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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일록은 내 이름 Shylock is My Name (2016)

  • 저자 하워드 제이컵슨 지음
  • 총서 호가스 셰익스피어 시리즈
  • 역자 이종인
  • ISBN 978-89-7275-770-2
  • 출간일 2016년 06월 20일
  • 사양 436쪽 | 137*207
  • 정가 14,000원

윌리엄 셰익스피어 서거 400주년,
오늘날 가장 사랑받는 소설가들의 시대를 초월한 다시 쓰기
하워드 제이컵슨의 『베니스의 상인』

2016년 매혹적인 출판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서거 400주년,
오늘날 가장 사랑받는 소설가들의
시대를 초월한 다시 쓰기

 


‘그는 어떤 한 시대의 작가가 아니라 모든 시대의 작가이다.’
_ 벤 존슨

 

 

2016년은 윌리엄 셰익스피어 서거 4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지난 4세기 동안 셰익스피어는 전 세계적으로 공연되고, 읽히고, 사랑받아 왔다. 그의 작품들은 세대가 바뀔 때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재해석되었으며, 세상은 여전히 그에게 사로잡혀 있다. 2016년 기념의 해를 맞이하여 곳곳에서 그를 기리는 여러 이벤트들이 기획?진행되었고, 그중에서도 영국의 호가스 출판사는 놀라운 장기 출판 프로젝트를 선보인다.


호가스는 1917년에 버지니아 울프와 레너드 울프가 설립했는데 당대의 가장 좋은 새로운 책들만 출판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1946년 이후 이름만 남아 있던 호가스는 2012년 그 전통을 계속 이어 가기 위해 런던과 뉴욕에 설립되었다. 그리고 2013년에 호가스에서는 ‘21세기 관객을 위해 셰익스피어 희곡을 재구상’하는 작가들의 1차 명단을 발표했다. 그들의 작업은 희곡을 무대에서 지면으로 옮기는 것, 원작의 ‘정신에 충실’한 소설로 바꾸는 것이다. 그러나 원작을 넘어 그들이 원하는 어디든지 여행할 수 있는 소설로.


호가스 셰익스피어 시리즈는 2016년 셰익스피어 서거 400주년을 맞아, 현대의 베스트셀러 작가들이 그의 작품을 자신만의 문학관으로 재해석하여 다시 쓰는 기획이다. ‘21세기의 가장 획기적인 다시 쓰기 프로젝트’(《가디언》) 호가스 셰익스피어 시리즈는 2015~2016년부터 25개국 16개 언어로 출간되며, 한국에서는 현대문학을 통해 2016년 6월부터 순차적으로 만날 수 있다. 현재 참여하는 작가 외에도 많은 이들이 호가스와 조율 중이고 이 시리즈는 향후 오랫동안 이어질 예정이다.
 

 

지넷 윈터슨|겨울 이야기 The Winter’s Tale|시간의 틈
하워드 제이컵슨|베니스의 상인 The Merchant of Venice|샤일록은 내 이름
앤 타일러|말괄량이 길들이기 The Taming of the Shrew
마거릿 애트우드|템페스트 The Tempest
트레이시 슈발리에|오셀로 Othello
요 네스뵈|맥베스 Macbeth
길리언 플린|햄릿 Hamlet

 

 

 


 

이 소설의 샤일록은 스스로가 작가를 찾는 등장인물이다. 적어도 그를 완전히 써내고 공백을 채우며 한때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그에게 목소리를 부여해 줄 작가를. 그리고 꼭 400년 후, 제이컵슨에 이르러 그는 상당한 수완으로 그것을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완수한 인간을 찾아냈다.
_《데일리 비스트》

 

제이컵슨의 글은 거장의 경지다. 그는 풍자에서부터 진지함까지 어조를 노련하게 변환시키는 명수名手다. 그의 산문은 진정으로 작품을 지배하는 작가에게서만 볼 수 있는 일종의 탄력적인 정밀함을 갖추었다. 또한 여기에서는 웅숭깊고 진실한 자아 성찰이 이루어진다.
_《인디펜던트》

 

제이컵슨은 분명 즐기고 있다. 복합적인 와인과 함께한 감별사처럼 원작의 퍼즐을 음미하면서. 사랑, 복수, 용서, 정의라는 주제를 만끽하면서. 과거에나 현재에나 유대인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탐구하면서. 도발적이고 신랄하며 대담한 작품.
_《파이낸셜 타임스》

 

이 흥미진진하고 자유분방하며 재치 있는 설전舌戰을 통해 제이컵슨은 원작의 허점을 밝혀내고, 원작에서 중점적으로 다루었던 부분을 슬그머니 조정하고, 몇백 년 된 연극 대본을 놀라우리만큼 창의적으로 활용하면서 진정으로 셰익스피어의 희곡과 소통하고 있다.
_《텔레그래프》

 

『샤일록은 내 이름』은 훌륭한 문학적 전복顚覆이 해야 할 일을 했다. 바로 원작에 대한 인식을 심화하고 향상시킨 것이다.
_《가디언》

 

강렬하고 독창적이며 마음을 사로잡는 작품. 인상적인 리듬과 우아한 변조變調로 가득하다. 『샤일록은 내 이름』은 경탄할 만한 성취다. 셰익스피어의 유대인은 이 소설의 종막에서 마침내 인정받았다.
_《내셔널》(아랍에미리트연합국)

 

하워드 제이컵슨, 반박의 여지가 없는 블랙코미디의 대가. 『샤일록은 내 이름』은 『베니스의 상인』을 향한 도발적인 물음이다. 현대적인 유대인과 변치 않는 유대인을 대변하는 두 남자 간의 신랄하고 몹시 익살스러운 일장의 문답은 이 작품의 동력動力이다. 그들은 유대인이 스스로를 유대인이라 칭하는 것이, 혹은 타인들에게 그렇게 불리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끝없이 질문을 던진다.
_《옵서버》

 

비범한 문예비평. 제이컵슨은 샤일록을 셰익스피어의 문화와 상상력의 산물이라기보다 유대인 역사의 상징적인 실존 인물로 간주하고 있다.
_《프로스펙트》

 

『샤일록은 내 이름』은 상실, 정체성, 오늘날의 반유대주의에 대해 할 이야기가 많다. 샤일록과 벌이는 사이먼의 논쟁, 자신의 문학적 창조주를 향해 열변을 토하는 한 인간의 스냅숏이야말로 빈틈없고 인도적인 이 책의 핵심이다.
_《타임스》

 

그야말로 천생연분이 아닐까. 제이컵슨에게 『베니스의 상인』에 대해서 쓰고 내막을 밝히도록 맡긴 것은.
_ 스티븐 그린블랫(『세계를 향한 의지』의 저자·셰익스피어 연구자)

 

제이컵슨은 원작의 주제―정의, 복수, 자비, 유대인과 기독교인, 유대인 증오, 아버지와 딸―를 가져와 블랙유머와 보기 드문 지성으로 요리한다. 오늘날 영미 문단에서 그보다 더 유쾌한 작가는 없다. 할례와 수음에 대한 멋진 농담을 비롯하여 많은 장치들이 있기는 하지만 폭소를 불러오는 유머는 아니다. 그것은 예리하고 통렬한, 적재적소에 찔러 넣는 한 줄의 유머다. 제이컵슨 최고의 작품.
_《주이시 크로니클》

 


 

스트룰로비치는 어머니 묘소를 둘러보러 오기 잘했다고 생각하면서 그가 현재 목격 중인 샤일록의 묘변墓邊 대화는 그 보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좋은 아들이 되면 얻는 보람인가? 그렇다면 그는 좀 더 일찍 묘소를 찾았어야 마땅했다. 이것 말고 달리 더 잘 설명해 주는 것도 없지 않은가. 아니면 사람은 자기가 보기 좋아하는 것만 보는 것인가? 그렇다면 일부러 찾아다니면서 보려고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냥 어떤 의미가 당신을 찾아오기를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그는 이런 지나가는 엉뚱한 공상을 해 본다. 셰익스피어의 조상들은―좀 더 안전한 쪽에 서서 말해 보자면―성을 샤피로에서 셰익스피어로 바꾸고 샤일록이 그(셰익스피어)에게 찾아오도록 했을지도 모른다. 극장에서 집으로 돌아오면서 셰익스피어는 유령들을 보고서 메모지에다 글을 쓴다. 그는 자기 자신의 외부를 오랫동안 쳐다보다가 마침내 안토니오가 저 혐오스러운 자인 유대인에게 침을 뱉는 것을 본다.
“어떻게 지금 이 순간! 유대인! 당신 사촌이야?” 셰익스피어가 묻는다.
그곳은 유대인이 없는Judenfrei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의 잉글랜드였다. 그래서 그는 놀라는 것이다.
“쉿.” 유대인이 말한다.
“샤일록!” 셰익스피어가 별로 조심도 하지 않으면서 말한다. “내 사촌 샤일록, 아니면 내가 기독교인이거나!”
샤피로, 셰익스피어, 샤일록. 가족적 연상.
스트룰로비치는 그런 연상에서 제외되어 슬픔을 느낀다. 그의 이름에 쉿shush 발음이 들어가지 않아서 유감이다.
_ 1// 20~22쪽

 

그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때때로 그의 경우 슬픔의 원인은 돈이라기보다 모더니티modernity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당신은 자기 자신이 너무 모던하다고 느끼지 않습니까?” 그가 그녀에게 물었다.
플루러벨은 그 아이디어를 좋아했다. “너무 모던. 그래요, 당신 말이 맞아요.” 그녀가 말했다. “너무 모던해요. 나는 종종 그걸 느꼈어요. 하지만 지금까지는 내가 느낀 게 그것인지 몰랐어요. 너무 모던. 맞아요, 그거예요.” 이어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그건 이걸 설명하지 못하는데요. 왜 디스커버리 채널에 나오는 원주민들이나 아메리칸 인디언들은 늘 슬퍼 보이죠? 그들은 결코 모던한 사람이 아니잖아요.”
“모던하지 않지요. 하지만 그건 종류가 다른 슬픔입니다. 그들이 슬픈 이유는 타인에 의해 비참한 존재가 되었다는 겁니다. 누가 그들을 그렇게 만든 거예요. 그들은 피해자이기 때문에 슬픈 겁니다.”
플루러벨은 천연색 신문 보충판에 실린 남아메리카의 부족민들 사진을 기억했다. 그들은 수천 살은 되어 보였다. 마오리족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피그미족도. 파슈툰 부족민들도. 왜 그들은 모두 슬픈 걸까,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들 또한 착취당해서 비참하게 된 겁니다.”
“그렇다면 유대인은? 그들도 오래되었잖아요.”
그는 유대인이라면 편안함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을, 혹은 적어도 바울로 성인(그는 철저한 바울로주의자이니까)의 마음을 유대인의 슬픈 이유로 제시했다. “내 보기에 그들은 그들 스스로의 의지로 인해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마침내 말했다. “그들은 모던하지도 피해를 당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보이기로 스스로 선택한 겁니다.”
“왜 그렇게 선택했지요?”
“그게 실수인지 전략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나 그들 자신을 인간적이든 신학적이든 모든 드라마의 중심에다 위치시켰습니다. 나는 그것을 정치적 슬픔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자기-연민의 아교는 아주 단단하지요. 감정적 협박이 그렇듯이.”
_ 2// 48~50쪽

 

[…] 우리의 본성에 깃든 폭력을 받아들이는 것, 그게 문명화된 사회이다.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용서가 아니라 정의이다. 우리는 피[血]로 만들어진 존재이지 젖[乳]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_ 5// 93쪽

 

“아마도 지옥에 가라는 거겠지. 하지만 현재로서는 구체적으로 어디라고 말하지도 않아. 그게 그들의 요점이야. 우리는 고국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그걸 날렸어. 아무튼 소속감은 우리의 장기가 아니야. 낯선 타인이 되는 게 우리의 장기지. 그들은 우리의 최선의 것을 꺼내 주는 것은 해외 이산이라고 나에게 다짐하고 또 다짐하지. 그건 그들의 최선의 것을 꺼내 주는 것은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교묘히 비껴가게 해 주지. 하지만 그들은 가장 좋은 유대인은 방랑하는 유대인이라고 선언하는 데 아무런 당황감도 느끼지 않아. 모든 곳에 존재하지만 그 어디에도 있지 않는 시민, 우리가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면 그게 가파른 벼랑이든 깊은 계곡이든 상관하지 않고 그곳에서 버티는 멋쟁이 방랑자가 되어야 한다는 거야. 불안하면서도 세련되었고, 암벽에 매달린 게으름뱅이처럼 우리의 놀라운 창의적 주변성을 표현해야 한다는 거지.”
_ 6// 103쪽

 

“난 의심하지 않아.” 그가 말했다. “자네가 개인적으로 남들을 겁줄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걸. 내 말은 ‘우리’가 집단적으로 나서면 그렇게 된다는 뜻이야.”
“나는 ‘나’와 ‘우리’의 구분이 과연 통하는지 확신이 서질 않아. 유대인 개인은 그 어떤 방에 혼자 들어가더라도 유대인 집단을 끌고 와. 기독교인들이 보는 것은 바로 그 유대인 집단이야. 개인 대 개인으로 만나면 그들은 아주 친절해. 나는 진정으로 보상을 해 주고 싶어 하는 기독교인들로부터 결혼 제안을 받기도 했어. 나는 내 초상화를 동정받을 만한 모습으로 그리게 했어. 한번은 어떤 독일인이 공동묘지에서 내게 사죄를 하더군. 하지만 내가 손을 내미니까 그는 손잡기를 두려워하는 듯했어. 왜? 그 순간 그건 개인 샤일록의 손이 아니라, 유대인 집단의 손이기 때문이지. 우리는 집단적으로는 여전히 오싹한 것과 연결되어 있어.”
_ 6// 107~108쪽

 

“나는 절대로 중지시키지 않았을 거야. 그런데 이제 자네가 그 얘기를 했으니, 한 가지 물어보겠네. 왜 유대인이 수음하는 스토리가 그렇게 많은가? 오난, 레오폴드 블룸, 자네가 읽고 있다는 알렉산더 포트노이, 그르인버그. 그게 이교도들이 우리를 바라보는 방식인가? 아니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방법인가?”
그는 샤일록이 대답을 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그 주제로 논문을 쓴 학자라도 그보다 더 신속하게 대답을 할 수는 없었으리라. “둘 다야.” 그가 말했다. “이교도들이 우리를 보고 느낀 것을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들어 오다 보니 우리가 마침내 그와 비슷한 것을 보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야. 그게 중상 비방이 작용하는 방식이지. 피해자는 가해자의 논리를 받아들이는 거야. 내가 그렇게 보인다면, 나는 틀림없이 그런 사람일 거야.”
“그들이 우리를 타락한 존재로 본다면, 그들이 우리를 수음꾼으로 본다는 우리의 자기모멸 본능과도 더 잘 어울리는군. 수전노보다는 그게 더 낫지.”
“거기에는 별 차이가 없어. 자신의 성기를 내려다보는 유대인이나 자기의 돈을 챙기는 유대인이나. 이교도의 눈으로 보면, 그건 타락한 이기심의 거대한 파노라마지. 우리는 저축하면서 소비하고, 그러면서도 우리의 정자精子와 돈이 전반적으로 유통되는 것을 가로막고 있지. 그들은 우리 유대인을 증오하는 게 경제적으로 정당화된다고 말하지만, 내가 보기에 성적인 것이 그런 증오심의 뿌리야. 그들은 지난 수 세기 동안 우리로부터 성적인 상상력을 끌어낼 수가 없었어. 그들은 우리가 여자처럼 피를 흘린다 생각했고 이어 기독교도 어린아이들을 거세시킨다고 우리를 비난해 왔어. 우리 유대인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정신이 더러워진다고 여겼어. 그런 무지와 두려움의 혼합은 할례 의식으로 소급돼.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그렇게 한다면 그들에게도 그렇게 할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거지.”
_ 6// 109~110쪽

 

스트룰로비치는 손님의 맹렬하면서도 우울한 눈을 오래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구분이 잘되지 않는, 진주 같은, 불확실한 회색, 그러니까 비바람 치는 날의 북해北海 같은 색깔이었다. 샤일록의 눈빛은 우묵 들어간 갈색의 짙은 연못이었다. 그것은 의도적인 복구 작업이 아니라 무심코 문지른 것에 의해 그 빛을 되찾은 오래된 페인트 같은 색깔이었다. 그것은 빛을 간직한 렘브란트의 어둠 같은 어두운 색깔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스트룰로비치는 그 눈을 들여다볼 때 교회의 지하실에 있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닮은 데가 조금도 없어, 하고 그는 생각했다. 우리의 딸에 대한 느낌을 제외하고는. 이교도들은 그들을 가리켜 둘 다 유대인이라고 하는데 그들이 무엇을 보고서 그렇게 말하는 것인가?
샤일록은 스트룰로비치의 강렬한 눈빛으로부터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다. “그래. 우리는 전혀 닮은 바가 없지.” 그가 말했다. “우리의 외양이나 우리의 생활 방식이나. 자네는 코셔 주방을 유지하지도 않고, 회당에는 나가지 않으며, 히브리어라고는 단 한 마디도 못 한다는 것을 나는 장담할 수 있어. 그러니 우리 두 사람을 가리켜 유대인이라고 말하는 게 무슨 의미야?”
“나는 그 말이 그들에게 던지는 의미에 더 관심이 있어. 그들은 우리를 서로 연결시켜 주는 어떤 것을 보았을까?”
_ 10// 162~163쪽

 

역사적 관점으로 볼 때 누가 누구를 더 증오했나? 그건 닭과 달걀의 문제. ‘오래된’이라는 단어에 주목하라. 서로가 상대방에게서 보는 악행惡行. 이쪽에서는 오만한 배타주의, 저쪽에서는 사랑과 자비의 오만한 허세. 이것은 자본주의와 고금리의 등장 이전의 일이다. 그러면 증오 이전의 것이 아닌, 사람들의 운동이나 사상은 어떤 것이 있느냐고 당신은 물을 것이다. 어쩌면 바울로 성인의 분열적인 말들을 들어야 할 것이다. 바울로 이전에는 평화가 있었다. 그러나 또다시 바울로 이전에는 유대인이 증오하는 기독교인이나 유대인을 증오하는 기독교인은 없었다.
그런데 악행이 이교도가 유대인에게서 보는 모든 것이라면, 샤일록은 이교도들에게 그들의 악행을 많이 보여 주었다.
그러면 그들은? 그들은 그에게 그 보답으로 악당 같은 자비를 독성 비처럼 마구 쏟아부었다.
이것은 그가 악행을 반어적으로 지칭한다는 뜻인가?
또 그들도 악행을 반어적으로 지칭하는 것인가?
그것은 그들이 자비를 반어적으로 지칭하고 있다는 뜻인가?
그는 한 가지 사항은 확실하게 알았다. 그들이 그의 딸을 훔쳐 간 것은 결코 반어적 지칭이 아니었다.
_ 12// 189~190쪽

 

“그럼 다시 묻겠네. 자네는 안토니오가 채무를 이행하지 못하면 그에게 상처를 입히려는 의도였나?”
“농담을 하던 그 순간에는 그런 의도가 없었지.”
“그럼 언제?”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의도도 구체화되었지.”
“그럼 언제 그 의도가 확고해졌나?”
“제시카를 빼앗기고 난 이후야. 리아의 반지가 도난 당한 후. 사람들이 그를 위해 채무를 이행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 후. 그들이 나를 멋대로 조종 가능하다고 생각한 후. 내가 막다른 길에 몰린 후. 나에게 다른 대안이 없게 된 후……”
“그럼 그중 어떤 것이 결정적 이유인가?”
“그것들 모두이기도 하고 그것들이 모두 아니기도 해. 나는 아직도 언제 나의 의도가 확고해졌는지 몰라. 스토리는 멈추어 버렸어…… 발생하지 않은 일은 발생하지 않은 거야. 그 이상의 것은 추론의 문제일 뿐 철학이나 심리학의 문제는 아니야. 또 신학에 관한 문제도 아니고.”
“그렇지만 스토리가 멈추기 전에…… 틀림없이 의도가 있었을 텐데.”
“의도라. 글쎄…… 의도가 뭐야? 그의 의도가 무엇이든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죽이려 했을까? 나는 자네와 마찬가지로 구약성경을 열심히 읽지 않아. 그렇지만 자네도 짐작하듯이, 나는 그 스토리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어.”
“온 세상이 그 스토리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지.”
“온 세상이 과거에는 그랬었지. 하지만 현재도 그런지는 의문인데.”
_ 17// 265~267쪽

 

그런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시간의 우스꽝스러운 동선動線이 앞뒤로 움직이는 것이었다. 기독교인의 개종에서부터 유대인의 개종에 이르기까지의 시간. 전자가 발생하지 않고 후자가 갑작스럽게 발생했다면 세상은 더 살기 좋은 곳이 되었을까? 그래턴이 있는 혹은 없는 비어트리스. 하지만 무슨 차이인가? 그의 부모를 기념하여 그가 세우려 했으나 실패한 갤러리. 그러니 어쨌단 말인가? 뇌중풍에 맞아 쓰러진 그의 아내―그녀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어떤 종류의 세상이든 그게 그녀에게 중요할까? 샤일록의 경우 행동은 임의적으로 멈추었으나, 시간은 멈추지 않았다. 시간은 그를 방부 처리했다. 행동이 끝났을 때 시간마저도 끝나 버렸다면 그는 더 좋아졌을까? 그는 더 많은 혹은 더 적은 영향을 미쳤을까? 모든 환상 중 가장 거대한 환상은 시간이 산통産痛을 겪으면서 자애로운 변화를 출산하리라는 것이다.
_ 5막// 407~4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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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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