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애는 움직이고 있었다. 걸음걸이가 묵직하고 느릿느릿한 곰 같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늑대, 아니―디는 어두운 빛깔의 동물들을 떠올리려 했다―집고양이에서 점점 더 큰 동물로 올라가면 흑표범이 되려나.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몰라도―아마 자신과 정반대 색깔의 낯선 사람들로 가득한 운동장에서 전학생이 된 상황을 생각하고 있던 게 아닐지―그 애는 선생님들이 기다리는 학교 문으로 소리 없이 걸어갔다. 그 애에게는 자기 몸을 움직이는 방식을 아는 사람의 무의식적인 자신감이 흘렀다. 디는 가슴이 조여 오는 것을 느꼈다. 숨을 들이마셨다.
_ 제1부 수업 시작 전// 12~13쪽
그날 아침 흑인 소년이 운동장으로 걸어 들어온 순간, 이언은 무언가 바뀌는 느낌을 받았다. 지진이 나면 이런 기분일까, 땅이 재배치되면서 믿을 수 없게 변했다. 학생들은 거의 1년을 함께하며 무리를 확고히 짓고 지도자와 추종자의 위계를 이루었다. 그 조직은 원활히 굴러갔다. 한 소년이 나타나서 모든 것을 뒤흔들기 전까지는. 단 한 번 공을 어마어마하게 멀리 차고, 단 한 번 소녀의 뺨을 만진 것만으로 질서가 바뀌었다.
_ 제2부 오전 휴식 시간// 107쪽
이전에는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신체적 끌림, 호기심, 수락의 유혹적 혼합. 디는 질문을 많이 했고, 오의 대답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였다. 메이플시럽 같은 눈은 시선을 마주쳐도 흔들리지 않았다. 디는 고개를 끄덕이며 오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친구들과 함께 오를 보고도 킬킬대지 않았고, 냄새가 난다고 말하지도 않았으며, 이상한 눈초리로 쏘아보지도 않았다. 디는 자신과 오를 구분 짓는 여러 가지 것들에 호기심을 느꼈지만, 균형을 찾아 오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디의 이런 태도에 오는 기분이 좋았고, 두 팔로 디를 껴안고 싶어졌다. 디의 온기를 느끼고, 학교의 나머지 부분, 나머지 세계를 지워 버릴 수 있게.
_ 제3부 점심시간// 131~132쪽
분노는 디가 캐스퍼에게 딸기를 먹여 준 것에서 비롯되었다가 디가 오 앞에서 캐스퍼를 변호하자 한층 더 높아졌다. 하지만 변곡점, 즉 물이 둑을 뚫고 흘러넘친 때는 딸기 필통이 블랑카의 손에 있는 것을 보았을 때였다. 부분적으로 그건 부조화 때문이었다. 낯선 백인이 오와 누나를 강하게 연결시키는 물건을 손에 쥐고 있다니. 누나가 더 어리고, 더 행복하고, 좀 더 말이 잘 통하고, 더 누나다웠던 때의 물건. 이제 그 물건이 운동장에서 여기저기 넘겨지며 개인의 역사에서 풀려나 버렸다. 원래 그 물건이 시시의 것이었다는 사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시시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실제로 오세이에게 시시는 그 누구보다 중요한 사람인데도.
_ 제4부 오후 휴식 시간// 191쪽
디는 계속 내려갔고 땅에 다다르자 배에 앉은 이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나한테서 도망갈 생각 마, 디!” 오가 외쳤다.
오의 말에 구슬치기하던 남자애들이 고개를 들었고 여자애들은 줄넘기를 멈췄다. 오는 원치 않았지만 모두의 관심을 얻고 말았다. 하지만 이제 관심을 얻은 만큼 디를 벌주는 데 이를 이용하기로 했다.
“가지 마.” 오는 목소리를 높여서 반복했다. 그런 다음 이전에 들어 본 적은 있지만 자기가 쓸 거라고는, 쓰는 법을 알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말을 했다. “창녀!”
그 말이 마치 천둥처럼 운동장을 갈랐다. 귀를 기울이지 않던 사람들도 이제는 듣고 있었다. 심지어 블랑카와 캐스퍼도 포옹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디는 한 발을 뒤에 둔 채로 얼어붙었다.
_ 제5부 방과 후// 237~238쪽
제1부 수업 시작 전
제2부 오전 휴식 시간
제3부 점심시간
제4부 오후 휴식 시간
제5부 방과 후
옮긴이의 말
지은이 트레이시 슈발리에
‘현란한 기교 없이도 탁월함을 드러낼 줄 아는 작가.’
_ 로즈 트레메인
간결한 문체와 섬세한 고증을 바탕으로 작품 속에 한 시대를 완벽하게 되살려 낸다는 찬사를 받아 온 슈발리에는 오하이오주 오벌린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스물두 살에 영국 런던으로 건너가 작가 인명사전 편집자로 일했다. 틈틈이 습작을 쓰다가 본격적인 창작 공부를 위해 이스트앵글리아 대학에 입학하여 문예창작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97년 첫 장편 『버진 블루』가 재능 있는 신인 작가를 발굴하는 ‘프레시 탤런트’에 선정되면서 화려하게 등단했고, 이후 『추락하는 천사』 『여인과 일각수』 등의 화제작을 연달아 발표했다. 특히 1999년 작 『진주 귀고리 소녀』가 전 세계 38개국에서 500만 부 이상 팔리며 단숨에 세계적인 작가로 떠올랐는데, 네덜란드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동명 그림을 모티프로 한 이 소설은 2003년 영화화되어 큰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슈발리에는 사회와 주변인으로부터 이해받지 못해 고독을 느끼는 인물들을 그리며 ‘고립과 연결’이라는 주제를 일관되게 다루어 왔다. 이는 30년 넘게 런던에 거주하고도 여전히 미국식 억양을 버리지 못한 ‘영원한 이방인’으로서의 자기 경험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그녀는 ‘셰익스피어 다시 쓰기’를 제안받자마자 망설임 없이 『오셀로』를 택했고, 자신이 난생처음 소수자의 고독을 경험했던 1974년 워싱턴의 초등학교를 무대로 개작을 썼다. 현대판 『오셀로』인 『뉴 보이』를 발표하며 작가는 이렇게 밝혔다. “당시로서는 드물게도, 나는 흑인과 백인이 뒤섞여 살던 동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흑인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학교에 다녔다. 그러면서 나와 다른 피부색을 가진 아이들로 가득한 운동장을 걷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를 알게 되었다. 『오셀로』는 이방인이 된다는 것에 관한 이야기이며, 이러한 경험은 어린 나이에도 얼마든지 찾아올 수 있다. 우리는 누구나 한 번쯤 자신의 존재가 상대에게 받아들여질지를 두려워하며 운동장 한구석에 서는 경험을 하게 된다.”
옮긴이 박현주
197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고려대학교 영어영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일리노이 대학교에서 언어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고려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으며, 작가와 번역가,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P. D. 제임스의 『죽음이 펨벌리로 오다』를 비롯하여, 질 알렉산더 에스바움의 『하우스프라우』, 찰스 부코스키의 『고양이에 대하여』 『글쓰기에 대하여』 『우체국』 『여자들』, 마거릿 밀러의 『내 무덤에 묻힌 사람』 『엿듣는 벽』, 조이스 캐럴 오츠의 『악몽』,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의 『비밀의 화원』, 트루먼 커포티의 『티파니에서 아침을』 『인 콜드 블러드』 『차가운 벽』, 제드 러벤펠드의 『살인의 해석』 『죽음본능』, 페터 회의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마이클 온다치의 『잉글리시 페이션트』, 도러시 L. 세이어스의 『증인이 너무 많다』 『맹독』 등 다수의 작품을 우리말로 옮겼고, 지은 책으로는 에세이집 『로맨스 약국』과 미스터리 단편집 『나의 오컬트한 일상』(전 2권)이 있다.
트레이시 슈발리에가 다시 쓰는 셰익스피어의 『오셀로』
영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원작자가 쓴
열한 살 소년 소녀의 가장 달콤하고도 잔혹한 하루
● 이 책에 대하여
오늘날 가장 사랑받는 작가들이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현대 소설로 재탄생시키는 프로젝트 「호가스 셰익스피어 시리즈」의 다섯 번째 책 『뉴 보이New Boy』가 현대문학에서 출간되었다. 지넷 윈터슨의 『시간의 틈』(겨울 이야기), 하워드 제이컵슨의 『샤일록은 내 이름』(베니스의 상인), 앤 타일러의 『식초 아가씨』(말괄량이 길들이기), 마거릿 애트우드의 『마녀의 씨』(템페스트)에 이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영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원작자 트레이시 슈발리에가 선보이는 신작이다.
이번 프로젝트를 위해 그녀가 선택한 작품은 『햄릿』 『맥베스』 『리어왕』과 함께 ‘4대 비극’으로 꼽히는 셰익스피어의 대표작 『오셀로Othello』이다. 『오셀로』는 인종과 신분을 뛰어넘어 사랑을 쟁취했던 남자가 부하의 꾐에 속아 아내의 정절을 의심하고 살인과 파멸에 이르는 이야기이다. 이 작품은 질투라는 인간 본연의 감정을 더없이 선명하고 강렬하게 그려내 오늘날에도 다양한 형태로 끊임없이 재해석되는 걸작 중의 걸작이다. 동시에 『베니스의 무어인, 오셀로의 비극The Tragedy of Othello, the Moor of Venice』이라는 정식 제명에서도 알 수 있듯, 『오셀로』는 낯선 존재, 즉 ‘이방인’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30년 넘게 타국에 살면서 종종 외부인을 향한 불편한 시선을 경험했던 슈발리에는 오셀로의 비극이 그가 남들과 다른 피부색을 가진 ‘흑인’인 데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해 자신만의 『오셀로』-『뉴 보이』를 썼다. 이 소설은 16세기 베니스에서 1974년 워싱턴 근교의 한 초등학교로 무대를 옮겨 와, 백인 아이들 속에서 흑인 전학생이 경험하는 고립과 차별, 첫사랑의 좌절, 그로 인한 파국을 그리며 ‘오셀로의 비극’을 재현해 보인다. 감정적 격동기를 겪는 소년 소녀의 하루에 원작의 구성을 압축해 담아냄으로써 한 인간과 순수했던 그의 사랑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과정을 더욱 극적으로, 속도감 있게 되살려 내는 한편, 21세기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소수자를 향한 차별에 문제를 제기한다.
● 줄거리
용맹하고 자신감 넘치는 흑인 장군 오셀로는 슈발리에의 소설 속에서 가나 외교관의 아들인 열한 살 소년 ‘오’로 부활한다. 그는 아버지의 새 부임지인 워싱턴 근교의 초등학교, 온통 백인 아이들뿐인 학교로 이제 막 전학 온 참이다. 아이들은 자신들과 다르게 검은 피부를 가진 오를 호기심과 편견이 뒤섞인 시선으로 바라보지만, 단 한 사람, ‘디’라는 금발 소녀만은 그의 당당하고 꾸밈없는 태도에 호감을 표하며 적극적으로 다가온다. 오가 디의 친절에 대한 답례로 누나에게 물려받은 딸기 필통을 선물하면서, 두 아이는 서로 호감 이상의 감정을 느끼고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디의 도움으로 오는 아이들의 경계심을 허물면서 조금씩 새로운 학교에 적응해 간다.
그러나 두 사람이 상대의 마음을 얻었다는 기쁨에 들떠 있던 그때, 운동장 한편에서는 그들 사이를 갈라놓기 위한 음모가 싹튼다. 줄곧 약한 아이들을 괴롭히며 힘을 과시해 온 ‘이언’은 흑인에다 전학생인 ‘오’가 불과 반나절 만에 교내 최고의 인기 여학생인 디를 사로잡고 다른 아이들까지 하나둘 제 편으로 만드는 것에 위기감을 느낀다. 그는 『오셀로』의 악당 이아고가 그랬듯 디의 단짝인 ‘미미’를 조종해 딸기 필통을 훔치고, 그것을 교묘히 이용해 디가 오와 다른 남학생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고 있을지 모른다는 오해를 만들어 낸다. 이언이 오의 마음속에 심어 둔 의심의 씨앗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커져 가고, 흑인이라는 이유로 소외당하는 사이 자신도 모르게 내면에 자리 잡은 열등감이 폭발하면서 순수한 애정으로 가득했던 오와 디의 관계는 뒤틀리기 시작한다.
슈발리에는 자신이 주인공과 같은 나이였던 1974년을 개작 『뉴 보이』의 배경으로 가져왔는데, 이때는 ‘블랙 팬서’나 ‘블랙 파워’ 등의 흑인 단체가 반차별 운동을 전개하던,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이러한 선택에서 작가는 『오셀로』의 개작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는지를 분명하게 했다. 오셀로의 비극이 검은 피부에 뿌리를 두고 있었듯, 『뉴 보이』의 오가 경험하는 고립 또한 본질적으로 그가 교내의 유일한 흑인 학생이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오셀로의 시대로부터 수백 년이 흘렀지만 인종차별은 여전히 존재한다. 외교관인 오의 아버지는 사회적으로 상류층에 속하지만, 그들 가족은 피부색으로 먼저 평가받는다. 그리고 어른들이 부지불식간에 내비친 ‘편견’의 시선을 아이들은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고스란히 흡수하고 또래 집단 속에서 재생산하고, 유색인 또한 동등한 시민이라는 사실을 체화하지 못한 지역사회의 위선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나아가 차별과 폭력이 어떻게 작용하고 어떻게 대물림되는지, 타자에 대한 몰이해가 양쪽 모두에게 어떤 상처를 남기는지를 선명하게 보여 준다. 이 소설은 17세기에 쓰인 고전을 재현하고 있으나, 그 속에 담긴 메시지는 21세기인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고전을 다시 쓴다는 것은 그 안에 새겨진 메시지가 이 시대에도 변함없이 강력한 힘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리고 트레이시 슈발리에의 『뉴 보이』는 개작의 독창성과 개별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셰익스피어의 현대적 가치를 훌륭하게 재확인시켜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