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20세기 영국의 가장 대중적인 작가 중 하나이자 ‘서스펜스의 여왕’ ‘최고의 이야기꾼’으로 칭송받는 대프니 듀 모리에의 열한 번째 장편소설 『희생양』(1957)이 현대문학에서 출간되었다. 이번 한국어판 『희생양』은 1938년 전미도서상 수상작 『레베카』, 「새」 「지금 쳐다보지 마」 등 듀 모리에 최고의 단편 9편을 모은 『대프니 듀 모리에』(세계문학단편선 10), 고딕 로맨스의 고전으로 꼽히는 『자메이카 여인숙』에 이어 현대문학에서 펴낸 듀 모리에의 작품으로 네 번째 권이다.
영국 고딕 문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고 평가받는 듀 모리에는 초자연적이고 초일상적인 요소들이 일상에 스며들었을 때 느끼는 공포를 통해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어둠을 드러낸 데 탁월한 작가이다. 그녀는 현실과 꿈이 모호하게 뒤섞인 듯한 기묘한 동화 같은 세계 속에서 외면되었던 무의식, 욕망, 억압된 자아를 암시했고, 이러한 작가의 스타일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 나온 대표적인 작품이 『희생양』이다.
『희생양』은 프랑스를 여행하던 영국인 ‘존’이 자신과 똑같이 생긴 프랑스인 ‘장 드게’와 한순간에 신분이 뒤바뀌어 그의 인생을 대신 살게 되는 이야기이다. 닮은꼴의 두 인물 삶이 빛과 그림자, 선과 악, 사랑과 증오처럼 대비되는, 오랜 문학적 소재인 ‘쌍둥이 주제’를 듀 모리에는 특유의 심리적 리얼리즘 기법과 직접적인 내러티브를 통해 자신만의 색깔이 가득한 매혹적인 서스펜스 드라마로 탄생시켰다. 대중소설의 경계를 넘어 정통 문학으로서 손색이 없는 작품들을 펴낸 작가로 일컬어지는 듀 모리에는 이러한 이야기 속에 이중 정체성의 문제, 인간 존재의 고독과 방황, 불분명한 선악의 경계, 세계대전 이후의 상실된 인간성 회복과 같은 묵직한 주제들을 담아내고 있다.
히치콕의 뮤즈로도 널리 알려진, ‘스크린이 사랑한 작가’ 듀 모리에의 다른 많은 작품들처럼 『희생양』 역시 1959년 앨릭 기니스 경 주연의 영화로 한 차례 제작되었고, 2012년에는 이야기의 배경을 프랑스가 아닌,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을 앞둔 영국으로 옮긴 텔레비전 영화로 만들어져 방영되었다. 두 영화 모두 저마다 독특한 각색으로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하면서 많은 창작자들에게 영감을 주는 원작자, 듀 모리에 이야기의 힘을 다시금 입증했다.
“그는 내 그림자고, 나는 그의 그림자”였다
또 다른 자신과 인생이 뒤바뀐 한 남자의 위태로운 가면극
• 이 책의 탄생 배경
프랑스 혈통의 영국 소설가 듀 모리에는 조상들에 대한 자료를 모으러 프랑스에 갔을 때 『희생양』을 구상했으며, 자기 가문의 역사에서 모티프를 얻은 이 소설의 배경으로 과거와 전통에 충실한 분위기가 깃든 프랑스의 시골 마을을 등장시켰다. 그녀는 특별히 남편 프레더릭 브라우닝과의 결혼 25주년 해에 맞춰 이 책을 펴냈는데, 당시 그녀가 남긴 한 편지에는 그 이유를 설명하는 듯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남편과 나) 우리는 또 다른 나doubles예요. (……) 우리 모두는 그 혹은 그녀의 어두운 면을 가지고 있어요. 무엇으로 다른 한 면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듀 모리에는 어린 시절 아들을 원했던 아버지로 인해 일생 자기 내면은 남성이라 믿어왔다고 한다. 그러한 그녀가 여성 작가로서, 한 남자의 아내로서 겪을 수밖에 없었던 이중 정체성의 갈등과 자아 해방의 욕구는 『희생양』에서 국적도, 신분도, 성격도 전혀 다르지만 단 하나 한 사람인 듯 똑같이 생긴 ‘얼굴’을 가진 두 남자 ‘존’과 ‘장 드게’로 표현되었다.
• 책 내용 소개
『희생양』의 주인공 존은 스스로가 소심하고 무심한, 그리하여 세상에서 동떨어진 실패한 외톨이 인생을 살았다고 후회하는 프랑스 역사학자이다. 그는 낯선 프랑스 지방 도시에서 우연히 마주친, 그와 너무나도 닮은 장에게 하룻밤 사이 모든 소지품을 도둑맞은 채 홀로 남겨진다. 당황한 존 앞에 나타난 ‘장 드게 백작’의 운전기사는 그를 추호의 의심도 없이 자기 주인이라 착각한다. 어쩔 수 없이 드게 가문의 영지 생질 성으로 향하는 존. 이로부터 전혀 알지 못하는 다른 남자 인생의 주인이 된 존이 겪는 일주일간의 일들은 마치 한낮의 악몽처럼 펼쳐진다.
환영을 보는 소녀, 종교에 광신적인 장의 누나, 갑작스럽게 기분이 변하곤 하는 백작 부인 등, 생질 성의 사람들에게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둠이 지배하고 있다. 존은 자유분방한 성격의 장이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대가족과 몰락하는 사업체로부터 도망쳤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지금까지와 다른 삶을 꿈꾸었던 존은 자신을 장이라 믿는 사람들 틈에서 장의 삶을 대신하는 데 충실하게 되고, 자신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그들의 삶을 좌우하게 된다는 책임감을 서서히 느끼게 되면서 대가족의 가장, 성의 영주로서의 자신의 새로운 역할에 대해 깊이 고뇌하게 된다.
나치 독일 점령기로부터 12년 후인 프랑스의 작은 마을, 모두가 묻어두었던 전쟁 당시의 기억들과 음산한 성에 숨겨진 오랜 비밀들이 조금씩 드러나는 가운데 어느덧 그는 장의 사람들에게 애정을 느끼기 시작한다. 존은 성에 드리운 이 모든 슬픔과 비극이 장 드게가 저지른 잘못들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고 장의 속죄를 대신 떠맡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존이 드디어 장 드게의 진정한 죄가 무엇이었는지 깨닫는 순간, 또 한 가족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서 가족사의 비밀이 걷히고, 치유를 향한 첫 걸음으로 나아가게 된다.
■ 지은이 _ 대프니 듀 모리에 Daphne du Maurier
‘서스펜스의 여왕’ ‘최고의 이야기꾼’으로 칭송받는 20세기 영국의 가장 대중적인 작가 중 한 명. 스릴러의 제왕인 히치콕의 영원한 뮤즈로 추앙받는 듀 모리에의 작품들은 현재까지 50차례나 영화, 연극, 뮤지컬, 드라마 등으로 옮겨졌다. 1907년 저명한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나 문화적 세례를 듬뿍 받으며 자란 듀 모리에는 십 대 때부터 책 읽기와 글쓰기에 몰두했으며 런던과 파리에서 교육을 받았다. 1931년 첫 장편소설 『사랑하는 영혼』을 발표, 이후 70여 년간 단 한 번도 절판된 적이 없는 미스터리의 고전 『레베카』를 비롯해 『자메이카 여인숙』 『내 사촌 레이철』 『프렌치맨 크릭』 『헝그리 힐』 등 듀 모리에 특유의 이야기와 서스펜스가 결합된 걸작들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소설, 논픽션, 희곡 분야에서 그녀의 글쓰기는 만년까지 쭉 이어졌고 30권이 훌쩍 넘는 작품들을 세상에 내놓았다. 대중소설의 모든 요건을 만족시키면서도 정통 문학으로서 손색없는 작품들을 써냈다고 평가받는 듀 모리에의 열한 번째 소설 『희생양』(1957)은 작가의 스타일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 선보인 대표작으로, 일생 그녀가 겪었던 이중 정체성의 문제, 세계대전의 영향, 인간 존재의 고독과 방황, 불분명한 선악의 경계와 같은 주제를 담아냈다. 1938년 『레베카』로 미국 도서판매상협회가 선정하는 전미도서상을 수상, 1969년 문학적 공헌을 인정받아 기사 작위에 해당하는 데임 작위를 받았고, 1977년에는 미국 미스터리작가협회로부터 그랜드마스터상을 받기도 했다. 1989년, 81세를 일기로 그녀의 수많은 작품의 무대가 되었던 콘월의 자택에서 사망했다.
■ 옮긴이 _ 이상원
서울대학교 가정관리학과와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 『서울대 인문학 글쓰기 강의』와 『글로벌 인재들을 위한 한국어 특강』(공저)을, 역서로 『레베카』 『대프니 듀 모리에』 『유린되고 타버린 모든 것』 『아버지와 아들』 『프리메이슨』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독서의 탄생』 『콘택트』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 등 80여 권을 냈다.
■ 이 책에 대한 찬사
“악몽으로 채색된, 멋지고 독창적인 소설.” _《타임스 리터러리 서플러먼트》
“얼마나 근사한 스릴러인가!” _《뉴욕 타임스 북 리뷰》
“눈부시게 기발하고 대단히 재미있는 소설.” _《뉴욕 타임스》
“선과 악, 구원과 정체성의 주제로 점철된 이 작품은 더욱 야심 차고 더욱 다채로워졌다.” _《르몽드》
“이 책은 이야기가 끝나야 할 적절한 지점에서 멈춘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이 끝의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종종 궁금해한다.” _조 월턴(SFㆍ판타지 소설가)
“『희생양』은 로맨스보다는 그레이엄 그린에 가깝다. 간단명료한 문체, 굉장한 문학적 세련됨을 갖춘 이 작품은 그 핵심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전후 소외된 남성의 양심에 대해 다루고 있다.” _리사 아피냐네시(소설가ㆍ언론인)
■ 책 속으로
우리는 오싹할 정도로 똑같았다. 무늬 벽지와 삐걱거리는 바닥으로 이루어진 방이 마치 바깥세상으로부터 차단된 무덤 같았다. 우리는 함께 거기 있었고 도망칠 곳은 없었다. 그가 내 떨리는 손에 코냑 담긴 양치 컵을 들려주었고 자기는 병째 마셨다. 그러고는 내 목소리처럼 불안정한 소리로 “내가 당신 옷을 입고 당신이 내 옷을 입어야 할까요?”라고 말했다. 아니, 어쩌면 내가 말한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바닥에 쓰러질 때 둘 중 한 사람은 큰 소리로 웃었던 기억이 난다. _본문 34쪽
나는 충동적으로 운전기사에게 차를 세우라고 한 후 내려서 정적 속에 잠시 서 있었다. 뒤쪽으로 해가 지면서 하늘이 검붉게 물들었고 하얀 안개가 피어올랐다. 사람 발길이 닿지 않은 땅을 최초로 탐험하는 누구라 해도 그 텅 빈 길에 선 나보다 더 고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적이 땅에서 올라왔다. 오랜 세월이, 백만 년의 시간이, 그 위에서 벌어진 역사가, 그 땅에서 먹고살다 죽은 사람들이 쌓여 만들어진 정적이었다. 그 어떤 생각이나 말, 행동으로도 땅의 정적을 깰 수 없었다. 그곳, 내 발밑과 내 주변에 본질이 있었다. 그 한순간 나는 내 고통과 의혹, 좌절에 대한 답에 접근했다. 내면의 충동을 따라 트라피스트 대수도원을 향해 북쪽으로 차를 몰아가는 것보다 어두워지는 하늘 아래 펼쳐진 들판 한가운데 서 있는 것이 해답에 훨씬 더 가까웠다. _본문 46~47쪽
“약인데. 엘릭시르래.” 아이는 큰 소리로 설명서를 읽기 시작했다. “인체 기관의 기능을 높임. 발기부전을 해결하는 호르몬 약제. 발기부전이 뭐야, 아빠?”
더 이상 읽지 못하도록 폴이 약병을 낚아챘다. “자, 이리 주고 조용히 하렴.” 폴은 약병을 윗옷 주머니에 넣고 격분한 얼굴을 내게 돌렸다. “이게 장난이라면 나한테는 전혀 재미가 없는걸.”
그는 벌떡 일어나 나가버렸다. 간담 서늘한 침묵이 식당에 가득 찼다. _본문 131~132쪽
내가 밤 인사를 하러 갔을 때 프랑수아즈는 책을 읽다가 창백하고 무심한 뺨을 내 쪽으로 돌렸다. 나는 다시금 안도감보다는 죄의식을 느꼈다. 장 드게의 죄가 희생양 덕분에 열 배나 늘어나버렸다는 죄책감이었다. _본문 188쪽
“무엇을 했냐고요? 아무것도 안 했답니다. 동료 병사들과 몇 달 동안 주둔했던 게 다예요. 하루는 문제가 생겼지요. 검사를 받아야 했는데 군복에 얼룩이 있었거든요. 저한테 찾아와 손짓 발짓으로 얼룩을 지워줄 수 있는지 묻더군요. 안 그러면 처벌을 받게 된다고요. 므시외 장, 전 제 두 아들을 생각했답니다. 앙드레는 포로였고 알베르는 전사한 상태였지요. 딱 그 또래 아이가 집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 엄마뻘 되는 저한테 옷 얼룩을 지워달라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해줬지요. 나중에 다시 찾아와 고맙다면서 이 사진을 줬어요. 그 아이가 독일인이든 일본인이든 달나라에서 왔든 저한테는 아무 차이가 없었어요. 그 아이는 나중에 결국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동료들과 함께요. 그 아이들은 우리 아이들처럼 그렇게 죽으려고 태어났던 것이죠. 하지만 제가 그 아이 군복을 빨아주었다는 이유로 생질 시장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은 2년 동안이나 저한테 한 마디도 하지 않더군요. 아시겠습니까, 전쟁이 내가 사는 마을로, 내 집 앞으로 오게 되면 그건 더 이상 객관적인 비극이 아니에요. 사적인 원한을 풀어낼 구실일 뿐이지요. 전 그래서 열렬한 애국자가 아닙니다. 점령기 때 생질 일을 거리낌 없이 얘기하는 것도 그 때문이고요.” _본문 269~270쪽
내 시간은 꿈속의 꿈과도 같았다. 나는 벨러의 세계에도, 나를 기다리는 세계에도 속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벨러가 간밤에 안았던 연인은 존재하지 않는 그림자였고 가스통이 모시는 주인은 그의 환상 속에만 살아가는 유령이었다. _본문 343쪽
“그게 시작이 아니면 좋겠어.” 아이가 말했다.
“무엇의 시작 말이니?” 내가 물었다.
“내 불길한 꿈의 시작.” 담요를 옆으로 밀어놓고 아이가 일어서더니 코트의 먼지를 떨고 자기 손을 내 손안에 넣었다. “성모님이 우리 모두를 걱정하고 계셔. 성모님 말씀이 할머니는 엄마가 죽기를 바란대. 꿈속에서 나 역시 그랬어. 아빠도 그랬고. 우리 다 죄인이었다고. 아주 악한 일이었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아빠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_본문 367~368쪽
나는 내가 하지 않은 일에 대해 용서를 구할 수는 없었다. 희생양으로서 나는 그저 잘못을 안고 갈 수밖에 없었다. _본문 451쪽
아이는 여전히 완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좋으신 하느님은 모든 것을 가장 좋게 만들어주시지. 하지만 때로는 사탄이 자신을 숨기고 우리를 유혹하곤 해. 『마태오의 복음서』에도 자기 앞에 절하면 모든 것을 주겠다고 하는 사탄이 나오잖아.”
전화벨 소리가 그쳤다. 가스통이 전화를 받은 것이다. 잠시 후 그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그러니까,” 마리노엘이 말을 이었다. “우리가 원하는 걸 누가 주었는지 제대로 구별하는 게 중요해. 하느님 아니면 사탄인데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지?” _본문 46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