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곧은 지성과 정곡을 꽂는 해학적인 말로 우리 시대를 가로질러온 소설가 최일남의 산문집. <정직한 사람에게 꽃다발은 없어도>(1993) 이후 13년 만에 펴낸 것으로, 총 27편의 산문을 총3부로 나누어 수록하고 있다. 70여 년을 살아오는 동안에도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는 저자의 생의 인상들과 만날 수 있다. 이 책의 1장은 등단 시절을 비롯해 소설을 업으로 삼은 저자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진솔하게 들려주고 있으며, 2장은 겸허함과 성실함을 바탕으로 한 문학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3장은 묵은 생강처럼 맵고 예리한 눈으로 우리 현실의 문제를 짚고 있다. 표제작인 <어느 날 문득 손을 바라본다>는 저자가 살아낸 역사의 징표이자 응고를 갖고 있는 손에 대한 예찬을 담고 있다. 우리가 스스로 차분히 돌아보고 각성하게 하는 미덕이 있는 저자의 손에 대한 감회는 예사롭게 다가오지만은 않는다. 또한 책 곳곳에서는 특유의 어휘를 구사하는 저자의 우리말에 대한 사랑을 엿볼 수 있다.
1 어느 날 문득 손을 바라본다 11 키로 말하면 25 그게 글쎄 - 나의 데뷔작 38 배가 ‘쌀쌀’ 아팠던 시절 43 라일락이나 마로니에 54 부실했던 모국어 공사 63 문학적 노후관리 74 2 이태준 「문학독본」 89 함석헌 선생의 말과 글 101 우리말의 폭과 깊이 112 같이, 처럼, 듯이 141 한일 문학 접촉 151 낯설음·이질화를 넘어 - 남북 언어분단에 대한 생각 163 문학과 언어와 땅 184 편집자 198 번역 전성시대 209 ‘한 폭의 동양화’ 224 3 어떤 금혼식 239 우리네 이름 247 ‘살색 지우기’ 256 냄새 냄새 262 가볍고 가볍다 275 시몬 비젠탈의 질문 280 귀를 빌려주는 봉사 286 절과 절밥과 성불사 297 전주비빔밥 306 옛날식 문화부장 317 후기 337
최일남 1932년 전북 전주에서 출생하였고, 서울대 문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53년 「쑥 이야기」가 <문예>에, 그리고 1956년에는 「파양」이 <현대문학>에 추천되어 등단하였다. 저서로는 소설집 『서울 사람들』『타령』『춘자의 사계』『손꼽아 헤어보니』『너무 큰 나무』『홰치는 소리』『누님의 겨울』『히틀러나 진달래』『그때 말이 있었네』『아주 느린 시간』『석류』, 장편소설 『거룩한 응달』『그리고 흔들리는 배』『숨통』『하얀 손』『덧없어라, 그 들녘』『만년필과 파피루스』등이 있다. 이상문학상, 월탄문학상, 한국소설문학상, 한국창작문학상, 인촌상 등을 수상하였다.
■ 이 책은… 예리하지만 푸근하고 해학적인 언어로 한 시대의 대중들의 면면을 담아온 소설가 최일남의 산문집 『어느 날 문득 손을 바라본다』가 현대문학에서 출간되었다. 산문집은 『정직한 사람에게 꽃다발은 없어도』(1993년) 이후 13년 만에 펴내는 것으로, 지상에 발표했던 작품과 새로 쓴 작품을 합해 27편을 싣고 있다. 소설가 최일남은 묵은 생강처럼 맵고 예리한 세태 비평의 눈을 갖고 있지만, 그의 비평은 어떤 대상을 ‘비난'하는 것과는 거리를 둔다. 그는 우리 시대 곳곳에 눈을 주며 옳고 그름을 측량해낼 때도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그의 비평은 그 스스로 겸허해진 상태에서 진실을 바라보고 이야기로 풀어내는 힘에 있다. 때문에 그의 글은 읽는 이를 자극시키지 않고 스스로를 차분히 돌아보고 각성하게 만드는 미덕을 갖는다. 이런 넉넉함은 이번 산문집에서 다시 한 번 확인된다. 책은 크게 3장으로 구성되는데, 1장은 데뷔시절을 비롯해 소설을 업으로 삼은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진솔하게 실려 있다. 2장은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성찰과 문학적 방법, 그리고 문학 경향의 이모저모를 살피고 있다. 3장은 우리 생활문화 등에서 빚어지는 크고 작은 이야기들은 순발력 넘치는 문장으로 담고 있다. 표제작으로 삼고 있는 「어느 날 문득 손을 바라본다」 한 편의 손에 대한 예찬서. 긴 세월 작품을 써온 작가의 손은 가끔씩 머리가 ‘지시'하는 명령을 거부한다. 작가의 결벽성과 한편이 돼 머리가 시키는 일이라도 재탕삼탕 반복되는 단어라면 손이 거부하고 다른 단어를 써놓는다. 이른바 ‘촉각언어'가 경지에 오른 셈이다. 작가는 ‘어지간히 글자를 써제낀 일생'에서 ‘가운뎃손가락의 돌출'이 생겼고, 이를 ‘내가 살아낸 역사의 징표'라고 조심스레 술회한다. 그러면서 그 손가락 덕택에 ‘가솔을 거두고 근근이 책줄이나' 썼다는 노작가의 감회는 예사롭게 다가오지만은 않는다. 「우리말의 폭과 깊이」란 작품은, 남다른 어휘를 구사하는 작가의 우리말에 대한 애정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우리말의 진가는 ‘얼핏 비슷한 말'이라도 ‘그때그때 정황에 따라 쓰임새가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말 임자를 만나야 제값'을 받을 수 있다고 하면서, ‘표현의 틈을 저밀 수 있는 데까지 저며 제일 정확한 놈을 골라내는 작업'을 거쳐야 ‘진국'이 된다며 어휘 선택의 중요함을 강조한다. 더불어 ‘안심, 등심, 쇠가리, 우둔, 콩팥…' 등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쇠고기 부위를 나누는 우리말의 향연을 예로 들면서 미각의 분간까지 예찬한다. 또한 “‘손대중' ‘눈대중' 등과 함께 한국인의 몸에 밴 여유”는 세계에서 찾아볼 수 없다고 추켜세운다. 반면 외래어 틈입과 남북분단이 가져온 말의 이질화가 빠르게 진행중이라며 우리말의 미래에 대한 걱정도 무겁게 하고 있다. 「시몬 비젠탈의 질문」은 뼈아픈 우리 현대사를 돌아보고 있다. 먼저, 나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비젠탈이 후일에 200여 어린이와 여자를 학살했던 나치 친위대원을 만나는 자리에서 친위대원의 참회를 침묵으로 물리친 예를 든다. 그리고 ‘과거사로 논란이 그칠 날 없는' 일본이나 양민학살이 자행된 ‘광주'의 경우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는 없다. 용서할 준비는 되어 있는데 참회가 없다'며, 그것은 ‘한국적 과거사의 두드러진 특성'이라며 침통한 일갈을 터뜨린다. 소설가 최일남이 일흔 넘게 살아오는 동안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던 생의 인상들, 그 인상들은 그의 언어를 빌어 우리 모두의 눈에도 선연한 그림으로 남는다. 그것은 이 시대 속속들이를 몸으로 살아오며 ‘우리들'과 호흡을 맞춘 소설가 최일남의 언행일치의 성실함과 겸허함이 실린 문장들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 본문 중에서
긴 세월 펜대 하나로 산 자의 나 홀로 감상感傷으로는 그게 글쎄 예사롭지 않다. 내 가운뎃손가락의 돌출은 내가 살아낸 역사의 징표이자 응고인 까닭이다. 따라서 어떨 때는 애잔하고 어떨 때는 대견하다. 얼마나 혹사했으면 생으로 혹을 세워 나를 지탱해주었는가 싶어 다 늦게 미안한 생각마저 든다. 결과나 성과는 별문제다. 나이 칠십이 넘기를 기약한 채 살고 말고를 떠나 어떻든 여기까지 함께 왔다. 입에 담기 무엇한 소리로되, 덕택에 가솔을 거두고 근근이 책줄이나 쓴 셈이다. 가만히 손을 바라볼 때마다 저절로 눈이 가, 거듭거듭 매만지는 소이所以다.
-「어느 날 문득 손을 바라본다」중에서
어렵게 쓰는 글보다 쉽게 쓰는 글이 더욱 힘들고 많은 수련을 거치지 않고는 택도 없듯이, 선생의 맛깔스런 문체 역시 그냥저냥 이루어진 게 아닐 터이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강조하기 전에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을까. 단순하게 응집된 말로 잠자던 씨?들의 의식을 깨운다. 단칼에 의표를 찌르는 글로 권세가들이 둘러쓴 위선의 너울을 통쾌하게 벗기는 일이 그래서 가능했을 것이다. 덕분에 우리는 오늘도 선생이 남긴 글을 통해 희망과 슬픔 사이를 따분하지 않게 오락가락한다. -「함석헌 선생의 말과 글」중에서 어떤 이혼녀 말대로 서대문을 가기 위해 탄 버스가 동대문으로 가면 아차! 갈아타기를 주저하지 않는 시속時俗을 다들 산다. 몰랐다면 모를까 뻔히 알면서 계속 타고 가는 것은 미련한 짓이라고 했거늘 말이야 옳은 말이다. 한데 그럴 때는 또 금혼식이나 은혼식 안팎을 가는 부부들에게 묻고 싶어진다. 당신들은 버스를 잘못 탔다고 후회한 적이 없는가. 알았다면 왜 내리지 않았는가? 억지로 체념했는가. 쓸데없는 소리일 것 같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세상천지에 버스 갈아타는 사람투성이게? 서대문으로 가자고 작정한 동기는 무엇이며, 참을성 있게 견디다가 동대문으로 되돌아가면 난리라도 난다더냐, 반문할 공산이 크다. 금혼식은 바로 이런 이들 차지임에 틀림없다. -「어떤 금혼식」중에서 그립다. 농약 안 친 무논의 벼 익는 냄새가 그립고, 석양이면 피라미들이 수면 위로 풀쩍풀쩍 튀어오르던 시냇물의 해감내가 그립다. 동백기름으로 가리마를 탄 새댁의 머리 냄새가 그립고, 그녀가 수줍게 비켜 앉아 젖을 빨리던 떡아기의 살 냄새가 그립다. 그때로 돌아가자는 이야기라면 멋쩍다. 그만치 정갈하고 수더분한 냄새를 삶 속에 복원하는 마음가짐으로 살고 싶다는 뜻이다.
-「냄새 냄새」중에서
미안한 말이지만 만인의 입에 맞는 음식은 엄밀한 의미에서 음식이 아니다. 음식의 개성을 들먹이기 전에 꿩도 매도 다 놓칠 공산이 크다. 그런 것은 맥도널드 형제의 햄버거나 콜라 사이다류로 족하다. 원천적으로는 같되 현실적으로는 다른 것들의 집합이 더욱 튼튼한 융합을 가져올 수 있다는 원리를 음식만큼 잘 나타내는 것도 드물다. -「전주비빔밥」중에서 기억은 또 수수께끼 같은 자기만의 법칙을 따른다고 했다. 경찰이 수첩에 기록된 범죄자를 가려내듯, 하필이면 괴롭고 수치스러운 일을 반복해서 떠올리게 하는 수가 많다. 노년의 어린 시절을 마흔 살 때보다 더 선명히 기억하게 만드는 역순의 요술을 부리기도 한다. 거꾸로 오늘의 이 순간을 꼭 기억해야 한다고 다짐한다? 몇 달이 못 가, 아니 겨우 이틀만 지나도 그 순간의 색깔, 냄새, 향기를 자신이 원했던 만큼 생생히 기억하기 어렵다. 기억이 쏘삭거리는 이런저런 심술이 싫어 아예 망각을 작정한들 소용없다. 그럴수록 잠 안 오는 밤의 머리맡에 나타나 엉뚱한 수작을 부리려든다.
-「후기」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