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코스타상을 세 차례 수상하며 문단 내에서 독보적 위치를 점하고 있는 작가 케이트 앳킨슨의 초기 대표작 『인간 크로케』(1997)가 현대문학에서 출간되었다. 첫 소설 『박물관의 뒤 풍경』(1995)으로 거장 살만 루슈디를 제치고 휫브레드상(현 코스타상)을 수상한 앳킨슨은 데뷔 후 2년 만에 발표한 이 작품에서 과거와 현재, 환상과 현실을 넘나들며 가문의 비극적 역사를 목격하는 열여섯 살 소녀 이소벨의 이야기를 그렸다. 이 소설은 쇠락해가는 한 가문의 연대기이자 살인과 실종에 관한 미스터리이며 성장기라고 할 수 있다.
앳킨슨은 한 인터뷰에서 『인간 크로케』에 대해 “내 소설들 가운데 가장 어두운 작품이자 최고의 작품”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데뷔 직후인 20년 전에 발표한 소설이지만, 『인간 크로케』에는 장르적 기법을 도입한 흥미진진한 스토리텔링과 역사의 주요 장면들을 전시하듯 생생하게 되살려낸 세밀한 묘사, 신비롭고 몽환적인 분위기까지 오늘날 작가를 최고의 반열에 오르게 한 장점들이 빠짐없이 녹아 있다.
그러다 페어팩스 부인이 사라졌다.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별안간에, 그리고 수수께끼처럼. 그날 프랜시스 경은 당일치기 사냥을 나가 보기 좋게 토실토실한 암사슴의 심장을 꿰뚫고 돌아온 뒤 아내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부엌일을 보는 하녀 아이 하나가—일자무식인 계집아이가—페어팩스 부인이 오크 부인 밑에서 사라지는 모습을 보았노라고, 부인의 초록색 능라 드레스가 주변 나무들과 분간하기 어려울 때까지 점점 희미해지는 모습을 보았노라고 떠들어댔다. 하녀는, 페어팩스 부인이 점점 흐릿해지면서 이 집안에, 과거와 미래에 무시무시한 저주를 내렸노라고, 또 그 소름 끼치는 비명 소리는 부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뒤에도 오랫동안 허공에 메아리쳤노라고 했다. _본문 20~21쪽, 「나무 거리들」
그날 밤 잠자리에 들기 전, 과부가 아이들에게 들려줄 슬픈 소식이 있다고 말했다. 찰스의 얼굴은 고통을 담은 한 폭의 그림이 되었다. “아빠도 우리를 떠난 건 아니죠?” 찰스가 과부에게 소곤거리자 과부는 슬프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구나, 찰스.”
“아빠는 돌아올 거예요. 아빠는 돌아올 거라고요.” 찰스가 완강하게 저항했다.
비니가 리치 티 비스킷 하나를 차에 적셔서 커다란 설치류처럼 야금야금 깨물어 먹었다. 과부의 검버섯 핀 늙은 손이 달달 떨리는 바람에 받침접시 위에서 찻잔이 달그락거렸고 그러는 사이 과부가 말했다. “아빠는 돌아올 수 없다, 찰스.” _본문 230~231쪽, 「덜떨어진 인간들」
“이지?” 아버지가 어둠 속에서 소곤거린다. “너 자니?” 그러고는 발끝으로 살금살금 다가와 내 침대 끝에 걸터앉고는 손안에 든 무언가를 빤히 쳐다본다. 내가 겨우 몸을 일으켜 앉자 고든이 손안에 든 것을 내게 들어 보인다. 달빛을 받아서 검은빛보다 더 검어 보이는 까만 머리 다발이다. “너희 엄마 거란다.” 고든이 애처로운 목소리로 말한다. 온몸에 오싹 전율이 흐른다. 드디어 고든이 내게 엘리자 얘기를 해주려고 한다. 엘리자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자신이 얼마나 엘리자를 사랑했는지, 두 사람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엘리자가 떠난 것은 얼마나 끔찍한 실수였는지, 줄곧 엘리자는 얼마나 돌아오고 싶어 했는지.
그 대신, 고든의 눈길이 어둠을 뚫고서 내게 닿는 게 느껴질 때쯤 그가 생기 없는 목소리로 말한다. “내가 네 엄마를 죽였다.” _본문 308~309쪽, 「외계인 실험」
■ 차례
시작 나무 거리들
현재 기묘한 일
뭐가 잘못된 거야?
과거 반나절 근무
현재 빛의 잎들
과거 덜떨어진 인간들
현재 외계인 실험
과거 이 지역의 결실
현재 외계인 실험(이어서)
성공적인 파티의 기술
죽이는 시간
현재 다른 세계가 있는데 그게 바로 이 세계다
과거 예쁘디예쁜 길
현재 이 푸르고 즐거운 세상
과거 원죄
미래 나무 거리들
옮긴이의 말
■ 지은이_ 케이트 앳킨슨Kate Atkinson
1951년 요크에서 태어나 던디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글을 쓰다가 1995년 첫 소설 『박물관의 뒤 풍경』으로 영국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휫브레드상(현 코스타상) ‘올해의 책’ 부문에서 수상하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살만 루슈디를 제치고 수상하여 더욱 화제가 되었던 이 소설은 《옵서버》가 선정한 ‘최고의 영국 소설(1980~2005)’ 후보작에 올랐고, TV 시리즈와 연극으로도 제작되어 큰 인기를 끌었다. 이어 1997년에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300년의 비극적인 가족사와 마주하게 된 소녀 이소벨의 이야기를 그린 『인간 크로케』를 발표, “영문학의 풍경에 새로운 색채를 불어넣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쇠락해가는 한 가문의 연대기이자 미스터리이며 십 대 소녀의 성장기이기도 한 이 작품에 대해 작가는 “내 소설 가운데 가장 어두운 작품이자 최고의 작품”이라고 자평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희곡 「유기Abandonment」(2000), 단편집 『세상의 끝이 아닌Not the End of the World』(2002), 『케임브리지 살인 사건』 외 총 네 권으로 구성된 ‘잭슨 브로디 시리즈’(2004~2010) 등 다양한 작품을 썼고, 2013년에는 『라이프 애프터 라이프』로, 2015년에는 『폐허의 신A God in Ruins』으로 각각 코스타상을 수상하며 3회 수상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또한 2011년에는 문학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영국 왕실이 수여하는 대영제국 훈작사를 받았다.
■ 옮긴이_ 이정미
이화여자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웨스트민스터대학교에서 대중음악산업 경영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충무로국제영화제와 서울와우북페스티벌 조직위원회 등 문화 축제의 홍보 및 기획 업무를 담당하다가 현재는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케이트 앳킨슨의 『박물관의 뒤 풍경』을 우리말로 옮겼다.
비극적인 가족사와 영국식 유머가 드라마틱하게 펼쳐지는
코스타상 3회 수상 작가 케이트 앳킨슨의 최고 걸작
『인간 크로케』 출간
영국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코스타상을 세 차례 수상하며 문단 내에서 독보적 위치를 점하고 있는 작가 케이트 앳킨슨의 초기 대표작 『인간 크로케』(1997)가 현대문학에서 출간되었다. 첫 소설 『박물관의 뒤 풍경』(1995)으로 거장 살만 루슈디를 제치고 휫브레드상(현 코스타상)을 수상한 앳킨슨은 데뷔 후 2년 만에 발표한 이 작품에서 과거와 현재, 환상과 현실을 넘나들며 가문의 비극적 역사를 목격하는 열여섯 살 소녀 이소벨의 이야기를 그렸다. 이 소설은 쇠락해가는 한 가문의 연대기이자 살인과 실종에 관한 미스터리이며 성장기라고 할 수 있다.
앳킨슨은 한 인터뷰에서 『인간 크로케』에 대해 “내 소설들 가운데 가장 어두운 작품이자 최고의 작품”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데뷔 직후인 20년 전에 발표한 소설이지만, 『인간 크로케』에는 장르적 기법을 도입한 흥미진진한 스토리텔링과 역사의 주요 장면들을 전시하듯 생생하게 되살려낸 세밀한 묘사, 신비롭고 몽환적인 분위기까지 오늘날 작가를 최고의 반열에 오르게 한 장점들이 빠짐없이 녹아 있다.
■ 이 책은……
1600년경 영국의 작은 마을 리스에 프랜시스 페어팩스라는 사내가 들어와 터를 잡는다. 그는 여왕이 하사한 땅에 대저택을 짓고 젊은 아내를 얻었다. 그런데 돌연 그 아내가 무성한 소문만 남긴 채 숲속에서 자취를 감추고, 몇 년 뒤 프랜시스마저 저택과 함께 불타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여기서부터 페어팩스 가문의 비극적 역사가 시작된다. 300여 년이 흐른 후, 페어팩스 저택이 사라진 자리에 들어선 조그만 집 ‘아든’에서 이소벨 페어팩스가 태어난다.
이소벨은 페어팩스 가문의 저주받은 운명을 고스란히 타고난 불운한 열여섯 살 소녀다. 어머니인 엘리자는 오래전 (1대 페어팩스 부인처럼) 숲속에서 행방불명되었고, 아버지는 이소벨과 오빠를 버리고 떠났다가 7년 만에 딴사람이 되어 돌아왔다. 남매는 고모의 무관심과 냉대 속에 자라면서, 내내 사라진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어머니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린다. 그러던 어느 날 이소벨은 눈앞에 페어팩스 가문의 옛 모습이 펼쳐지는 기묘한 경험을 하게 된다.
『인간 크로케』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시간 여행을 하게 된 주인공 이소벨의 시선을 따라 페어팩스 집안의 과거를 되짚어간다. 프랜시스 페어팩스가 가문을 일으킨 300년 전에서 시작해, 산업화와 세계대전 등을 거치며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경제적 쇠퇴를 거듭해가는 과정, 그 속에서 온갖 부침을 겪으며 살아온 이전 세대들의 사연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리고 마침내 어머니 엘리자의 실종 뒤에 감춰져 있던 진실에 이르면서 수백 년을 이어져온 저주의 실체가 모두 밝혀진다.
전쟁과 폭력, 가족의 실종과 죽음이라는 커다란 불행 속에서도 잼 만들기나 정원 가꾸기 같은 소소한 취미를 누리면서, 또 짝사랑으로 고민하면서 현실을 극복하려 애쓰는 페어팩스 일가와 그 이웃들의 모습은 순간순간 작은 웃음을 선사하며 우리 삶이 희극이나 비극 어느 한쪽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깨달음을 준다. 무엇보다 사라진 어머니에 관한 불확실한 기억에만 매달리던 이소벨이 자신의 뿌리를 확인하고 가족이 처한 불행의 근원을 마주하며 ‘과거’가 아닌 ‘미래’로 서서히 나아가는 모습은 수많은 불행과 맞닥뜨리고 흔들리면서도 결국 방향을 수정하며 조금씩 성장해가는 우리의 삶과도 다르지 않기에 더욱 큰 감동을 안겨준다.
■ 추천사
케이트 앳킨슨은 첫 소설로 휫브레드상을 수상했다. 그녀는 첫 소설만큼 독창적이고, 읽기 쉽고, 재미있는 소설을 쓸 수 있을까? 그렇다. 『인간 크로케』가 그 점을 당당하게 입증한다. _《아이리시 이그재미너》
앳킨슨은 『박물관의 뒤 풍경』과 『인간 크로케』 단 두 편의 소설로 영문학의 풍경에 새로운 색채를 불어넣었다. _《가디언》
생생하고 상상력으로 가득하며, 웃음과 공포가 쉼 없이 교차하는 작품. _《옵서버》
이 작품은 한편으로 유령 이야기이자 살인에 관한 미스터리이기도 하다. 스릴러 소설처럼 엄청난 흡인력을 갖고 있는, 정교하게 쓰인 문학 작품이다. _《코즈모폴리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