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이는 가정부를 따라 계단을 올랐다. 근원을 알 수 없는 희미한 빛이 복도의 그림자를 누그러뜨렸다. 그들은 베틀조차 자신이 짠 게 아니라고 부인할 듯한 계단 카펫을 소리 없이 밟고 올라갔다. 카펫은 식물이 된 것 같았다. 퀴퀴하고 응달진 공기 속의 풍성한 지의류 또는 군데군데 돋아서 유기체처럼 발밑에서 끈적이는 이끼가 된 것 같았다. - 「가구가 딸린 셋방」
식탁마다 바퀴 달린 양념 통 스탠드가 있고, 그 위에 양념 통들이 있다. 후추 통을 흔들면 화산 먼지처럼 아무 맛도 없고 우중충한 구름이 만들어진다. 소금 통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시든 순무에서 붉은 물을 빼낼 수 있는 사람이라 해도 보글 레스토랑의 소금 통에서는 소금을 빼낼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식탁에는 ‘인도 귀족의 조리법’으로 만든 온화한 소스의 모조품도 있다. - 「틸디의 짧은 데뷔」
“도로변의 이 통나무에 앉읍시다.” 내가 말했다. “그리고 잔혹하고 천박한 시인들은 잊어버립시다. 아름다움은 확인된 사실과 공인된 측정치라는 영광된 기둥 속에 있습니다. 우리가 앉은 이 통나무에 어떤 시보다도 멋진 통계가 있습니다. 나이테를 보면 수령이 60살인 걸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600미터 깊이의 땅속에 묻히면 3천 년 후에 석탄이 될 겁니다. 세상에서 가장 깊은 석탄 광산은 뉴캐슬 근처 킬링워스에 있습니다. 가로, 세로, 높이가 120, 90, 80센티미터인 상자에는 석탄이 1톤 들어갑니다. 동맥이 잘리면 상처 위쪽을 눌러야 합니다. 남자 다리에는 뼈가 서른 개 있습니다. 런던탑은 1841년에 화재가 났습니다.” - 「휘멘의 지침서」
높은 이상은 아니라 해도 어쨌건 이런 큰 목표를 낸시는 주급 8달러를 받으며 연마했다. 그녀는 누군지 알 수 없는 그 ‘왕자님’의 길 위에서 야영하며 마른 빵을 먹고 날마다 허리띠를 졸라맸다. 그 얼굴에는 남자 사냥꾼이라는 운명을 짊어진 자의 강인하고 상냥하고 엄격하고 희미한 미소가 있었다. 백화점은 낸시의 숲이었다. 그녀는 여러 차례 멋진 뿔이 달리고 덩치가 커 보이는 사냥감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하지만 언제나 어떤 깊고 확실한 본능에 의해 —사냥꾼의 본능일지도 모르고, 여자의 본능일지도 모른다— 사격을 중지하고 다시 길 위에 남는 쪽을 택했다. - 「손질한 등불」
사람들은 더 이상 천박한 즐거움을 추구하는 상스러운 무리가 아니었다. 그들은 이제 수십만의 진정한 이상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불쾌하지 않았다. 이 번득이는 사원의 싸구려 오락거리들은 가짜고 엉터리지만, 그렇게 금박 껍데기를 쓴 채로 불안한 인간 심장에 구원과 적절한 위로와 만족을 주고 있었다. 이곳에 어쨌건 로맨스의 껍데기가, 공허하지만 빛나는 기사도의 투구가, 짜릿하면서도 안전한 모험의 비행이, 사람들을 동화 나라로 태우고 가는 마법의 양탄자가 있었다. - 「벽돌 가루 거리」
젊음의 슬픔과 노년의 슬픔은 이런 차이가 있다. 젊음의 짐은 다른 이와 함께 나누면 그만큼 가벼워진다. 노년의 슬픔은 아무리 주고 또 주어도 그대로 남아 있다 - 「백작과 결혼식 하객」
“나는 일주일에 한 번 이상 나를 때리지 않는 남자는 싫어.” 캐시디 부인이 선언했다. “때리는 건 남자가 나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증거거든. 아! 하지만 잭의 이번 폭력은 가벼운 예방주사 같은 게 아니었어. 아직도 별이 보이네. 어쨌거나 잭은 이제 그걸 벌충하기 위해 일주일 동안 세상에 없이 다정한 남편이 될 거야. 이 눈이면 최소한 극장표에 실크 블라우스는 확보했다고 봐야 돼.” - 「할렘 비극」
첫 번째 모퉁이에서 엉클 시저를 만났다. 그는 건장한 흑인으로 나이가 피라미드보다 많은 것 같았고, 희끗희끗한 머리에 얼굴은 처음 봤을 때는 브루투스를, 다시 봤을 때는 줄루 족 왕 케츠와요를 연상시켰다. 그의 외투는 평생 본 적도 없고 볼 거라고 예상한 적도 없을 만큼 대단했다. 길이가 발목까지 오는 그것은 한때 청회색 남군 군복이었다. 하지만 비와 햇빛과 세월이 다양한 색깔을 만들어 내서, 거기 견주면 요셉의 외투도 희미한 단색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 「어느 도시의 보고서」
과거를 이야기하는 노인들이 대개 그러듯이 소령도 세부 사실을 대강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옛 농장주들의 웅장하리만치 눈부신 시절을 설명할 때, 그는 어떤 흑인 말구종의 이름이나 어떤 사소한 사건이 일어난 정확한 날짜나 어떤 해에 수확한 원면 꾸러미의 개수가 정확히 떠오를 때까지 이야기를 진척시키지 않았다. 하지만 하그레이브스는 답답해하지도 지루해하지도 않았다. 반대로 그 시절의 삶과 관련된 다양한 질문을 했고, 그에 대해 항상 준비된 대답을 들었다. - 「하그레이브스의 가면」
그러자 치킨은 지금이 이따금 행운을 얻는 데 필요한 절박하고 공격적인 투기의 때임을 깨달았다. 그가 가진 자본은 5센트였고, 그는 그것을 아이의 통통한 손에 쥐여 있는 것을 얻기 위해 던져야 했다. 실패할 위험이 크다는 것을 치킨은 알았다. 하지만 전략을 써야 했다. 그는 현명하게도 어린아이에게 완력을 쓰는 것을 두려워했다. 한번은 공원에서 배고픔을 못 이기고 유모차 탑승자가 들고 있는 이유식 병을 습격한 적이 있었다. 성난 아기가 즉시 입을 크게 벌리고 창공과 소통하는 단추를 누르자 금세 지원병이 찾아왔고, 치킨은 30일을 아늑한 교도소에서 보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자기 말대로 ‘아이들을 경계’했다. - 「블랙 이글의 실종」
9762번 밸런타인이 풀려나고 일주일 뒤에 인디애나 주 리치먼드에서 누구 소행인지 알 수 없는 깔끔한 금고털이 사건이 일어났다. 털린 돈은 800달러가 전부였다. 2주일 뒤에는 로건스포트에서 특허 받은 최신 도난 방지 장치가 달린 금고가 치즈처럼 뚫려 1,500달러에 이르는 현금이 사라졌다. 증권과 은은 그대로 있었다. 그 일은 악당 사냥꾼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런 뒤 제퍼슨시티의 구식 은행 금고가 화산 활동을 재개해서 5천 달러에 이르는 은행권을 분화구 밖으로 분출했다. 손실액의 규모가 너무 커져서 이제 벤 프라이스 수준의 형사가 개입할 필요가 생겼다.- 「기적을 행하는 남자」
태초부터 여자는 다른 여자에게 수수께끼가 아니었다. 여자들은 빛의 속도로 다른 여자의 감정과 정신을 꿰뚫고, 자매의 교묘한 거짓말을 걸러 내고, 깊이 감춘 욕망을 읽고, 빗에서 머리카락을 빼듯 교활한 말에서 궤변을 빼내서 경멸 속에 만지작거린 뒤 근본적 의심의 바람에 띄워 보낸다.- 「윈첼시 양의 사랑」
■ 오 헨리(O. Henry, 1862~1910)
위트와 아이러니, 결말의 극적인 반전. 오 헨리 단편의 특징으로 거론되는 이런 요소들은 그대로 단편소설 미학에 대한 정의로 언급된다. 체호프, 모파상, 에드거 앨런 포 등과 더불어 단편소설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작가 오 헨리는 10년도 채 안 되는 생의 마지막 시기에 불꽃같은 정열로 270여 편의 주옥같은 단편을 발표했다. 낭만과 모험, 해외 도피, 수감등 온갖 간난신고로 점철된 오 헨리의 삶이 뉴욕과 조우하면서 오 헨리의 단편 세계는 세상을 향해 활짝 만개했다. ‘산은 백 년을 보아도 아무 아이디어를 얻지 못할 수 있지만, 시내 거리는 한 블록만 걸으면 문장이 떠오르고 작품이 생겨난다’고 했을 정도로 뉴욕이란 도시는 오 헨리 창작의 산실이었다. 오 헨리는 화려한 대도시 뉴욕의 이면에서 힘든 삶을 이어가는 가난한 젊은이들을 그렸지만 그가 주목한 것은 그들의 힘겨운 삶 속에서도 작고 예기치 않게 빛나는 행복의 순간이다. 현실과 낭만이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는 오 헨리 작품의 이중성은 그의 재치 넘치는 문장과 결합되어 시대를 뛰어넘어 독자들을 행복감에 젖게 한다. 오 헨리는 살아생전 엄청난 인기를 누렸으나 비평계로부터는 외면받았다. 하지만 오 헨리 사후 불과 8년 만에 미국 예술과학협회는 오 헨리 상을 설립해 현재까지 매년 미국과 캐나다의 최고 단편소설을 선정하고 있다. 오 헨리의 횡령 혐의는 윌슨, 아이젠하워, 레이건 대통령 시절 비공식적으로 사후 사면을 받았지만 2012년 한 정치학 교수와 변호사는 오바마 정부에 오 헨리의 공식 사후 사면 청원서를 제출했다. 그해 오바마 대통령은 추수감사절 때 칠면조를 사면하는 행사에서 오 헨리를 언급했고 같은 달 미국 우정국은 오 헨리의 우표를 발행하면서 사면 청원서에 화답했다.
■ 옮긴이
고정아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다. 현재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옮긴 책으로 『오만과 편견』 『전망 좋은 방』 『하워즈 엔드』 『순수의 시대』 『내 무덤에서 춤을 추어라』 『노 맨스 랜드』 『천국의 작은 새』 『토버모리』 외 다수가 있다. 2012년 제6회 유영번역상을 수상했다.
체호프, 모파상, 카프카, 에드거 앨런 포 등의 이름과 더불어 단편소설의 대명사로 불리는 오 헨리의 단편선이 현대문학의 세계문학단편선 시리즈로 출간되었다. 오 헨리는 「마지막 잎새」 「경찰과 송가」 「동방박사의 선물」(‘크리스마스 선물’로 번역된) 등으로 영미권의 어떤 작가보다도 우리 독자들에게 친숙한 이름이다. ‘반전이 있는 따뜻한 이야기’인 오 헨리의 단편소설들은 동화와도 비슷한 분위기가 있어 아동용으로 무수히 번역 소개되어 왔다. 하지만 오 헨리는 결코 동화풍의 몇몇 작품으로만 이해하기에는 작품의 깊이와 폭이 무척이나 깊으면서도 다채로운 작가이다. 살아 있을 때부터 미국의 모파상, 미국의 고골 등의 호칭을 얻은 오 헨리는 경쾌한 위트와 희곡으로도 손색이 없는 생생한 대사, 결말의 절묘한 반전 등으로 단편소설의 역사에 굵직한 획을 그었다. 오 헨리 단편의 특징들은 그대로 좋은 단편소설에 대한 정의이기도 하다. 장인적 솜씨로 빚어낸 다채로운 이야기들로 오 헨리는 워싱턴 어빙과 에드거 앨런 포와 내서니얼 호손을 잇는 미국 단편소설의 마지막 거장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그의 사후 10년도 안 되어서 오 헨리 상이 설립되어 현재까지 매년 미국과 캐나다의 최고 단편소설을 선정해 시상하고 있다. 이번 세계문학단편선 오 헨리에 실린 56편의 주옥같은 작품은 작가 오 헨리가 현대적인 단편소설 미학의 성립에 어떻게 기여했는가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오 헨리의 단편소설들은 단편치고도 길이가 짧은 편에 속한다. 그럼에도 작품이 구축하는 무대는 풍부하고도 밀도가 높다. 작품의 성격에 따라 도입부에 1인칭과 전지적 작가 시점, 구경꾼, 편집자, 심지어는 동물의 시점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이야기의 얼개를 제시하고, 대화와 묘사의 절묘한 배치로 이야기에 대한 몰입도를 높인다. 작품에 나오는 여러 문학 작품들과 인용구는 작품의 플롯이나 인물과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고 작품의 전체적인 주제에 안성맞춤인 인용들로 작품의 깊이는 더 한층 깊어진다. 그리 길지 않은 분량임에도 오 헨리의 단편들이 자아내는 작품의 밀도와 완성도는 이러한 언어의 경제성이나 효율성이 없었더라면 이루어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언어의 경제성이야말로 ‘단편소설은 독자가 앉은자리에서 다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단편소설의 미덕을 실현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라 할 수 있다. 시적인 압축미와 함축을 보여 주는 오 헨리의 문장은 그의 천재적인 이야기 재능과 결합되어 빛나는 가작들을 만들어 냈다.
오 헨리는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 않았고 십대 때부터 약제사, 목장 인부, 토지 측량사, 은행원 등 다양한 직업을 거쳤다. 횡령 혐의로 억울하게 기소를 당하고 해외 도피를 거쳐 수감 생활을 하고 난 뒤 불혹의 나이에 이르러 오 헨리는 본격적으로 단편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짧은 인생을 마치기까지 불과 8년의 기간 동안 오 헨리는 270여 편의 단편을 집필하는 놀라운 창작열을 보여 주었다. 오 헨리의 이력은 얼핏 보면 문학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작품들을 통해 보이는 문학에 관련된 인용구들은 그의 파란만장한 삶 속에서도 문학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성서와 그리스 신화, 「천일야화」를 비롯해서 셰익스피어, 루바이야트, 월터 스콧, 찰스 디킨스, 스티븐슨 등의 다양한 작품이 소설의 인물을 설명하고,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데 긴밀하게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음악과 미술을 비롯해 당시 뉴욕을 무대로 피어나기 시작한 공연예술에 대한 이해도 오 헨리 작품의 중요한 요소로 배치되어 있다. 연극 배우나 보드빌쇼에 출연하는 인물들이 작중 인물로 빈번히 등장할 뿐 아니라 연극의 줄거리가 소설 구성의 기초를 제공하기도 한다. 오 헨리가 뉴욕에서 지냈던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그가 대도시에서 처음 접한 것들에 대해 얼마나 날카로운 관찰력과 통찰을 지녔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오 헨리 창작의 중요한 하나의 요소로 그가 ‘지하철 위의 바그다드’라고 불렀던 뉴욕이라는 도시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셰에라자드가 바그다드의 구중궁궐 안에서 천 일 동안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를 쏟아냈듯이 오 헨리 또한 20세기 초에 대중문화와 함께 폭발하기 시작한 뉴욕을 배경으로 다채로운 이야기들을 지어냈다. 창작에 직접적인 자극을 준 뉴욕에 대해 오 헨리는 ‘산은 백 년을 보아도 아무 아이디어를 얻지 못할 수 있지만, 시내 거리는 한 블록만 걸으면 문장이 떠오르고 작품이 생겨난다’고 말했다. 날카로운 관찰력과 모험과 낭만으로 가득 찬 삶의 경험을 통해 얻은 인간에 대한 통찰과 예술적 직관으로 오 헨리는 뉴욕이란 대도시에 얼마나 다채롭고 흥미로운 사연들이 숨어 있는지를 포착해 냈다. 도스토옙스키에게 페테르부르크가, 제임스 조이스에게 더블린이 그랬듯이 오 헨리에게 뉴욕은 작품의 무대이자 창작의 산실 역할을 했다.
뉴욕을 배경으로 한 오 헨리의 수많은 작품들의 주인공은 대부분 가난한 하층계급 사람들이다. 날로 번창하는 대도시 뉴욕의 이면에는 착취당하는 시골의 젊은이들이 있다는 것을 오 헨리는 여러 단편 작품들을 통해 보여 준다. 동시대 작가 중에 노동 계급과 도시 하층민에 대한 공감을 오 헨리만큼 보여 준 작가도 드물 것이다. 하지만 오 헨리는 그들의 가난과 힘든 삶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오 헨리가 강조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삶 가운데서도 보석처럼 빛나는 행복의 순간이다. 절묘한 결말의 반전은 인물들의 행복한 순간을 포착하는 데 쓰인을 포착한다. 궁핍한 삶에 대한 사실주의적인 묘사와 그들의 행복한 미래를 암시하는 낭만적인 결말의 반전은 절묘하게 결합되어 상쾌한 여운을 안겨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