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작가 구본창과 소설가 신경숙의 사진과 글이 어우러지는 사진에세이. 2003년 5월부터 3개월간 지면에 연재되었던 것을 책으로 모아 엮었다. 신경숙의 곱디고운 사색의 편린들이 구본창의 카메라에 비친 정경 속에 현상된다. 아름다운 연꽃을 든 손, 누군가 방금 전까지 누워 있던 흐트러진 이부자리, 인적 없는 구석자리에서 가지런히 신발을 벗고 낮잠을 자는 남자, 목적지를 향해 질주하는 기차 안에서 바라본 기찻길, 덩그러니 놓인 여행가방.... 짧은 순간을 포착한 구본창의 작품은 정지된 화면 속에서 풍부한 상상력을 이끌어낸다. 이 사진들에 신경숙은 자신의 추억거리들을 끄집어내어 덧붙인다. 연꽃 앞에 서면 눈이 가느스름해지는-아름다움에 대해 인색하다 여겨왔던 어머니가 손수 준비한 삼베 수의, 세상에서 벗어나고자 찾아간 제주도에서 만난 어느 처녀의 울음은 지은이를 다시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게 했다. 신경숙은 차근차근 털실뭉치를 풀듯 자신의 기억을 속살거린다. 유년시절 고향의 추억에서부터 주변의 소소한 일상까지... 따뜻하면서도 작가 특유의 잔잔한 슬픔이 깔려있는 글과 인상적인 사진 한장한장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 책.
1부 이 꽃을 어머니에게 자거라, 네 슬픔아 물이 나오지 않는 왕궁에서 저, 아까운 비! 너는 거기 왜 가니? 보리밭 속에 숨어 있는 것들 저 남자를 방해해선 안 된다 노을 매혹당한 뒤에 질주하는 것들 비 오기 전 밥을 함께 먹는다는 것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2부 길을 잃고 든 생각 담배에 대한 생각 돌마바흐체 궁전에 대한 생각 책상에 대한 생각 개밥 줘야 된다아 귀룽나무 아래서 옥수수, 감자…… 피아노 배우는 남자 3부 모자 여름 바다 새 새벽 버스정류장 별을 찾아서 서례 이모 묘지 앞에서의 입맞춤 숨어 있는 나무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지 모르는 그때조차도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누군가 홀로 할머니들 백미러 속 풍경 손 발톱일랑 숨기고……
■ 지은이 신경숙 1963년 전북 정읍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였으며, 1985년 중편 「겨울우화」로 《문예중앙》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하였다. 작품집으로 『강물이 될 때까지』『풍금이 있던 자리』『오래 전 집을 떠날 때』『딸기밭』『종소리』, 장편소설 『깊은 슬픔』『외딴방』『기차는 7시에 떠나네』『바이올렛』 등이 있다. <한국일보문학상><오늘의 젊은 예술가상><현대문학상><동인문학상><이상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 사진 구본창 1953년 서울 출생. 연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였으며, 독일 함부르크 국립 조형미술대학에서 사진디자인을 전공하였다. 국내외 50여 차례의 개인전과 그룹전을 가졌으며, 한국사진의 현대화에 공헌을 한 작가라는 평을 받고 있다. 런던 세인트 마틴 스쿨 초청교수와 계원조형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저서로 『생각의 바다』『Art Vivant』과 일본에서 출판 된『Hysteric 9』 등이 있다.
■ 이 책은 선이 굵은 소설가 신경숙과 사진작가 구본창의 특별한 만남! 필름 속에 갇혀있던 이야기들을 인화하는 신경숙. 구본창의 예술적 교감! 실험적이면서도 탐미적인 사진가로 독보적인 구본창과 독보적인 여류작가 신경숙의 사진과 글이 어우러진 <자거라, 내 슬픔아>를 출간되었다. 2003년 5월부터 3개월 연재했던 사진에세이에서 신경숙의 사색과 소소한 추억들이 구본창의 카메라에 비추어진 인물과 사물과 정경들 속에서 현상된다.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연꽃을 든 손, 누군가 방금 전까지도 누워 있었던 흐트러진 이부자리, 인적 없는 어느 성의 구석자리에서 가지런히 신발을 벗고 낮잠을 자는 남자, 목적지를 향해 질주하는 기차 안에서 바라본 기찻길, 자리에 얼른 앉아 먹어주기를 바라는 양 허름한 방 한가운데 덩그마니 놓인 시골밥상의 소박한 모습, 비밀을 엿보듯 살짝 젖혀진 커튼 틈새로 보이는 고양이, 덩그마니 남은 여행가방 한 개. 짧은 순간을 포착한 구본창의 작품은 정지된 지면 속에서 끊임없는 상상력을 이끌어 낸다. 이 사진들에 신경숙은 긴 추억을 더듬어 가는 글을 덧붙였다. 연꽃 앞에서는 눈이 가느스름해지는, 아름다움에 대해 인색하다 여겨왔던 어머니가 손수 준비한 수의는 마지막 가는 길을 향한 소박한 ‘호사’는 애틋하다. 세상으로부터 격리되고파 찾아간 제주도에서 만난 어느 처녀의 울음은 필자를 다시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게 한다, 은사시나무가 창밖으로 보이는 지인의 방에서 잠들었던 시간을 추억하며, 새끼를 밴 개의 질주하는 운명과의 충돌을 기억해낸다. 무엇이든 맛나게 드셨던 아버지 덕분에 서로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는 일에 부끄럼 없는 가족들 간의 애정, 새로운 주인의 손에 안겨주고 돌아오는 밤길에 조금 울게 만들었던 너무 사랑해 죽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마저 주었던 고양이 루미, 새벽녘의 버스정류장에서 스친 버스 차장과 달아났다던 고향 친구.... 이 에세이에서 신경숙은 차근차근 털실뭉치를 풀어내듯 자신의 기억을 풀어낸다. 유년시절 고향의 추억으로부터 사소한 작가 주변의 이야기들을 엮어내는 그녀의 필담은 구수하면서도 때때로 신경숙 특유의 잔잔한 슬픔이 깔려있다. 어릴적 영화를 같이 보러 다닌던 미순이란 친구는 몇 십 년 만에 소식이 닿은 작가를 만나 대뜸 영화관으로 끌고 간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를 보며 느껴 울던 그녀의 사정을 나중에야 안 신경숙은 이 책을 통해 그녀의 친구를 찾고 있기도 하다. 이토록 개인적인 그러므로 꾸며낼 수 없는 솔직한 작가의 심정들이 글 하나하나에 담겨있다. 신경숙의 섬세한 감성과 필체와 하나의 영상으로 무한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구본창의 <자거라, 내 슬픔아>는 신경숙 개인의 추억 속에 숨겨진 이야기가 담긴 하나의 앨범이며 구본창과의 예술적인 교감으로 만들어진 책이다. ■ 본문 중에서 무엇이든 아름다움은 사람을 혼나게 한다. 닿을 수 없는데 가 닿고 싶은 욕망 때문에 가슴이 또 한번 데일 것 같은 것이다. 처음부터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지 않은 어머니 앞에서 나는 아름다운 것들은 어머니 생애에서는 쓰잘데기 없는 것에 불과한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였다.(중략) 자식이 아닌 다음에는 뭣을 봐도 감탄하는 바가 별로 없는 어머니는 연꽃을 좋아했다. 향기 나고 자태 고운 꽃일수록 어머니 앞에서는 먹지도 못하는 것에 불과했으나 연꽃 앞에서 어머니는 눈이 시어지는지 눈꼬리가 가느스름해지곤 했다. 물 위에 떠 있듯 피어 있는 모습이 신기한지 오랫동안 그 앞에 머물곤 했다. 그때의 어머니는 내 어머니가 아니고 그녀인 듯했다. 연꽃 앞에서의 어머니는 양수 속의 태아가 된 듯도 하고 소녀가 된 듯도 했다. 뺨이 발그레한 처녀로 돌아간 듯 목소리를 낮추고 수줍게 웃기도 했다. 어머니도 연약하고 흔들리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던 때는 연꽃을 바라보는 어머니를 발견한 순간이었다. 손수 수의를 마련해놓은 생의 끝자락에 가 있는 어머니인데도 연꽃 앞에서는 어머니를 위해 절을 해주었을 어머니의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눈빛이었다. 어머니에게 이 꽃을 드리고 싶다. -<이 꽃을 어머니에게>중에서 우리는 폐쇄된 호텔에 어둠이 깃드는 걸 가끔 쳐다보며 식당에 마주앉아 전복죽을 먹었다. 처녀가 자전거 뒤에 나를 태웠다. 우리는 낯선 마을을 한 바퀴 빙 돈 다음에 호텔로 돌아왔다. 잠결에 깨어보니 처녀가 내 쪽을 향해 얼굴을 두고 자고 있었다. 눈코입이 반듯하고 이마가 깨끗한 처녀였다. 얼굴을 한번 만져보려다가 그만두었다. 타자를 향한 그리움이 닿아서였을까. 그곳에 온 후로 가장 깊은 잠을 잤다.(중략) 처녀가 누워 있던 잠자리의 베개와 시트들이 구겨진 채 한쪽으로 밀려나 있었다. 아직 거기에 누군가 누워 있기라도 한 듯 나는 다시 침대로 돌아가 걸터앉았다. 그 한순간의 고요. 바깥에서였는지 안에서였는지 다른 기척이 났을 때까지 그렇게 앉아 있었다. 그 순간엔 어떠한 비의도 머물지 않았다. 무엇인가를 피하고 싶은 생각도 무엇인가를 건설하고 싶은 욕망도 없이 마음이 텅 비었다.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르는 것과 한순간 합쳐지는 기분이었다. 그날, 바다에 나가지 않고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침대 밑에서 가방을 꺼내 짐을 쌌다. -<침대와 베개>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