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미스터소프티에서 아이스크림콘을 두 개 사 와서 앨리스에게 하나 내밀었다. 앨리스는 초콜릿을 받은 것처럼 아이스크림도 받았다. 벌써 녹아서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어쨌든 퓰리처상을 몇 번이나 받은 작가가 사람들을 독살하고 다니지는 않을 테니까.
두 사람은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비둘기 두 마리가 빨대를 쪼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원피스의 지그재그 무늬와 어울리는 파란 샌들을 신은 앨리스가 햇볕을 받으며 한쪽 발을 한가롭게 움직였다.
“그래, 앨리스 양. 할 마음 있나?”
그녀가 그를 보았다.
그가 그녀를 보았다.
앨리스가 웃었다.
_13~14쪽
그의 침실은 꼭대기 층에 있었는데, 바닥이 차분하게 삐걱거렸고 나이 많은 오크나무의 옹이 진 가지들이 물결치는 초록색으로 창문을 가득 채웠다. 아침이면 앨리스는 그와 얼굴을 마주하고 누워서 빛나는 갈색 홍채를 빤히 보며 그렇게 많은 생일과 전쟁과 결혼과 대통령과 암살과 수술과 수상과 책을 겪고도 어떻게 이토록 생생해 보이는지, 어떻게 이토록 맑고 기민한지 감탄하며 한숨을 쉬었다. 두 사람이 산 세월을 합치면 97년이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는 그의 세월과 자신의 세월이 헛갈렸다. 밖에서 새들이 태평하게 쑥덕거렸다. 앨리스는 햇빛이 얼굴에 닿으면 일어나 앉아서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뺨에 베갯잇 주름 자국이 남아 있었다.
_82~83쪽
그녀가 벤치로 돌아와보니 가브리엘라가 에즈라의 목도리를 들고 그를 일으키는 중이었다. 태양은 콜럼버스 애비뉴의 고층 건물들 뒤로 사라졌고 갑자기 내린 어스름 속에서 주변 모든 사람들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에즈라는 바람을 등지고 서서 코듀로이 바지를 입은 다리 사이에 지팡이를 끼우고서 재킷 지퍼를 잠그려고 애썼다. “아니, 아니.” 가브리엘라가 도우려고 하자 그가 조용히 말했다. “내가 할 수 있어.” 신풍나무들 때문에 작아진 그는 자기 아파트라는 밀폐된 피난처에 있을 때보다 더 작고 연약해 보였고, 다른 사람들의 눈에 어떻게 보일지가 앨리스에게도 잠시 보였다. 노쇠한 늙은이와 시간을 낭비하는 건강하고 젊은 여성.
_108~109쪽
두 개의 여권, 두 개의 국적, 태어난 땅은 없음. 비행기에서 태어난 아이는 뿌리를 갖지 못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태어난 항공사의 비행기를 평생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참 매력적인 생각이다. 당신을 배달한 황새가 그대로 당신 것이 되어서 하늘 위의 거대한 염습지로 돌아갈 때까지 어디든 태워준다니 말이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나는 그런 보너스를 받지 못했다. 받았으면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처음에는 다들 암만을 통해서 지상으로 몰래 드나들었다. 그런 다음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했고, 미국 여권 소지자는 이라크 황새를 타지 못하는 세월이 13년 동안 이어졌다.
_193~194쪽
앨러스테어가 8년 전 카불에서 있었던 일을 나에게 이야기해준 것도 이날 밤이었다. 그때 그는 동료와 함께 일을 끝내고 짐을 챙기고 있었는데, 아프가니스탄 소년이 달려와서 카메라맨의 가방을 낚아챘다. 앨러스테어는 몇 분 뒤 우연히 지나가는 경찰을 보고 불러 세워서 소년의 생김새를 설명했다. 키 170센티미터 정도에 나이는 열네다섯 살쯤 되어 보이고 하늘색 셔츠에 짙은 초록색 카피예를 두르고 있었다고, 저쪽으로 갔다고 말이다. 몇 분 뒤 경찰이 소년을 데리고 돌아와서 앨러스테어에게 가방을 건넸다. 앨러스테어가 고맙다고 말했고, 소년은 경찰이 시키는 대로 사과했다. 그런 다음 경찰이 권총집에서 권총을 뽑더니 소년의 머리를 쏘았다. 앨러스테어가 말했다. 내가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그 장면을 되돌려보면서 의도치 않게 끼어든 것을 후회했을지 상상이 가겠지. 폭력이 회사의 광고 수입을 창출하고 내가 바로 그 폭력을 보도한다면 내가 폭력을 영속화하는 세력의 일부가 아니라고 하기 힘들겠지. 맞아, 그래서 나는 밤에 잠을 잘 못 자.
_302~303쪽
내 옆에서 진행되는 게임에서 사담은 스페이드 A, 그의 아들 쿠사이와 우다이는 각각 클로버 A와 하트 A, 유일한 여성—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후다 살리 마디 암마시, 즉 케미컬 샐리—은 하트 5였다. 이 카드 네 장을 포함해서 총 열세 장은 사진 대신 죽음의 신처럼 두건을 쓴 머리가 연상되는 평범한 검은색 타원형만 그려져 있었다. 나와 제일 가까이 앉은 남자가 플러시—얼굴 없는 카드들—를 내려놓을 때 나는 이 카드들이야말로 수배자들을 가장 인간적으로 보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이 카드들에는 얼굴이 없기 때문에 나 역시 아딜 압달라 마디(다이아몬드 2)나 우글라 아비드 사키르 알쿠바이시(클로버 2), 가지 함무드 알우바이디(하트 2), 라시드 탄 카짐(스페이드 2)으로 태어날 수도 있었음을 더욱 잘 보여주었다. 당신의 증조부가 다른 여자를 만났다면. 당신 부모님이 더 늦은 비행기를 탔다면. 당신의 영혼이 다른 대륙에, 다른 반구에, 다른 날 반짝 태어났다면.
_305쪽
■ 지은이_ 리사 할리데이Lisa Halliday
1976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메드필드에서 태어났다. 하버드대학에서 미술사학을 공부하고, 와일리 에이전시에서 문학 에이전트로 일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 틈틈이 소설을 쓰기 시작해 2005년 유력 문예지인 《파리 리뷰》에 단편을 발표했고, 2017년에는 첫 장편소설이자 데뷔작인 『비대칭』으로 유망한 신인 작가들에게 수여되는 화이팅상을 출간 전 수상했다. 『비대칭』은 2018년 출간되자마자 “문학적 현상”(《뉴요커》)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그해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과 《뉴욕 타임스》 《타임》 《퍼블리셔스 위클리》 등 유력 매체들이 선정한 ‘올해의 책’ 목록에도 이름을 올려 큰 주목을 받았다. 리사 할리데이는 현재 가족과 함께 이탈리아 밀라노에 거주하면서 작가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 옮긴이_ 허진
서강대학교 영어영문학과와 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번역학과를 졸업했다. 지넷 윈터슨의 『시간의 틈』, 애나 린지의 『걸 인 더 다크』, 로알드 달의 『헨리 슈거』, 찰스 디킨스의 『픽윅 클럽 여행기』, 도나 타트의 『황금방울새』 『작은 친구들』, 마틴 에이미스의 『런던 필즈』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 2017 화이팅상 수상작 ★ 2018 《타임》 올해의 책 ★ 2018 《뉴욕 타임스》 올해의 책
★ 2018 《뉴요커》 올해의 책 ★ 2018 《퍼블리셔스 위클리》 올해의 책
★ 2018 《커커스 리뷰》 올해의 책 ★ 2018 《오프라 매거진》 올해의 책 ★ 2018 《엘르》 올해의 책
★ 2018 《리터러리 허브》 올해의 책 ★ 2018 《버슬》 올해의 책 ★ 2018 「NPR」 올해의 책
70대 노작가의 연인이 된 25살의 작가 지망생,
입국을 거부당하고 공항에 억류된 이라크계 미국인 청년
이질적이지만 미묘하게 겹쳐지는 두 사람의 이야기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추천 도서
2018년 영미 문학계를 휩쓴 가장 뜨거운 데뷔 소설
2018년 연말, 한 해를 마무리하는 미국 출판계의 시선은 이례적으로 한 작품에 집중되었다. 뉴욕의 젊은 작가 지망생과 히스로 공항에 억류된 이라크계 미국인 청년의 이야기를 통해 “풀기 어려운 우리 시대의 힘의 불균형을 파헤치는 소설”(《옵서버》)인, 리사 할리데이의 『비대칭』이었다.
오랫동안 문학 에이전트로 일하면서 작가의 꿈을 키워온 할리데이는 2017년 이 첫 장편소설로 주목할 만한 신인 작가에게 수여되는 화이팅상을 출간 전 수상하며 문단에 데뷔했다. 데뷔 전 이따금 단편을 써서 문예지에 투고한 것 외에 이렇다 할 이력이 없었음에도 『비대칭』은 2018년 출간되자마자 단숨에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이해 말 미국의 주요 매체들이 선정한 ‘올해의 책’ 타이틀을 폭풍처럼 휩쓸었다. 독자들 또한 갓 문단에 나온 이 생소한 신인 작가의 작품에 열광했으며,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올해 읽은 책 중 최고”라고 극찬하면서 해외 출판사와 편집자들의 열렬한 관심도 이어졌다. 데뷔 소설로서는 드물게 미국 사회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며 “문학적 현상”(《뉴요커》)이라고까지 불린 작품 『비대칭』이 현대문학에서 번역 출판되었다.
인종, 성별, 부, 권력……
불균형한 세상을 만드는 크고 작은 ‘비대칭’들
총 세 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비대칭』은 언뜻 보기에는 아무 관계 없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3인칭으로 된 1장과 1인칭으로 된 2장은 주인공은 물론이고 내러티브도 무척 달라서, 이들 장에 어떤 연결 고리가 있는지 어떻게 이야기가 끝맺을지 쉽사리 예상되지 않는다. 영국 신문 《옵서버》는 이 책에 대해 “세 개의 부분으로 구성된 퍼즐 상자 같은 작품”이라고 했는데, 그 말대로 소설 곳곳에 흩어진 퍼즐 조각들을 찾아 맞춰가는 일은 독자에게 주어진 수수께끼이자 이 책의 핵심적인 묘미이다.
1장 「어리석음」은 뉴욕에서 편집자로 일하는 스물다섯 살 앨리스의 이야기이다. 그녀는 우연히 유명 소설가 에즈라 블레이저를 만나 깊은 관계를 맺는다. 남몰래 작가를 꿈꾸는 앨리스에게 노벨문학상 후보로도 거론되는 그는 선망의 대상 그 자체. 앨리스는 에즈라를 존경하고 사랑하지만, 모든 면에서 자신을 압도하는 그와의 관계에서 때때로 열등감과 무력함을 느낀다.
2장 「광기」는 히스로 공항의 폐쇄된 대기실에 갇힌 한 남자의 내면을 비춘다. 이라크계 미국인 청년 아마르는 형을 만나러 가던 중 경유지인 런던에서 억류자 신세가 된다. 미국식 교육을 받은 미국 시민권자임에도 테러범으로 몰려 입국을 거부당한 그는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심문과 기약 없는 기다림 속에서 자신과 가족의 삶을 돌아본다.
성가대원 출신의 백인 여성 앨리스와 시아파 이슬람교도 아마르는 그야말로 ‘비대칭’의 인물이다. 화려한 스카이라인을 자랑하는 맨해튼과 포화에 휩싸인 아마르의 기억 속 바그다드. 야구와 아이스크림과 칵테일이 있는 뉴욕의 평온한 주말과 당장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이라크의 불안정한 일상. 두 사람은 각자가 속한 환경, 종교, 문화가 그러하듯 서로 대척점에 서 있다. 그러나 때때로 앨리스와 아마르가 처한 상황은 묘하게 겹쳐지는데, 앨리스는 부와 명성을 가진 에즈라와의 관계에서, 아마르는 자신을 의심하는 입국 심사관과의 관계에서 각각 열등한 위치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소설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개인과 국가 간 힘의 불균형을 야기하는 다양한 비대칭적 요소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에즈라 블레이저의 짧은 인터뷰가 실린 3장(「에즈라 블레이저의 무인도에 가져갈 음반」)에 이르면, 1장과 2장을 잇는 마지막 퍼즐 조각이 맞춰지고 아무 관련 없어 보인 이야기들이 커다란 그림을 완성하며 예상치 못한 울림을 선사한다.
영미권의 많은 평론가들은 『비대칭』을 9·11 테러와 이라크 전쟁 이후 미국에 퍼진 배타주의, 특히 나라 안팎으로 심각한 분열과 갈등을 불러온 트럼프 행정부에 대한 비판으로 보았다. 동료 작가인 채드 하바크 역시 이 책을 “불공정한 세상 속 예술의 역할을 이야기하는, 없어서는 안 될 정치 소설”로 규정했다. 그런데 작중 인물 앨리스는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쓰라’고 조언하는 에즈라에게 전쟁과 독재와 세계정세처럼 보다 중요한 것에 대해 쓰고 싶다고 답한다. 이는 나와 나를 둘러싼 환경에 매몰되지 않고, 더 넓은 세상과 더 다양한 사람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 표명이기도 하다. 결국 ‘소설’을 쓰고 읽는다는 것은 내 좁은 경험의 한계를 넘어 전혀 다른 배경과 감정을 가진 이들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선언인 까닭이다.
인간은 이토록 무수한 ‘비대칭’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을까? 리사 할리데이는 앨리스와 아마르 두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묵직한 질문을 던지고, 타자에의 관심과 상상을 통해서, ‘문학’과 ‘예술’을 통해서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고 말한다.
■ 해외 추천사
이 독특하고 아름다운 소설은 손에서 내려놓을 수도, 쉽사리 정의할 수도 없다. 이야기가 문단의 연애 사건에서 히스로 공항에 억류된 이라크계 미국인 경제학자의 1인칭 시점으로 단숨에 건너뛰며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할리데이는 작중 인물들을 매우 충실하게 그리고, 마치 형체를 가진 존재인 것처럼 그들을 존중한다. 이 책은 겉으로 보이는 것만이 진실이 아님을 깨우쳐준다.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이야기들이 어떻게 귀결되는지, 또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확인하고 나면 깊은 울림이 찾아온다. 할리데이는 사랑, 권력, 야망, 그리고 우리가 세상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고자 노력하는 방식에 관해 대담하고 우아하게 고찰한다. 정교하게 다듬어진 문장들은 자신감 넘치는 예술가의 매혹적인 고요함을 풍기는 동시에 소설의 본질에 관한 흥미로운 질문들을 던진다.
_화이팅상 심사평에서
남성과 여성, 순진함과 경륜, 명성과 열망 사이의 불균형한 힘의 역학을 날카롭게 그려냈다.
_《가디언》
『비대칭』은 상상력과 공감의 한계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인종, 성별, 국적과 힘의 경계를 넘어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까?
_《뉴요커》
아무 관련 없어 보이는 두 편의 이야기가 빈틈없는 데뷔작 안에서 섬세하게 결합되어 있다.
_《커커스 리뷰》
리사 할리데이는 신인 작가의 에너지와 성숙한 작가의 자신감을 동시에 갖고 문학 무대에 오른다.
_루이스 어드리크(소설가)
우아하고 재미있고 기발하고 심오하며, 매우 흥미진진하다.
_제이디 스미스(소설가)
리사 할리데이의 데뷔 소설은 이미 들어본 듯한 이야기처럼 시작해 지금껏 읽어본 어느 것과도 다른 책이 되었다. 교묘하고, 흥미롭고, 인간적인 이 책은 불공정한 세상 속 예술의 역할을 이야기하는, 없어서는 안 될 정치 소설이다.
_채드 하바크(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