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녕의 신작 산문집 『사라진 공간들, 되살아나는 꿈들』이 출간되었다. 2011년 10월부터 2013년 9월까지 2년여에 걸쳐 월간 『현대문학』에 절찬 연재되었던 글들을 모은 이 책은, 독자들의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연재 시작부터 단행본 출간에 대한 기대감을 높여온 바 있다. 작가는 이 책에서 자신을 존재하게 한 고향집과 어머니에서 출발해 자신만이 겪은 특별한 시간과 공간을 묵직하게, 때론 경쾌하게 서정정인 문체와 문학적인 깊이로 새롭게 재탄생시킨다. 사라진 기억들 속에 이미지로만 남겨져 있는 장소, 그때의 놓치고 싶지 않은 특별한 순간들은 윤대녕의 아득한 시간으로부터 그렇게 살아나와 그의 과거를 복원한다.
윤대녕 특유의 내밀한 관조와 감성적 시선으로 복기한 삶의 장소들은 의외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평범한 곳들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흔히 마주치는 공간들을 작가는 애틋한 마음으로 그곳, 그때의 인연, 사연들과 함께 새롭게 현현시킨다. 나무 타는 냄새 속에서 마주했던 어린 시절 부엌의 아궁이, 이제는 고인이 된 이와 마지막으로 함께했던 술집,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우연히 마주친 옛 연인, 극심한 내외적 갈등 속에서 도망치듯 걸음 했던 사원들, 중학 야구의 열정을 기억하며 아이와 함께 찾은 경기장,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됐음을 통고 받은 공중전화 부스……. 작가는 씨실과 날실처럼 엮인 공간과 시간을 통해 지나온 생을 되돌아본다.
“왜 하필 ‘거기’여야 했을까?” 작가 윤대녕이 던지는 공간에 대한 근원적 물음은 독자들에게 과거를 복원하는 작업이 갖는 경건한 울림을 선사하는 동시에 흘러간 모든 시간들을 통과해 ‘지금’‘여기’를 산다는 것, 나아가서 과거 속에 현존하는 미래의 의미가 무엇인지까지 생각하게 한다. 읽는 이들에게 향수에 빠지게 하는 작가가 직조해내는 그리운 시간의 무늬,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내면세계까지를 돌아보게 하는 순정한 계기가 될 것이다.
지금 ‘윤대녕’을 읽는다는 것,
여전히 품게 되는 삶에 대한 낯선 희망과 기대를 갖는 일
장소와 그것을 수식하는 짧은 문구로 이루어진 스물세 개의 제목을 따라 윤대녕의 시선을 좇다 보면 문득 작가의 삶에서 잊을 수 없는 순간을 공유한(「공중전화 부스」) 당사자인 소설가 구효서의 말처럼 “아득하기만 했던 그 여백의 수면 위로 이 책의 갈피갈피들이 애틋한 징검돌이 되어 내 앞에 꽃잎처럼 떠오”르는 경험을 하게 된다. ‘도서관’ ‘다방’ ‘음악당’ ‘병원’ 등 일상적 장소에 각인됐던 작가의 에피소드들은 무심한 듯 열렬하게 우리들 억과 맞닿는 지점을 내보이며 “각자 자신에게 북받치듯 돌아가”는 독서의 열락을 맛보게 할 이다.
“지나고 나면 삶은 한갓 꿈으로 변한다고 했던가. 돌아보니 정말이지 모든 게 찰나의 꿈이었던 것 같다. 그러니 나는 그 꿈이라도 한사코 복원하고 싶었던가 보다. 연재를 하는 동안 나는 과거에 내가 머물렀던 곳들을 가끔 찾아가보았다. 짐작했듯 대부분의 공간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더 이상 자취조차 찾아보기 힘들었다. 다만 그곳에는 마음의 텅 빈 장소場所들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매달 한 편씩 연재를 하면서 나는 무척 행복했던 것 같다. 파편적으로 흩어져 있던 과거의 기억들을 복원하는 글쓰기가 많은 순간 내게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삶을 복원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더불어 삶이 내게 남겨준 것이 무엇인가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254쪽, 「작가의 말」 중에서)
이 책에서 작가가 복원하는 삶의 지점들은 누구나 한때 지나쳐 온 생의 장면들이 자 기억하고 싶은 순간들이다. 삶의 비의마저 그 순간들은 마침내 ‘광장’으로 이동하며 내면에서 외면을, 과거와 미래로 연결시킨다. 독자들은 윤대녕을 함께 읽으며 이미 사라진 생의 많은 부분들이 다시금 살아 돌아오는 새삼스러운 감동과 함께 삶에 대한 낯선 희망과 기대를 갖게 한다.
“광장은 어디까지나 장소와 공간을 포함한 개념이다. 언급했듯 거기에 사람들이 존재하면 광장은 그 순간 공간으로 변한다. 말하자면 사람이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거기에서는 어떤 관계도 만남도 상상도 가능하다. 즉 광장은 미래의 삶과 연결돼 있다.” (251쪽, 「광장—「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중에서)
▲ 추천사
윤대녕과는 먼 듯 가깝고 가까우면서도 멀었다. 그의 깊은 눈 때문이겠지. 이마를 꽉 맞대고 들여다보아도 야속하게 속눈만은 저만치 멀었다. 아득한 것들이 그리하여 늘 아득했다. 텅 비었으되 무언가로 가득한 그의 여백을 건너지 못해 나는 늘 허당 짚었다. 딛고 건너려 해도 무얼 디딜지 몰랐잖은가.
아득하기만 했던 그 여백의 수면 위로 이 책의 갈피갈피들이 애틋한 징검돌이 되어 내 앞에 꽃잎처럼 떠오른다. 뒤늦은 순정을 깨달은 처자처럼 나는 처음인 듯 그에게 달려 건너간다. 이것은 가히 그가 세상 어떤 것도 쥐기 이전에 쥐었던 어린 적수赤手의 뭉클한 팩트들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 혹은 우리의 것과 다르지 않은 사실들임이 못내 밝혀진다.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는 윤대녕, 그 이름을 빌려 각자 자신에게 북받치듯 돌아가 다다른다. ‘아, 기뻐라/나는 여기에 혼자 있는 게 아니라/별빛 속에 수많은 사람들이 길을 가며/그들은 이렇게 나에게 다가오나니.’
―구효서(소설가)
작가의 시선은 치열했던 시대와 욕망의 중심에서 이제 조금 멀찍이 떨어져 고요한 마음으로 사물이나 현상을 관찰하거나 비추어보는 눈, 관조觀照로의 이행 중에 있다. 이는 불교적으로 말하면 참된 지혜의 힘이 없거나, 사물에 대한 통찰함이 마련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작가가 삶과 죽음의 초월적인 경계에 서 있을 때만이 그 시선을 갖는다는 말. 이는 글을 오래 쓴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욕망과 그것이 투영되는 사물을 다루는 일에 능숙한 산문쟁이라고 할지라도 작가 개인적인 욕망에 대해 적절한 거리감이 없다면 스스로 세월의 지난함 어딘가에 함몰되고 초심에 근거했던 작가의 산문정신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우리에게 만년의 완성된 작가가 드문 것이 그 증거이다. 그의 글은 지난날 오래도록 견지했던 중심의 시선을 버리고 초월적 바다의 경계를 유영한 지 오래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가 윤대녕이 지닌 산문정신의 이행은 후배작가들에게는 과寡하고 귀한 일이다. 지금 그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이제껏 한국문학이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관조, 만년의 문학을 향해 묵묵히 수행하는 자의 참선을 미리 엿보는 일이다.
―백가흠(소설가)
▲ 본문 중에서
가끔 이런 의문이 들 때가 있다. 내가 비롯된 곳이 왜 하필이면 그곳이었을까? 내게 선택이 주어진 것은 아닐지라도 마당 곳곳에 채송화와 달리아와 백일홍 들이 피어 있는 밝고 화사한 공간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의 운명은 어쩐지 태어날 때부터 그 집에서 이미 결정지어져 세상으로 내보내졌다는 쓸쓸한 생각이 든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뭔가 참을 수 없는 감정이 밀려오곤 한다. 모든 사람들에게 집이 그런 의미는 아니겠지만, 내게는 어쩔 수 없이 그렇다.
-17쪽, 「고향집—왜 하필 ‘거기’여야만 했을까?」
이윽고 그녀가 완전히 어둠에 묻혀버리면 나는 머뭇거리며 그 골목 안으로 걸어가보곤 했다. 그리고 대개 이러한 풍경들을 목도하곤 했다. 전봇대 옆에 등을 돌리고 서 있는 젊은 남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는 남자, 술에 취해 노래를 부르며 비틀비틀 걸어가는 중년의 남자, 공중전화에 매달려 있는 울고 있는 어떤 여자, 혹은 대문 앞에서 팔짱을 낀 채 초조하게 서성이며 남편을 기다리는 여염집 여자, 그리고 저쪽에서는 누군가 싸우는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이를테면 그녀는 내가 목격하고 있는 풍경들 속을 지나 집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그러니까 막상 필요한 지대에서 나는 그녀 옆에 존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내게 무언가를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겠지. 그 경계를 끝내 허물지 못했던 탓일까? 봄에 만났으되 여름이 가기도 전에 그녀와 나는 헤어지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그녀를 바래다주던 밤, 나는 어느 집 대문 옆에 버려져 있는 화분에서 봉숭아가 피어 있는 것을 보고 그만 울컥, 하는 심정이 되고 말았다. 첫눈이 내릴 때까지는 만날 줄 알았던 것이다.
-105쪽, 「골목길들—실루엣들이 서성대는 곳」
내 기억은 다시 유년 시절로 돌아간다. 이제 와 깨달았으되, 그때의 부엌은 부재했던 내 어머니의 자궁을 대신한 공간이었다. 나는 그 어둑하고 따뜻한 공간에서 고요히 불을 지켜보면서 꿈을 꾸고 먹이를 받아먹으며 몸을 불려가던 커다란 태아였다. 이후 그 아이는 아홉 살로 다시 태어나 제 어미의 부엌에서 어미의 슬픔을 먹고 성장하게 된다. 그리고 50을 넘긴 지금에도 여태 부엌을 떠나지 못하고 늙은 어미가 그립거나 삶에 지쳐갈 때면 슬그머니 칼을 집어 들고 무언가를 썰거나, 끓이거나 지지고 볶으며 여전히 삶에 대한 낯선 희망과 덧없는 기대를 품곤 한다. 이렇듯 사는 일과 밥을 짓는 일과 글을 쓰는 일은 서로 완전히 일치한다. 실제로 나는 비좁은 주방 옆에 놓인 식탁에서 글을 쓸 때가 가장 마음이 평온하고 어쩐지 행복해지기도 한다. 대장장이에게는 아무래도 대장간이 마음 편한 공간이듯이 말이다.
-167쪽, 「부엌—익숙한 슬픔과 낯선 희망이 한데 지져지고 볶아지는」
그 전날 나는 마지막으로 이 차를 몰고 혼자 임진각에 다녀왔다. 그 참에 내가 살던 일산 신도시의 구석구석을 돌아보며 내 유목의 삶이 사실상 종료됐음을 깨달았다. 이제부터는 장소와 공간이 일체화된 어느 한 지점에 머물며 상시적으로 지구력과 인내심을 요하는 지극히 단조로운 인생을 살아가게 되겠지. 왠지 그런 예감이 들었다. 어쨌든 나이 50이 다 돼가는 마당에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낡은 스포츠카를 몰고 돌아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새로 출시된 페라리나 람보르기니라면 혹시 또 모를까.
-198~199쪽, 「자동차—근대 이후의 유목민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