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은이 미셸 투르니에 미셸 투르니에는 43세에 처녀작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으로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대상을, 두 번째 작품 『마왕』으로 공쿠르상을 수상하고, 1972년부터는 아카데미 공쿠르의 종신회원으로 활동 중인 현존하는 프랑스 최고의 작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런 소설가적 이력이 투르니에의 모든 것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소르본느와 독일에서 철학을 전공한 투르니에는 철학자이기도 하며, 파리의 부르주아 가정에서 태어나 교양 있는 교육을 받은 세련된 심미가이며, 1924년에 태어나 우리 나이로 여든을 바라보는 그는 유럽의 격변을 몸으로 체험한 20세기의 증인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투르니에는 긴 시간을 통찰한 하나의 두께 있는 시선이며, 유럽의 정신사를 담고 있는 지성이고, 인간에 대한 탐욕스러운 관심과 애정 그 자체이다. 국내에 번역된 그의 대표작으로는 『예찬』『짧은 글 긴 침묵』『흡혈귀의 비상』『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외면일기』 등이 있다. ■ 옮긴이 이규현 이규현은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불어불문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 프랑스 디종의 부르고뉴 대학에서 수학. 현재 서울대, 서강대에서 불문학을 강의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알코올』『프로이트와 문학의 이해』『성의 역사 1 : 앎의 의지』『기호의 정치경제학 비판』『헤르메스』 등이 있다.
■ 이 책은 『황야의 수탉』에서 투르니에는 전설적인 이야기들을 통해 사물들의 감춰진 의미를 드러내고 본질을 파악하고 있다. 각 단편들의 배경이 되는 신화는 우리에게 널리 익숙한 것이고, 형식이 까다롭지 않아 쉽게 접근할 수 있고, 또한 작품의 일차적인 의미가 분명히 다가와 투르니에 소설의 특징을 이해할 수 있다. 「꼬마 푸세의 가출」은 현실 속에 신화를 구현시키고 있는 인상적인 작품이다. 어린 소년 푸세는 모든 시설이 첨단으로 갖추어진 고층 아파트로 이사간다는 벌목꾼 아버지의 말을 듣고 가출을 결행한다. 트럭운전수를 속여 트럭을 얻어 탄 푸세는 신비한 숲으로 들어가 히피들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거기서 푸세는 로그르에게 숲과 지상낙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대마초를 피운다. 들이닥친 경찰관에 의해 푸세는 24층 고층 아파트로 되돌려져와 자기 방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로그르의 장화를 꺼내놓고 커다란 나무를 행복하게 상상한다. 푸세의 풍요로운 자연과 그 자연을 거세하는 도시의 아버지와의 폭력을 대비시켜 투르니에는 파괴적인 현대문명에서의 영원한 탈출구는 자연임을 상기시킨다. 산타크로스로 분장한 어머니가 갓난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산타 할머니」의 다정한 이미지, 프로이트의 '초자아, 자아, 이드'의 정신분석학을 문학으로 흡수시켜 인간의 정신을 다룬 「황야의 수탉」 기욤의 해학적인 이미지, 신체적인 결함과 초인의 모습을 띠는 「붉은 난쟁이」 뤼시앵의 모순적인 이미지, 「아망딘 또는 두 정원」에서 고양이를 찾기 위해 담을 넘어 잡초 무성한 정원을 돌아다니다가 초경을 경험하고는 거울 앞에서 자신의 변한 모습을 살피는 아망딘의 순수한 이미지, 「아담가」에서 아벨의 아들들과 함께 유목생활을 하다가 기진맥진한 모습으로 손자 카인이 에녹에 세워놓은 신전으로 찾아든 여호와의 이미지, 소공원의 공중 화장실에서 자신의 고추를 면도칼로 잘라버리는 소년 「튀피크」의 섬뜩한 이미지, 「기쁨이 내게 머물게 하소서」에서 비도슈가 정신과 육신, 현실과 예술 사이에서 겪는 절망적인 이미지, 마지막 대목에서 줄에 걸린 여자 속옷들을 호주머니에 챙겨넣으려고 기를 쓰는 「페티시스트」의 카프카적 이미지 등은 상징적 의미가 풍부하고 그런 만큼 해석의 여지가 넓다. 투르니에가 각 작품을 통해 주장하는 진실은 환상을 빌어 현실을 직시하고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데 있다. 섬뜩할 정도의 비정상적인 상황을 극단까지 묘사하는 부분들은 사회, 문화적으로 우리가 언급하기를 회피하는 터부들이 대부분이다. 독자들이 곤혹스러워지는 부분들, 답이 궁해지고 어려워지는 순간이 이 터부들과 마주치는 순간들이다. 이때 독자는 자신만의 솔직한 물음을 품고 각 이미지를 가만히 바라보면서 기다려야 한다. 그러면 독자의 기다림에 작품이 느릿느릿 답하게 되고, 다수의 새로운 의미들이 합류해 들어오며, 가능한 해석들이 풍성하게 돋아나기 시작한다. 일차원적이고 단선적인 해석, 구태의연한 합리적 해석에 기대고 있었던 의식이 사라지고 난 공백으로 의미들이 충만해지면서 작품의 세계가 열리고, 이때 비로소 작품이 경험되기 시작한다. 이것이 투르니에의 신화적 소설이 함축하고 있는 비밀이다. ■ 본문 중에서 미셸 투르니에는 신화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한 사람, '신화의 위대한 재창안자' '형이상학적 소설가'로 알려져 있지만, 이러한 규정은 그의 진면목의 일부만을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그의 진실한 모습은 말할 나위 없이 창조적 상호 텍스트성의 보고인 그의 작품들 속에 생생하게 들어 있다. 그리고 그가 스스로 인정하듯이, 그의 작품들은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니라 독자가 자기 것으로 해야 할 것이고, 그가 주장하고자 하는 생생한 진실도 독자가 작품의 세계로 들어가는 경험을 통해 체득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콩트 및 단편 모음집은 장편소설들에 비해 그의 작품세계로 입문하는 데 훨씬 쉽고 그만큼 귀중한 자료가 된다. -‘옮긴이의 말' 중에서 피에르는 자기 방에 혼자 있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침대 아래에서 축 늘어진 황금빛 가죽 장화를 끄집어낸다. 신기가 어렵지 않다. 그만큼 그에게는 너무 큰 장화다! 그걸 신고 걷기는 매우 곤란할 것이다. 그러나 신고 다니기 위한 장화가 아니다. 꿈을 꾸기 위한 장화다. 그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는다. 떠난다. 아주 멀리 떠난다. 그는 거대한 마로니에가 된다. 우뚝 솟아난 꽃들이 작은 크림빛 샹들리에 같다. 움직임 없는 푸른 하늘에 높이 서 있다. 갑자기 바람이 지나간다. 피에르가 부드럽게 살랑거리는 소리를 낸다. 그의 수많은 푸른 날개들이 공중에서 파닥인다. 그의 가지들이 축복하는 몸짓으로 흔들린다. 햇살이 부채처럼 활짝 퍼지더니, 청록색으로 무성한 그의 나뭇잎 그늘에 갇힌다. 그는 한없이 행복하다. 한 그루 커다란 나무는……. -「꼬마 푸세의 가출」 중에서 벽과 바닥이 온통 직물 사진들로 도배되어 있었다. 도처에, 높은 곳에, 낮은 곳에, 오른쪽에, 왼쪽에 납작하게 눌리거나 확대된, 둘둘 말렸거나 펼쳐진, 장례 현수막으로 복제되고 온갖 자세로 뇌리를 자극하는 육체의 칙칙한 황금빛 환영 일색이었다. 벗겨낸 다음에 잔인한 전리품으로 늘어놓은 일련의 인간 가죽을 누구나 상상했을 것이다. 시체 공시장처럼 보이는 소성당엔 나 혼자였다. 엑토르의 얼굴과 몸통을 상기시키는 어떤 세세한 부분을 발견할 때마다 나의 불안은 심해졌다. -「베로니크의 수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