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례
책머리에 · 4
평범한 날들
일러두기·12 평범한 날들에 대해·16 고맙다 괜찮다·20 사라지는 사람 들·24
노을 속에서·28 밧줄과 매듭·32 어쨌든 유감·36 책 속의 길·40 가을 들녘에서·44
음악 방송·48 잡초의 진심·52 인연·56 비 오는 아침·60
저울의 시간
감자·66 저울의 시간·70 담쟁이·74 나비의 춤·78 버들치·82
깃발과 빗자루·86 낙엽의 시간·90 제라늄·94 나무·98 작업실 계단·102
낡은 옷걸이·106
두 번은 없다
회색에 대하여·112 마지막으로 한 번 더·116 10년 쯤 더·120 길모퉁이에서·124
톱밥·128 혼잣말·132 50주 년·136 명예교수·140 분기점·144
직선에 대하여·148 그림자를 말하는 사람·152 검정색에 대하여·156
아무 일 없다
이 명·162 계약·166 잠·170 술 끊는 법·174 아무 일 없다·178
떨림에 대하여·182 허행·186 왼발과 오른발·190
짧은 만남, 긴 이별
우산 없는 세상·196 꽃과 화분·204 안경·212 원목마루·220
문자 바이러스·228 올인 기념관·236 바퀴·244 단추들·252
문·260 타임 머신·268 지우개·276 그리움·284 짧은 만남, 긴 이별·292
모자람과 넘침 없는 따뜻한 위로
초베스트셀러 『사물의 뒷모습』 후속작
전작 『아홉 마리 금붕어와 먼 곳의 물』이 예술과 예술가적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사색을 담았다면, 『사물의 뒷모습』은 이에 더해 오늘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까지를 그려냈다고 할 수 있다. 이번에 새롭게 묶인 『그림자를 말하는 사람』은 앞의 2부작에 담아낸 고민들을 더 깊이 있게 천착함과 동시에 퇴직 이후 마주하게 된 새로운 일상에 대한 솔직한 사유들이 담담하게 그려지고 있다.
총 다섯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의 첫 장, ‘평범한 날들’에는 계절, 시공간, 일상에 대한 글들이 담겨 있다. “죽음은 아닐지라도, 내가 미술의 이름으로 해온 일 대부분은 사물의 그늘 속에서 모순과 부조리를 찾아내는 것이었”고, “그 일을 예술가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여겨오는 동안 뭔가를 놓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은 필자는 “가슴 깊이 타인에 대한 실망과 분노와 혐오를 감춘 채,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렇게 한다고, 그 일이 세상을 위해 좋은 일이라고 애써 믿어”온 자신을 발견한다.
두 번째 장, ‘저울의 시간’에는 식물과 동물, 일상의 평범한 사물들을 통해 깨닫게 된 필자의 고백들이 실려 있다. 정년 이후, 지나온 시간들을 돌아보던 필자는 “하릴없이 0을 가리키는 눈금을 가지고 제자리를 지키는 것이 저울”을 보며 “지금은 세상에서 물러설 시간, 내 삶에서 덜어낼 것과 채워 넣을 것을 가려내는 법을 저울에게서 배워야 할 시간이다.”이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세 번째 장 ‘두 번은 없다’에는 전작에서 이어지는 일과 예술에 대한 깊이 있는 글들이 담뿍 담겨 있다. “어디서 끝날지 모르는 낯선 길들로 촘촘히 짜인 미로 속에서 이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하지만 끝내 정답 찾기를 포기하고 “집으로 가는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집이 아닌 곳으로 가는 길을 찾는 것, 헛수고와 낭패를 거듭하더라도 길을 잃는 것, 그리하여 내가 모르는 어떤 곳에 도착하는 것이 이 일의 목표일지 모른다”고 결론 내린다.
네 번째 장 ‘아무 일 없다’는 가족들과 주변 인물에 대한 이야기들이 그려져 있다. “내가 전화하는 걸 깜빡 잊는 날이면 어머니가 전화를 하셨”으나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필자는 늘 가슴이 철렁한다. “늘 듣던 벨 소리. 저 전화를 받으면 “별일 없어, 나 괜찮아, 아무 일 없어”라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그럴 리가 없는데도 터무니없는 생각이 가슴을 찌른다.”는 일화를 전한다.
다섯 번째 장 ‘짧은 만남, 긴 이별’에는 필자가 다른 매체에 발표했던 글들이 담겨 있다. 앞쪽 네 번째 장까지 실린 글들이 원고지 4, 5매이고, 다섯 번째 장에 실린 글은 원고지 10매 이상이나, 필자가 담고 있는 것은 분량에 상관없이 깊고 넓다.
‘그림자를 말하는 사람‘이라는 이 책의 제목은, 모든 것은 그 그림자를 통해서 본질을 드러낸다는 의미로, 본문 중에 나오는 파울 첼란의 시에서 가져온 것이다. 2021년에 나온 『사물의 뒷모습』의 다른 이름이라 할 수 있는 이 책은, “사물의 뒷모습을 말하는 것은 사물의 그림자 속으로 걸어 들어가 그 회색의 다채로움을 말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의 글에서 “일”이란 단음절 단어가 자주 눈에 띈다. 사람뿐 아니라 하늘, 나무, 바람, 잡초마저도 제각기 나름의 일을 수행修行한다고 여기는 듯하다. 그의 자세는 모자람과 넘침이 없이 아귀가 딱 맞는 가구 같다. 시류에 한눈팔지 않는 그의 반시대적 고찰은 시간이 갈수록 윤이 날 것이다.
-이재룡(문학평론가, 숭실대 명예교수)
추천의 글
2024년 12월. 아직도 한자를 쓰는 『現代文學』의 표지에 숫자 840이 찍혀 있다. 책을 펼치면 안규철의 173번째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창간 이래 한 번도 거르지 않고 840번째 책을 펴내는 『현대문학』에 173회를 꾸준히 연재했다는 사실에 “매체가 곧 메시지”란 말이 떠오른다. 그는 시각 예술가이지만 줄곧 눈에 보이지 않은 영역을 겨냥했듯 오래된 언어의 소굴 『현대문학』에 터를 잡은 그는 글을 방편 삼아 언어 너머의 풍경을 그리는 중이라고 짐작된다. 그의 글에서 “일”이란 단음절 단어가 자주 눈에 띈다. 사람뿐 아니라 하늘, 나무, 바람, 잡초마저도 제각기 나름의 일을 수행修行한다고 여기는 듯하다. 그의 자세는 모자람과 넘침이 없이 아귀가 딱 맞는 가구 같다. 시류에 한눈팔지 않는 그의 반시대적 고찰은 시간이 갈수록 윤이 날 것이다. 빠른 감동과 새것에 열광하는 독자는 부디 이 책, 『그림자를 말하는 사람』을 피하시길 권한다.
이재룡_문학평론가, 숭실대 명예교수
홀로 놓인 사물의 고독과 그리 다르지 않은 한 인간의 고독이 있다. 성찰하는 정신의 영역으로 더욱더 깊이 나아가면서. 이전과는 다른 존재 방식의 가능성을 모색한다는 것. 사소한 물건과 현상의 이면을 통해 진정한 삶의 본질에 대해 다시금 질문한다는 것. 그리하여 그가 하찮고 보잘것없는 사물의 외피를 열어 보일 때 눈에 띄지 않는 가장자리에 놓인 그대로 각각이 모두가 고귀한 중심으로 존재하는 세상을 경탄과 경외 속에서 목격하게 된다.
이제니_시인
그는 선선한 바람처럼 말하고 소박한 찻상처럼 그림을 둔다. 글과 그림 사이에 ‘시’가 있다. 시가 실처럼 글과 그림을 꿰고 있다. 수사나 강조 없이 오롯한 문장은 체로 걸러내고 남은, ‘고요한 글자’들만 종이에 안착한 것처럼 보인다. 고졸하다. 마음 깊이 숨겨둔 돌멩이 하나가 천천히 얼굴을 내미는 풍경이 떠오른다. 뒷모습, 내 그림자다. 허전하던 뒤가 슬며시 밝아지는 기분이다.
박연준_시인
책머리에
수묵화에서 달을 그릴 때, 달의 형태는 비워두고 그 주위의 구름을 그려서 달이 드러나게 하는 기법을 홍운탁월烘雲拓月이라고 한다. 김홍도의 <소림명월도>나 이경윤의 <고사관월도>가 그런 그림들이다. 서양화의 데생에서 목탄이나 연필로 석고상을 그리는 데도 비슷한 방법이 적용된다. 우리가 실제로 그리는 것은 석고상 자체가 아니라 그 위에 드리워진 그림자이다. 밝은 회색에서 가장 짙은 어둠 사이의 풍부한 음영의 스펙트럼을 섬세하게 구분해 묘사함으로써 화면 위에서 석고상이 생생한 실체로 떠오르게 하는 것이다. 그림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국어사전에서 꽃을 설명하는 글에는 꽃이라는 말이 들어갈 수 없다. 꽃 주위의, 꽃이 아닌 모든 것을 이야기함으로써 꽃이 저절로 드러나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꽃은 꽃이다”라는 동어반복의 선문답이 되기 때문이다.
‘그림자를 말하는 사람‘이라는 이 책의 제목은, 이 글들이 사물의 그림자를 통해서 사물을 드러낸다는 의미로, 본문 중에 나오는 파울 첼란의 시에서 가져온 구절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2021년에 나온 『사물의 뒷모습』의 다른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사물의 뒷모습을 말하는 것은 사물의 그림자 속으로 걸어 들어가 그 회색의 다채로움을 말하는 것이다.
본문 중에서
“내가 미술의 이름으로 해온 일 대부분은 사물의 그늘 속에서 모순과 부조리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그 일을 예술가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라 여겨오는 동안 뭔가를 놓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 깊이 타인에 대한 실망과 분노와 혐오를 감춘 채,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렇게 한다고, 그 일이 세상을 위해 좋은 일이라고 애써 믿어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느라 늘 무언가에 화가 나 있었던 것이 아닌지, 그 상태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그런 내 모습을 나만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돌이켜본다.”
-「평범한 날들에 대해」, 17-18
하루 한 번 들르는 손님처럼 주인이 잠깐 다녀가고 나면 진종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자신만의 세계에서 하릴없이 0을 가리키는 눈금을 가지고 제자리를 지키는 것이 저울의 일이었다.
정년을 하고 처음 맞는 새해에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니 온갖 세상일에 엮여서 살아온 이제까지의 생활을 깨끗이 청산하고 온전히 나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은둔자가 되고 싶은 생각이 절반, 이런저런 핑계로 제쳐두었던 세상의 다른 일들에 간여하면서 새 인생을 시작해보고 싶은 생각이 절반이다. 둘 사이에서 내 저울의 추는 이미 한쪽으로 기울었다. 지금은 세상에서 물러설 시간, 내 삶에서 덜어낼 것과 채워 넣을 것을 가려내는 법을 저울에게서 배워야 할 시간이다.
-「저울의 시간」, 71-72
파울 첼란의 「그대도 말하라」,라는 시에서 “마지막 사람으로, 그대의 말을 하라. 그러나 그 말에서 예와 아니오를 가르지 말라. 그 말에 방향을 주어라, 그림자를 주어라”라는 문장이다. “그림자를 말하는 사람이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라는 마지막 구절이 뼈아프게 다가왔다. 나의 젊은 날은 남들처럼 예와 아니오를 가르느라 다 지나가버렸다. 나의 말에 그림자를 준다는 생각은 해볼 겨를이 없었다. 시대 때문이었다고 변명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라도 내가 시인의 말을 실천해볼 수 있을까. 그러기에는 너무 늦었을까. 후배들을 위해 쓰는 글은 결국 나 자신을 향한 독백이 되었다.
-「그림자를 말하는 사람」, 153-154
내가 전화하는 걸 깜빡 잊는 날이면 어머니가 전화를 하셨다. 집 전화로 걸려 오는 전화는 보이스피싱 아니면 어머니 전화뿐이었다. 삼우제를 마치고 조문객들에게 감사 메시지를 보내며 한숨 돌리는 일요일 늦은 오후, 느닷없이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가슴이 철렁한다. 늘 듣던 벨 소리. 저 전화를 받으면 “별일 없어, 나 괜찮아, 아무 일 없어”라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그럴 리가 없는데도 터무니없는 생각이 가슴을 찌른다. 잘못 걸린 전화. 아내가 금세 눈치를 채고 말없이 벨 소리를 바꾼다.
-「아무 일 없다」, 179-180
철이 들면서 나는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속으로 다짐하곤 했었다. 친구분들처럼 서울에 번듯한 병원을 갖지도 못하고, 그 바람에 가족이 떨어져 살게 된 것을 원망하기도 했다. 대학을 나와 한동안 미술잡지 기자로 생활했지만, 끊임없이 낯선 사람들과 만나고 다른 사람들을 다루는 일은 내 적성이 아니었다. 늦게 떠난 유학 끝에 미술을 업으로 삼게 되고 학교에 자리를 잡으면서, 나는 지금의 내가 아버지처럼 살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집과 학교를 규칙적으로 오가는 단조로운 삶, 취미도 없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으며 한자리에서 시시포스처럼 같은 일을 집요하게 반복하는 식물적인 생활을 나는 기꺼이 견딘다. 외로움에 대한 내성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유산이다.
그가 보여준 삶이 그렇고, 또 나를 일찌감치 떠나보냄으로써 독립적인 인간으로 키운 그의 결정이 또한 그렇다. 내 속에는 나의 아버지가 그대로 살아 계신다.
-「짧은 만남, 긴 이별」, 197-1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