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든 여자든 사람은 자신의 얼굴 모습을 꾸며 표정을 짓고 양손을 움직여 손짓을 하고 몸짓과 발걸음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그 모든 것이 다 정면에 나타나 있다.
그렇다면 이면은? 뒤쪽은? 등 뒤는?
등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너그럽고 솔직하고 용기 있는 한 사람이 내게로 오는 것을 보고 난 뒤에 그가 돌아서 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것이 겉모습에 불과했음을 얼마나 여러 번 깨달았던가.
_5쪽, 「뒤쪽이 진실이다!」
저들 어른들은 대체 무얼 보고 있기에, 저토록 심각한 것일까? 그 무슨 속된 구경거리에 저토록 절박하게 팔려 있기에, 저들은 단 하나 중요한 것을, 잊혀진 채 무시당하고 뒷전이 된 이 어린 천사를 보지 못하는 것일까?
우리는 얼마나 여러 번 어리석은 즐거움들을 좇아 무작정 달리곤 하는가, 우리를 기다리는 천사가 등 뒤에 와 있는데.
_32쪽, 「잊혀진 천사」
풀베기의 경쾌한 만족감. 리듬의 맛,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흔드는 두 팔—한편, 왼쪽에서 오른쪽을 향해 반대로 움직여 균형을 잡는 몸—
풀베기 연장의 날이 꽃과 꽃받침과 줄기들의 무더기 진 풀 더미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어, 화본과 식물의 연한 살을 싹둑싹둑 잘라내어 왼쪽에 깔끔하게 쌓아놓으니,
뿜어져 나오는 그 분비액, 수액, 그리고 유액의 세찬 신선함—그 모든 것이 자아내는 단순한 행복, 내 그 맛에 여한 없이 흠뻑 취하노라.
_46쪽, 「풀베기」
돌연 대지가 생기를 띤다, 번뜩인다, 노래하며 하늘도 조금 반사한다.
샘물이 솟아난 것이다. 물은 대지의 시선이라고 시인은 말했다.
물의 전능한 부름에 몸뚱이들이 복종한다. 몸뚱이들은 흐르는 원소 앞에 경배하며 넙죽이
엎드린다. 작은 손들은 파닥거리는 물고기가 된다. 입들이 긴 입맞춤을 갈구하며 앞으로 뻗는다. 물은 차디찬 뱀이 되어 온몸을 타고 내려간다.
_54쪽, 「흐르는 물」
나 죽거든 사람들의 왕래가 잦고 활기 넘치는 어느 뜰 안에 묻어주고, 산책자의 관심을 끄는, 보기 좋고 기발한 모자이크 장식으로 덮어주기 바라오. 나의 배 위에서 약사의 헌 신발이나 카드점 치는 여자의 슬리퍼 끄는 익숙한 소리, 어린 사내아이들 맨발이 찰싹대는 소리, 줄넘기 돌차기 놀이 하는 어린 계집아이들 신발 부딪는 소리를 나는 듣고 싶소.
_58쪽, 「발소리」
■ 글_ 미셸 투르니에(MICHEL TOURNIER)
유럽을 대표하는 지성인이자 프랑스 최고의 작가.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를 재해석한 데뷔작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1967)으로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 부문 그랑프리를 수상한 데 이어, 『마왕』(1970)으로 공쿠르상을 수상했다. 1972년에는 공쿠르상을 심사하는 아카데미 공쿠르의 종신회원으로 선출되었고, 2016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평생 파리 근교 소도시에서 집필 활동에 전념하여, 『메테오르』(1975), 『질과 잔』(1983) 등의 소설과 『짧은 글 긴 침묵』(1986), 『예찬』(2000) 등의 산문집을 써냈다.
■ 사진_ 에두아르 부바(EDOUARD BOUBAT)
제2차 세계대전 중 파리 에콜 에스티엔느에서 사진 요판술을 공부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순간’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그의 탁월한 능력은 타인들에 대한 관심에 역점을 둔 전후의 미술 성향과 조화를 이루었다. 1947년에 코닥상을 수상했고, 고급 예술지 《레알리테》와 오랫동안 협업하다가 1967년부터 독립 작가로 활동했다. 1977년 사진 축제 ‘아를의 만남’을 기획, 1984년에는 사진 부문 국가대상을 수상했다.
■ 옮긴이_ 김화영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랑스 프로방스대학교에서 알베르 카뮈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학교 불문학과에서 30여 년간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1999년 최고의 불문학 번역가로 선정된 바 있다. 현재 고려대학교 명예 교수이다. 저서로 『문학 상상력의 연구』 『행복의 충격』 『시간의 파도로 지은 성』 『여름의 묘약』 등이 있으며, 미셸 투르니에의 『예찬』 『짧은 글 긴 침묵』 『외면일기』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을 비롯하여, 「알베르 카뮈 전집」(전20권), 『마담 보바리』 『섬』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내 생애의 아이들』 등 다수의 작품을 우리말로 옮겼다.
문득 걸음을 멈춘 존재의 뒷모습
아무것도 아닌 순간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부바’의 사진과
프랑스 대표 지성 ‘투르니에’의 글이 마주친
걸작 에세이 『뒷모습』, 20여 년 만의 개정판 출간
2002년 국내에 출간되어 20년 가까이 사랑받아온 미셸 투르니에의 에세이 『뒷모습』이 한층 완성도 높은 번역으로 돌아왔다. 2016년 타계하기까지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마왕』을 비롯한 걸작 소설들과 『짧은 글 긴 침묵』『예찬』『외면일기』 등의 산문집을 선보이며 프랑스 최고 작가이자 유럽의 대표적 지성으로 손꼽혔던 투르니에가 사진 역사에서 중요한 봉우리를 차지하는 에두아르 부바와 함께 펴낸 이 책은 역자인 김화영 교수가 파리의 중고 서점에서 발견하자마자 단숨에 읽고 번역을 결심한, 매혹적인 작품이다. 이번 개정판에서는 기존 번역의 오류들을 꼼꼼히 바로잡은 것은 물론, 시대 흐름에 걸맞게 단어 하나, 문장 한 줄까지 세심히 다듬어 투르니에의 작품을 처음 접하는 젊은 독자들도 글의 뉘앙스와 묘미를 온전히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
사람은 자신의 얼굴 모습을 꾸며 표정을 짓고 양손을 움직여 손짓을 하고
몸짓과 발걸음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그 모든 것이 다 정면에 나타나 있다.
그렇다면 이면은? 뒤쪽은? 등 뒤는?
등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이 작은 책이 탐사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 등 뒤의 진실이다. _본문에서
사진은 때로 말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변화무쌍한 현실을 한순간 정지시킴으로써 익숙하기 그지없던 풍경을 낯설게 만들고, 그 이미지 뒤에 숨겨진 사연을 상상하게끔 한다. 사진은 분명 인간이 개발해낸 완전히 새로운 형식의, 강력한 언어이다. 앙상한 몸으로 쟁기를 지고 가는 농부, 황량한 바닷가에서 홀로 그림을 그리는 중년 여인, 엎드려 기도하는 신자들, 파도를 바라보는 가난한 연인, 아이를 품에 안고 선 어머니, 키 큰 어른들의 어깨 저 너머가 너무나도 궁금한 어린 천사, 지팡이를 짚고 걸어가는 등 굽은 노인, 쓰레기로 가득한 파리의 거리 등, 이 책에는 사람과 세상의 ‘뒷모습’을 포착한 에두아르 부바의 흑백사진 50여 점이 실려 있다. 그리고 미셸 투르니에는 거장다운 상상력과 깊이 있는 통찰을 발휘해 각각의 사진들에서 내밀한 이야기를 끌어내고 이를 풍부한 시적 언어로 독자에게 전한다.
이 책이 보여주는 뒷모습은 정직하다. 단순하고 소박하다. 쓸쓸하지만 한없이 아름답다. 부바와 투르니에는 카메라 렌즈에 비친 ‘뒷모습’을 통해 삶과 인간, 사랑과 우정, 신앙과 우주에 대해 성찰하고 서로 교감한다. 그리고 세상의 진실은 거짓으로 꾸밀 수 있는 앞모습이 아니라 뒤쪽에 있다고, 뒷모습을 통해 우리는 심층적인 내면에 이를 수 있다고 결언한다. 새 번역으로 재탄생한 『뒷모습』은 앞선 20여 년간 그러했듯 새 시대의 새로운 독자들에게도 아름다운 사진과 글을 감상하는 즐거움과 함께 인간과 삶, 세상과 사회의 심층을 들여다보는 충만한 기쁨을 안겨줄 것이다.
이제 이 책 위에 내려앉은 세월의 먼지를 털고 투르니에의 지혜롭고 아름다운 텍스트를 완전히 새롭게 번역하여 새로운 독자들에게 내보낸다. 이 책을 처음 펴낼 때를 전후한 10여 년간 내가 파리 근교의 작은 마을 슈아젤로 찾아가 만나곤 했던 작가 미셸 투르니에 씨는 4년 전인 2016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제 친절하고 유머 넘치던 그의 웃는 얼굴도 ‘뒷모습’이 되었다. _2020년판 새 번역에 부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