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셰익스피어 서거 400주년,
오늘날 가장 사랑받는 소설가들의
시대를 초월한 다시 쓰기
‘그는 어떤 한 시대의 작가가 아니라 모든 시대의 작가이다.’
_ 벤 존슨
2016년은 윌리엄 셰익스피어 서거 4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지난 4세기 동안 셰익스피어는 전 세계적으로 공연되고, 읽히고, 사랑받아 왔다. 그의 작품들은 세대가 바뀔 때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재해석되었으며, 세상은 여전히 그에게 사로잡혀 있다. 2016년 기념의 해를 맞이하여 곳곳에서 그를 기리는 여러 이벤트들이 기획?진행되었고, 그중에서도 영국의 호가스 출판사는 놀라운 장기 출판 프로젝트를 선보인다.
호가스는 1917년에 버지니아 울프와 레너드 울프가 설립했는데 당대의 가장 좋은 새로운 책들만 출판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1946년 이후 이름만 남아 있던 호가스는 2012년 그 전통을 계속 이어 가기 위해 런던과 뉴욕에 설립되었다. 그리고 2013년에 호가스에서는 ‘21세기 관객을 위해 셰익스피어 희곡을 재구상’하는 작가들의 1차 명단을 발표했다. 그들의 작업은 희곡을 무대에서 지면으로 옮기는 것, 원작의 ‘정신에 충실’한 소설로 바꾸는 것이다. 그러나 원작의 현대적 변주로 그들이 원하는 어디든지 여행할 수 있는 소설로.
호가스 셰익스피어 시리즈는 2016년 셰익스피어 서거 400주년을 맞아, 현대의 베스트셀러 작가들이 그의 작품을 자신만의 문학관으로 재해석하여 다시 쓰는 기획이다. ‘21세기의 가장 획기적인 다시 쓰기 프로젝트’(《가디언》) 호가스 셰익스피어 시리즈는 2015~2016년부터 25개국 16개 언어로 출간되며, 한국에서는 현대문학을 통해 2016년 6월부터 순차적으로 만날 수 있다. 현재 참여하는 작가 외에도 많은 이들이 호가스와 조율 중이고 이 시리즈는 향후 오랫동안 이어질 예정이다.
지넷 윈터슨|겨울 이야기 The Winter’s Tale|시간의 틈
하워드 제이컵슨|베니스의 상인 The Merchant of Venice|샤일록은 내 이름
앤 타일러|말괄량이 길들이기 The Taming of the Shrew|식초 아가씨
마거릿 애트우드|템페스트 The Tempest
트레이시 슈발리에|오셀로 Othello
요 네스뵈|맥베스 Macbeth
길리언 플린|햄릿 Hamlet
셰익스피어 때문에 왔다가, 너무 멋진 타일러 때문에 머문다. _《라이브러리 저널》
장담컨대 셰익스피어는 기뻐하리라. 대단히 정교하며 현재성이 뛰어난 앤 타일러의 소설은 사진이나 디지털시계처럼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동시에 우리가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들려준다. 『식초 아가씨』는 사색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이 순간의 소박한 상像이다. _《뉴욕 타임스 북 리뷰》
타일러의 진정한 목적은 셰익스피어 희극의 전제前提에 도전하는 것이다. 그녀의 다정하고 익살스러운 소설은 우리가 습관적으로 쓸데없는 고집을 부림에도 스스로를 망가뜨리지 않을 수 있는 뜻밖의 방법을 찾아내는 일이 가능하다고 역설한다. _《타임스 리터러리 서플러먼트》
지금 활동하는 미국 작가 가운데 앤 타일러만큼 결혼에 대해 잘 쓴 이가 있었던가. 아니면 영원토록 행복하게 사는 금실 좋은 부부라는 환상과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실제로 함께 지내는 대체로 울적하지만 우스꽝스럽기도 한 놀라운 사건 사이의 불일치에 대해 누가 그렇게 변함없이 솔직했었나. 『식초 아가씨』는 유쾌하고 낙천적이고 기발하고 온정적이며, 여느 때와 같이 등장인물을 향한 타일러의 특별한 애정으로 충만하다. _《밀워키 저널 센티널》
논란 많은 셰익스피어의 고전에 대한 속 시원하고 지적인 해석은 식초보다 꿀로 더 많은 파리를 잡을 수 있다는 오래된 격언을 뒤집는다. _《가디언》
타일러의 전매특허인 위트와 예리한 비평이 여기에 가득하다. 그녀는 유머와 파토스를 자유자재로 옮겨 다니며 어떠한 감상感傷의 편린 없이 감동을 빚어낸다. _《선데이 익스프레스》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몰라도 재미있고 명랑하고 행복감을 주는 이 소설을 즐기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다. 원작을 잘 아는 독자라면 새로운 케이트가 덜 고약한지 혹은 그야말로 더 나은 인물로 바뀌었는지, 그녀의 동기와 고뇌가 보다 설득력을 가지게 되었는지 같은 타일러의 변주에 흥미를 가질 것이다. 중요한 점에서 셰익스피어의 원작으로부터 벗어난 놀라운 대단원은 특이하고 시대를 초월한 이야기에 훈훈한 결론을 내려 준다. _《셸프 어웨어니스》
셰익스피어보다는 사실 제인 오스틴에 가까운 스크루볼 코미디. 단언컨대 타일러는 즐겁게 『식초 아가씨』를 썼다. 독자 역시 즐겁게 읽을 것이다. 유난스럽고 원칙주의자인 당신의 개성에 기꺼워하는 짝을 찾는, 시지 않고 달콤한 로맨틱 코미디의 탄산 칵테일. 길들이기는 필요 없다. _ 내셔널 퍼블릭 라디오
참으로 유쾌하고, 독창적이며, 설득력 있다. 앤 타일러는 재료를 가져와 가방을 흔들어서, 21세기적이고 대단히 미국적인 어떤 것을 만들어 냈다. 눈부신 햇빛 같은 책. 좋은 글을, 그리고 사람들이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고 말하는지에 대한 지적인 관찰과 묘사를 중요하게 여긴다면 『식초 아가씨』 또한 즐길 수 있을 것이다. _《스코츠먼》
셰익스피어의 유행에 뒤처지는 희곡에 대한 시대를 반영하는 매력적인 비틀기. _《데일리 익스프레스》
『식초 아가씨』는 『말괄량이 길들이기』에서 상당히 벗어났지만, 등장인물들이 공감을 자아내고 설득력 있게 묘사되었을 뿐 아니라 철저히 현대적인 결혼의 진정한 의미를 포착했다.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말괄량이’에 대한 그녀의 접근법은 셰익스피어적인 산물이라기보다 오히려 뉴에이지 로맨틱 코미디에 가깝게 느껴진다. 『식초 아가씨』는 셰익스피어 재창조의 세계로 향하는 즐거운 여행이다. _《시카고 트리뷴》
요령, 자제력, 외교술. 요령과 외교술의 차이가 뭘까? 아마 ‘요령’은 예의 바르게 말하는 것인 반면 ‘외교술’은 아무 말도 안 하는 거겠지. 그런데 ‘자제력’에 그게 포함되지 않나? ‘자제력’에 세 가지 다 포함되지 않을까?
사람들이 언어를 너무 헤프게 쓰는 경향이 있다고 케이트는 생각했었다. 필요 이상으로 많은 어휘를 사용했다.
_ 2// 44쪽
마음의 상처를 크게 받으면 실제로 몸이 아프다고 느낄 수도 있다. 이후 며칠간 케이트는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에도 몇 차례 겪었지만 이번 일은 전혀 새로운 경험으로, 칼날로 가슴을 도려내는 기분이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왜 하필 가슴일까? 심장은 뛰는 펌프들에 불과한 것을. 그런데도 가슴에 멍이 든 기분이었고, 심장이 쪼그라드는 동시에 부은 것 같았다. 이 말이 자기모순으로 들린다면 그러라지 뭐.
케이트는 매일 황량한, 철저히 혼자라는 감정에 빠져 걸어서 출근했다. 거리의 사람들은 모두 동행이, 같이 웃고 속내를 털어놓고 옆구리를 찌를 사람과 함께 있는 듯했다. 벌써 서로 모르는 게 없는 여자애들. 친해져서 머리를 맞대고 속삭이는 커플. 차 옆에 서서 한바탕 수다를 떨다가 출근하는 이웃 여자들. 그들은 괴팍한 남편, 못 말리는 10대 자녀, 라이벌 친구들에 대해 속닥대다가 말을 끊고 케이트에게 “굿모닝”이라고 인사하곤 했다―심지어 그녀를 모르는 사람들도 그랬다. 케이트는 못 들은 체했다. 머리를 푹 숙이면 머리카락이 옆얼굴을 완전히 가렸다.
_ 4// 91~92쪽
이제 사람들은 그녀를 다르게 보는 듯했다. 케이트는 지위를 얻었다.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 갑자기 그들은 그녀의 말에 관심을 가졌다.
케이트는 이전에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중요한 사람도 아니었었다. 이런 변화가 화나면서도 어이없게도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또 사기 치는 기분도 느껴졌다. 혼란스러웠다.
결혼이 그녀의 수습 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약혼 발표를 한 이후 단 한 번도 원장실에 불려 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_ 8// 199쪽
하긴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들은 조카딸을 치우게 되어 흐뭇했다.
케이트는 늘 아주 껄끄러운 사람이었다―곤란하게 하는 아이, 시무룩한 10대 소녀, 대학 생활 실패자. 그녀를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런데 이제 친척들은 해답을 얻었다, 결혼시키면 그만이었다. 케이트 걱정을 한순간도 할 필요가 없을 터였다.
_ 8// 208쪽
“당신한테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지만 여기서 지낸 3년은 힘든 시간이었어요. 외로운 세월이었죠. 곤혹스럽고. 다들 미국에서 지내는 게 무슨 선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굴지만 백 퍼센트 선물만은 아니에요. 미국인들은 딱 오해하기 좋게 말해요. 아주 친절해 보이고, 처음부터 이름을 부르죠. 그들은 아주 편하고 격의 없어 보여요. 그러다가 전화를 꺼 버리죠. 난 미국인들이 이해되지 않아요!”
그와 케이트는 한 걸음도 안 되는 거리에서 마주 보고 있었다. 그녀는 표트르의 반짝이는 가는 금색 수염과 파란 눈에 박힌 작은 갈색 점들을 볼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있었다.
표트르가 물었다.
“혹시 언어 때문일까요? 난 단어를 알지만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언어를 구사하지 못해요. 내가 말하는 사람이 바로 당신일 때 그 ‘당신’을 칭하는 특별한 단어가 없어요. 영어에는 오직 하나의 ‘당신’만 있고, 당신에게 말하든 모르는 사람에게 말하든 똑같이 ‘당신’이라고 해야 해요. 내 친밀감을 표현할 수가 없어요. 난 이 나라에서 집이 그립지만, 지금 내 모국에 있다 해도 집을 그리워할 거라고 생각해요. 이제 돌아갈 집이 없으니까―친척도 없고, 지위도 없고, 내 친구들은 나 없이 3년이나 살았어요. 내게는 아무 곳도 없어요. 그래서 나는 여기서 괜찮은 척해야 해요. 모든 게…… 어떻게 표현하죠? 끝내주게 좋은 척해야 된다고요.”
_ 11// 269쪽
“어떤 방식이든 네가 원하는 대로 네 남편을 대하도록 해. 하지만 그가 누가 됐든 그 사람이 가엾구나. 남자로 사는 것은 힘들어. 그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니? 남자들은 뭐든 고민을 숨겨야 된다고 생각해. 관리해야 된다고, 통제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진솔한 감정을 못 드러내지. 아프거나 간절하거나 슬픔에 휩싸여도, 상심하거나 고향이 그립거나 큰 죄책감에 시달려도, 뭔가 대실패를 할 순간이어도―그들은 ‘아, 난 괜찮아요. 모든 게 좋아요’라고 말하지. 생각해 보면 남자들은 여자들보다 훨씬 자유롭지 못해. 여자들은 아장아장 걸을 때부터 사람들의 감정을 살피면서 살아. 레이더가―육감이나 공감, 대인 관계라나 뭐라나 하는 게―완벽해지지. 여자들은 상황이 이면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아는 반면, 남자들은 스포츠 경기와 전쟁, 명예와 성공에 몰두하지. 남자와 여자는 다른 두 나라에 있는 것과 비슷해! 난 네가 말하는 것처럼 ‘망가지지’ 않아. 난 그를 내 나라에 들어오게 하는 거야. 우리 둘이 본모습으로 지낼 수 있는 곳에서 그에게 자리를 주고 있는 거라고. 제발 버니, 우릴 좀 봐줘!”
_ 12// 308쪽
목차가 없는 도서입니다.
앤 타일러Anne Tyler
(미국 미네소타, 1941~)
‘그저 훌륭한 것이 아니라 위험할 정도로 훌륭한 작가.’
_ 존 업다이크
퀘이커교 공동체에서 자란 타일러는 열한 살이 되어서야 바깥세상을 경험했고, 외부 세계는 어린 이방인에게 흥미로운 관찰 대상이었다. 냉전 시대에 듀크 대학교에서 러시아 문학을 전공했으며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에서 슬라브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학부생 때부터 단편소설을 쓰곤 했던 그녀는 대학을 떠난 후에 도서관에서 러시아 전문 서지학자로 일하면서 밤마다 창작에 몰두한다.
타일러는 21편의 장편소설을 출간하고 50편 이상의 단편소설과 수많은 서평을 발표했다. 여덟 번째 소설 『꼭두각시Morgan’s Passing』(1980)와 아홉 번째 소설 『이별 이후Dinner at the Homesick Restaurant』(1982)로 문단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는데,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을 받은 열 번째 소설 『우연한 여행자The Accidental Tourist』(1985)가 영화화되고 열한 번째 소설 『종이시계Breathing Lessons』(1988)로 1989년 퓰리처상 픽션 부문에서 수상하면서 예술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세계적인 작가로 부상했다.
현대 미국의 중산층 가정과 결혼을 그려 온 그녀는 아이러니가 가미된 미묘하고 부드러운 유머, 사물을 관찰하는 예리하면서도 애정 어린 시선, 인간성에 대한 신선한 통찰력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다. 특히 괴벽스러워 화가 치솟게 만들면서도 어딘가 사랑스러운 구석이 있는, 바로 옆집에 사는 이웃인 듯한 유형의 작중인물들은 많은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셰익스피어는 질색이다. 작품 전부가 그렇다. 그중에서도 제일 싫은 것이 『말괄량이 길들이기』이다.’ 역설적이게도 그래서 타일러는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선택했다. 그녀는 이를 셰익스피어 희곡 가운데 가장 논란이 많지만 그럼에도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작품이라 보았고, 이면에는 분명 다른 이야기가 숨겨져 있을 것이라고 늘 생각해 왔다. 타일러는 셰익스피어의 초기 희극으로 다시 쓰기를 넘어 그녀의 주제와 인물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 자신만의 완벽한 세계―『식초 아가씨』를 창조해 냈다.
옮긴이_ 공경희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다. 성균관대학교 번역대학원 겸임교수를 지냈으며 서울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대학원에서 강의했다.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면서 앤 타일러의 『인생』『우연한 여행자』『태엽 감는 여자』『놓치고 싶지 않은 이별』『깡통나무』『파란 실타래』를 비롯하여,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전 6권), 호아킴 데 포사다의 「마시멜로 이야기」(전 3권), 「C. S. 루이스의 우주 3부작」(전 3권), 「타샤 튜더 캐주얼 에디션」(전 6권), 미치 앨봄의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J. 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얀 마텔의 『파이 이야기』, 조이스 캐럴 오츠의 『좀비』, 실비아 플라스의 『벨자』 등 많은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 지은 책으로 북 에세이 『아직도 거기, 머물다』가 있다.
‘케이트 버티스타를 그렇게 만만하게 보면 안 되지.’
앤 타일러가 다시 쓰는 『말괄량이 길들이기』,
현시대 결혼의 참뜻을 담아낸 『식초 아가씨』
21세기를 위한 새로운 셰익스피어 시리즈
스물아홉 살, 완고한 원칙주의자 케이트 버티스타는 옴짝달싹 못 하고 있다. 괴짜 과학자 아버지와 매사에 반항적인 예쁜 여동생 때문에. 게다가 보조 교사로 일하는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은 그녀를 무척 따르지만 어른들은 그녀의 직설적인 태도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매일매일은 똑같이 반복될 뿐.
닥터 버티스타에게는 커다란 걱정거리가 있다. 수십 년간 매달려 온 프로젝트가 획기적인 진전을 보이려는 시점에, 우수한 외국인 연구 조교 표트르 셰르바코프의 비자 기한 만료가 코앞에 닥치고 말았다. 그는 표트르가 이 나라에 계속 체류할 수 있도록 터무니없는 계획을 꾸민다. 이른바 표트르와 케이트 결혼시키기! 케이트는 길길이 날뛰고, 그녀를 설득하려는 두 남자의 눈물겹도록 우스꽝스러운 밀고 당기기가 펼쳐진다.
그리고 누군가의 한 번의 호의는 의외의 결과를 가져온다. ●
2016년 윌리엄 셰익스피어 서거 400주년을 맞아 오늘날 가장 사랑받는 작가들이 그의 희곡들을 현대 소설로 재탄생시키는 프로젝트 「호가스 셰익스피어 시리즈」의 세 번째 주자는 『종이시계Breathing Lessons』(1988)로 1989년 퓰리처상 픽션 부문에서 수상한 앤 타일러이다.
그녀가 「호가스 셰익스피어 시리즈」에 참여한다는 소식이 처음 전해졌을 때, 세계 문단과 출판계는 의외의 조합이라며 놀라움과 기대감으로 술렁였다. 앞선 『시간의 틈』의 지넷 윈터슨이나 『샤일록은 내 이름』의 하워드 제이컵슨이 그들 개인의 역사와 문학적 토양에 비추어 어느 정도 참여가 예상되었던 영국 작가들인 반면, 타일러는 1964년 등단 이후로 줄곧 현대 미국의 중산층 가정과 결혼을 그려 온 더없이 미국적인,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호가스 셰익스피어 시리즈」 집필진 가운데 가장 먼저 작품을 고르는 기회를 얻었던 그녀는 또한 전혀 예상 밖의 이유로 『말괄량이 길들이기The Taming of the Shrew』(1590년~1594년 집필 완성, 초연 기록 불명확)를 선택했다.
“셰익스피어는 질색이에요. 작품 전부가 그렇죠. 그중에서도 제일 싫은 것이 『말괄량이 길들이기』입니다.”(《워싱턴 포스트》 2016년 6월 21일 자 인터뷰에서)
지참금이 두둑한 신부를 찾으러 베로나에서 온 페트루키오가 사납고 수다스러워 파도바에서 말괄량이로 소문난 카테리나와 결혼하여, 그녀를 ‘말로써’ 먹지도 자지도 못하게 들볶아 길들인다는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쓰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 것이라는 평가마저 나올 정도로 논란이 많은 이야기이다. 일찍이 버나드 쇼가 “제대로 된 감각을 가진 남자라면 여자와 함께 공연이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킬 수 없는 극”이라고 독설을 퍼붓기도 했거니와, 오늘날에는 카테리나 역을 거부하는 여배우는 물론이고, 더 이상 공연되지 않기를 바라는 연극 평론가들도 있다. 그럼에도 연극을 비롯하여 영화, 텔레비전 드라마, 발레, 뮤지컬 등으로 꾸준히 변주되어 왔고, 사실 셰익스피어 희곡 가운데 가장 처음 다른 매체로 재생산된 대표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친구들이 자기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해 줄 때를 떠올려 봐요. 당신은 ‘잠깐, 뭔가가 더 있는 게 틀림없어. 이면에는 분명 다른 이야기가 있을 거야’라고 생각하죠. 『말괄량이 길들이기』에 대해서 나는 늘 그렇게 느껴 왔습니다.”(<「호가스 셰익스피어 시리즈」 작가 인터뷰 동영상>에서)
‘여성 혐오 그 자체’ ‘정상이 아닌 이야기’ ‘끔찍한 플롯’ 등 거침없이 불호不好를 드러냈을지언정 타일러는 『말괄량이 길들이기』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온다는 점에 주목했고, 오히려 제일 싫어하는 작품이기에 역설적으로 숨겨진 이야기를 보다 더 자유롭게 상상하며 대단히 즐겁게 써 내려갈 수 있었다고 한다. 400년 전의 이탈리아는 이제 타일러의 관례적인 소설 무대 현대 미국의 볼티모어로 옮겨진다.
*
타일러의 카테리나Katherina, 케이트 버티스타Kate Battista는 어린이집에서 보조 교사로 일하고 있는 자립심 강하고 똑똑한 스물아홉 살의 여성으로, 혼자된 아버지 닥터 버티스타와 여동생 버니와 함께 산다. 아버지는 몇십 년 동안 자가면역질환을 연구해 온 외골수 과학자인데, 일상생활에서는 무능력하며 맏딸이 자신의 모든 요구를 들어주기를 언제나 기대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피부가 검고 뼈대가 굵고 수척’하며 ‘거구에 꺽다리’라고 케이트가 스스로를 생각하는 것과 달리, 여동생은 금발에 귀엽고 남자들에게 인기 많은 철없는 10대 소녀이다. 사춘기에 접어들어 자신을 키워 준 언니에게 매사에 반항적인 데다 최근에는 갑자기 옆집 아들이자 스페인어 가정교사인 에드워드를 따라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집에서 주부 노릇을 하는 케이트는 자기주장이 강한 인물이지만, 결혼하지 않은 채 아버지와 여동생을 뒷바라지하면서 희생적인 삶을 이어 가고, 당연히 현재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
어느 날 아버지는 케이트에게 우수한 외국인 연구 조교 표트르 셰르바코프Pyotr Shcherbakov를 소개한다. 셰익스피어의 페트루키오Petruchio처럼 외지인/외국인인 그는 곧 비자가 만료되어 모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자신의 연구가 결실을 보이려는 바로 직전에 없어서는 안 될 인재를 잃을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닥터 버티스타는 표트르가 이 나라에 계속 체류할 수 있도록 맏딸과 연구 조교의 결혼을 추진한다, 케이트가 당연히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리라 여기면서. 케이트는 일단 당황스럽고, 아버지가 일 때문에 딸을 팔아넘기려고 한다는 생각에 분노한다. 두 남자는 눈에 보이는 어설픈 작전으로 그녀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쓰지만 번번이 케이트의 짜증과 화를 불러오기만 한다. 한편, 서툰 영어로 자신을 고스란히 보이면서 구애하는 표트르를 향한 그녀의 마음은 복잡해지고 모국에 돌아가도 가족 하나 없는 그의 외톨이 신세를 알게 된다. 아울러 연구가 중단되면 아버지가 삶을 송두리째 빼앗긴 것 같은 좌절을 느끼리라는 사실도 이해하게 된다. 현대 미국 여성인 케이트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
“우리 나라에는 이런 격언이 있지요. ‘달콤한 사람을 조심하라. 설탕은 영양분이 없다.’”(161쪽)
“흠, 우리 나라에는 식초보다 꿀로 더 많은 파리를 잡을 수 있다는 말이 있는데요.”(161쪽)
“하지만 왜 파리를 잡으려고 하죠, 네? 대답해 봐요, 식초 아가씨.”(162쪽)
케이트는 셰익스피어의 ‘말괄량이’ 카테리나와는 다른 의미에서 ‘껄끄러운 사람’이다. 입바른 소리와 직설적인 태도 때문에 타인들은 늘 케이트를 ‘현대의 말괄량이’로 여겨 왔고, 그녀 역시 그들과 섞이지 못한 채 거리를 두며 살아왔다. 아이러니하게도 케이트를 좋아하는 것은 어린이집 아이들뿐이다. 그런데 케이트의 인생에 홀연히 나타난 표트르는 똑 부러지고 원칙주의자인 그녀의 성격을 마음에 들어 하면서, 듣기 좋은 소리만을 하지 않는 케이트를 향해 칭찬의 의미로 ‘식초 아가씨’라고 부른다. (『식초 아가씨』를 통틀어 표트르의 이름을 제대로 발음해 주는 유일한 사람이 케이트이다.) ‘영어에 익숙하지 않은, 모국을 떠난 외국인’이라는 표트르의 인물 설정은 『식초 아가씨』의 플롯을 더욱 탄탄하게 만들어 주며, ‘말로써’ 길들이고 길들여졌던 『말괄량이 길들이기』와 달리 가식 없는 직접적인 언어로 맞부딪치는 가운데 외로운 영혼이었던 케이트와 표트르는 두 사람이 얼마나 공통점이 많은지―얼마나 지적이고 심지 굳고 결단력이 있는지 알게 된다. 누구도 보지 못했던 서로의 장점을 알아본 것이다. 결국 케이트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기 위한 방법을 택하는데, 이들의 사랑은 근본적이고 궁극적인 평등을 이끌어 낸다.
한편 ‘식초’처럼 『식초 아가씨』에는 인물과 사건을 드러내 주는 주요한 장치로 먹거리가 이용되었는데, 케이트가 표트르를 처음 만난 것은 닥터 버티스타가 도시락을 깜빡 잊어(잊은 척하여) 연구소로 가져다준 때이고, 표트르가 버티스타네를 방문했을 때 그는 ‘약이 입에 쓰지 않으면 치료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라는 격언을 인용하면서 선물로 90퍼센트 카카오 다크초콜릿을 가져오기도 한다. 닥터 버티스타는 가족의 매일 저녁 식사를 고기 곤죽이라는, 자신의 기준에서 보건대 필요한 영양분이 모두 공급되고 시간과 메뉴를 선택하는 수고를 덜 수 있는 죽으로 정해 놓았다. 채식주의자 선언을 한 버니는 포테이토칩이 채소라고 주장하는 등, 곳곳에서 먹거리와 인물 및 사건을 연결 지어 읽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현대의 말괄량이에 걸맞게 케이트를 길들이는 사람은 표트르가 아니라 케이트 자신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하고, 변화와 성장과 수용이 환영받는다는 것을 인정하게 됨으로써 스스로를 길들이는 것이다. 타일러는 셰익스피어적인 플롯을 절묘하게 살리면서도 다시 쓰기를 넘어, 아이러니가 가미된 미묘하고 부드러운 유머, 사물을 관찰하는 예리하면서도 애정 어린 시선, 인간성에 대한 신선한 통찰력이 돋보이는 그녀의 주제와 인물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 자신만의 완벽한 세계―『식초 아가씨Vinegar Girl』(2016)를 창조해 냈다.
‘이것은 케이트와 표트르의 사랑 이야기이다. 똑똑하지 못하고 억지를 부리는 듯 보여도, 인간적인 여자와 남자가 만나 서로를 알아볼 때, 오해하던 가족들이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될 때 어떤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질 수 있는지 보여 주는 소설이다. 『식초 아가씨』를 통해 나는 앤 타일러를 더욱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옮긴이의 말」에서)
앤 타일러가 다시 쓴 『말괄량이 길들이기』―『식초 아가씨』는 철저하게 현대적이고 독립적인 케이트 같은 여성이 한 남성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할 것인지의 여부를 묻는다. 이에 대한 답은 케이트만큼이나 톡톡 튀고 유쾌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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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