왜 사물의 뒷면이 보이지 않는가? 한쪽 눈으로는 텍스트를 보고 동시에 다른 한쪽으로는 이미지를 바라보는 그런 시선을 선택할 수 없는가? 라는 물음에서도 잘 나타나듯이 보이는 것과 안 보이는 것, 그림과 말의 경계를 고민해온 그의 작품세계를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가난한 월급쟁이 외과 의사였던 아버지를 추억하면서 털어놓는 외로움에 대한 내성(耐性), 낭만적인 삶에 대한 동경, 도시와 시골의 이중적인 고향 사이에서 어느 쪽에도 고향이 없는 이방인으로서의 자기 인식 등 나를 미술의 길로 끌어들인 이 모든 심리적 정황들은 바로 그의 유산이었다 는 고백은 작가의 내면과 예술관을 엿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