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이 와인 잔 위로 눈을 들었다. 자리에 남은 쌍둥이 여자가 존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중이었다. 일행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무심하고 한가로운 시선이 아니었다. 그 밝은 파란색 눈동자는 무언가 할 말이 있다는 듯 강렬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마음이 불편해졌다. 이상한 여자 같으니! 꼭 저런 식으로 쳐다봐야 해? 나도 얼마든지 상대해 주겠어. 그는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공격적으로 미소를 흘렸다. 여자는 반응이 없었다. 파란 눈동자는 여전히 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_「지금 쳐다보지 마」(11쪽)
그는 담요를 내리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차가운 회색빛 아침 햇살에 방 안 풍경이 드러났다. 살아 있는 새들은 새벽이 오면서 창밖으로 빠져나가고, 죽은 놈들만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냇은 충격과 공포에 사로잡혀 그 작은 사체들을 응시했다. 전부 다 아주 작은 새들이었다. 바닥에 있는 것만 오십 마리는 되어 보였는데 울새, 피리새, 참새, 박새, 종달새, 되새 등 하나같이 자기들끼리 무리 지어 자기 영역 안에서만 사는 종류였다. 그런 새들이 어찌 된 일인지 다 함께 무리를 만들어 공격을 감행하다가 침실 벽에 부딪히거나 냇의 반격에 죽고 만 것이었다. 깃털이 빠진 놈들도 있었고 부리 부분에 냇의 피를 묻히고 있는 놈들도 있었다.
_「새」(72쪽)
중위가 먼저 사다리를 오르고 내가 뒤따랐다. 빠른 속도로 올라가느라 숨이 찼다. 숨을 헐떡거리자 차디찬 공기가 바로 목구멍으로 들어왔다. 갑판에 도착한 후 나는 옆구리가 결려 잠시 쉬어야 했다. 깜박이는 랜턴 불빛을 통해 나는 그 배가 목재나 곡식이 아니라 총을 잔뜩 실은 공격선임을 알아차렸다. 갑판은 작전을 위해 깨끗이 치워져 있었고, 선원들은 맡은 자리에서 준비 태세를 갖추었다. 시끌벅적했고 사람들이 바삐 오갔다. 가늘고 높은 목소리가 명령을 내리는 중이었다. 공기 중에는 짙은 안개와 시큼한 악취, 그리고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눅눅한 냉기가 서려 있었다.
_「호위선」(125쪽)
거실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사방이 책과 종이 천지였다. 온갖 잡동사니가 바닥을 가득 채웠다. 새장 속 앵무새가 횃대 위에서 깡충대며 환영 인사를 했다. 부인은 입을 열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레이스가 돌아 버린 게 분명하군. 지하실은 물론 거실에까지 남자를 들여 집을 완전히 엉망진창으로 만들다니. 방은 온통 뒤집어엎은 꼴이었다. 의도적으로 주도면밀하게 그녀의 집을 망가뜨린 것이다.
아니, 그게 아니지. 이건 엄청나게 조직적인 절도범들이야. 전에 갱들이 집으로 침입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레이스는 어쩌면 아무 죄가 없고 지하실에 꽁꽁 묶여 있을지도 몰랐다. 엘리스 부인은 불쌍한 그레이스 생각에 갑자기 마음이 아파졌다. 약간 어지럽기도 했다.
_「눈 깜짝할 사이」(147쪽)
그녀가 눈을 뜨고 나를 보았다. 울타리 바깥 가로등 덕분에 완전히 깜깜하지는 않았다. 비 내리는 밤치고는 덜 어두웠다. 그녀의 눈을 뭐라 묘사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런 재주는 없다. 어둠 속에서 야광시계가 어떻게 반짝이는지 아는가. 내게도 그런 시계가 하나 있었다. 밤에 깨어나면 그 시계가 친구처럼 손목을 지키고 있었다. 그녀의 눈도 바로 그렇게 빛났다. 하지만 훨씬 사랑스러웠다. 게으른 고양이 같은 눈빛은 이제 없었다. 부드러우면서도 동시에 슬픈 눈빛이었다.
_「낯선 당신, 다시 입 맞춰 줘요」(207~208쪽)
웃음 띤 얼굴의 마다는 간호사복을 입고 우유 잔을 쟁반에 받쳐 들고 다가오는 형체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아니, 이게 어찌 된 일이지? 간호사 캡을 쓴 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마다를 내려다보는 것은 여자 몸에 붙은 소 대가리였다. 뿔 사이에 간호사 캡이 올려져 있었다. 커다랗고 다정한 두 눈도 소의 눈이었다. 콧구멍도 넓고 축축했다. 간호사가 서서 숨 쉬는 모습은 영락없이 초원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 한 마리 소였다.
“약간 낯선 느낌인가요?”
웃음소리는 여자 간호사의 그것이었다. 브랜드 간호사는 침대 옆 탁자에 쟁반을 놓았다. 마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떠보았다. 간호사복을 입은 소가 여전히 곁에 있었다.
_「푸른 렌즈」(232쪽)
어쩐지 감상적이 되는 날이 있죠. 그런 때면 극장에서 보는 영화도 꼭 그런 면을 자극하곤 하고요. 그날 밤 제가 바로 그런 상태였어요. 금발의 여주인공을 클로즈업한 화면을 바라보자니 꼭 그 여자가 절 응시하는 듯 느껴졌어요. 내용은 평범했어요. 사랑스럽고 순결한 여자가 잘생긴 남주인공과 사랑에 빠지고 불한당이 등장해 여자를 파멸시키려 하죠. 과연 여자가 파멸되느냐 아니냐가 궁금해 계속 보게 되는 그런 영화였죠. 그때는 불한당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 여자는 남주인공과 맺어지더군요. 영화를 다 봐도 기분이 좋아지지 않았어요. 그대로 앉아 두 번을 연속으로 본 후 여전히 영화 속 세상에 빠진 채 일어선 시간이 12시쯤이었어요.
_「경솔한 말」(281쪽)
처음에는 계곡 쪽에서 올라오는 소리가 또렷했다. 개 짖는 소리, 소 목에 매달린 방울 소리, 서로를 부르는 남자들 소리 등이 선명하게 전해졌다. 집들에서 올라오는 푸른 연기가 안개처럼 뭉쳐졌고, 집들은 점점 장난감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길을 따라 산속 깊숙이 들어가다 보니 계곡은 멀리 사라졌고 나는 위로, 더 위로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오르막 하나를 넘어 왼쪽으로 돌면 뒤쪽 오르막은 보이지 않게 되고 다시 두 번째 오르막이 나타났다. 그것도 오르고 나면 지나온 두 오르막은 잊어버리고 더 가파르고 그늘진 세 번째 오르막에 도전해야 했다. 오랫동안 단련하지 않은 근육 때문에, 또 맞바람 때문에 속도가 더뎠다. 하지만 상쾌한 기분으로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피곤한 줄도 몰랐다. 영원히 등반을 계속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_「몬테베리타」(338쪽)
지금 쳐다보지 마
새
호위선
눈 깜짝할 사이
낯선 당신, 다시 입 맞춰 줘요
푸른 렌즈
성모상
경솔한 말
몬테베리타
옮긴이의 말―일상과 일상 너머의 이야기
대프니 듀 모리에 연보
■ 대프니 듀 모리에(Daphne du Maurier, 1907~1989)
‘서스펜스의 여왕’ ‘최고의 이야기꾼’으로 칭송받는 20세기 영국의 가장 대중적인 작가 중 한 명. 듀 모리에의 작품들은 현재까지 50차례나 영화 혹은 드라마로 옮겨졌는데 스릴러의 제왕 히치콕이 연출한 『레베카』『자메이카 여인숙』「새」와 영국 영화 최고 걸작 중 한 편으로 언급되는 니컬러스 뢰그 연출의 「지금 쳐다보지 마」는 특히 유명하다. 저명한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나 문화적 세례를 듬뿍 받으며 자란 듀 모리에는 십 대 때부터 책 읽기와 글쓰기에 몰두했으며 이십 대 초반에 첫 장편소설 『사랑하는 영혼』을 발표하여 호평을 받았다. 이후 미국 도서판매상 협회에서 선정하는 전미도서상을 수상했고 영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소설 15위에 오른 『레베카』를 비롯해 『자메이카 여인숙』『사촌 레이철』『프렌치맨 크릭』『헝그리 힐』 등 듀 모리에 특유의 이야기와 서스펜스가 결합된 걸작들을 잇달아 내놓았다. 소설, 논픽션, 희곡 분야에서 그녀의 글쓰기는 만년까지 쭉 이어졌고 30권이 훌쩍 넘는 작품들을 세상에 내놓았다. 듀 모리에가 자신의 상상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분야는 바로 단편소설이다. 공포와 서스펜스가 절묘하게 결합된 그녀의 단편들은 캐릭터 구축과 상상력, 암시적인 은유, 시대를 앞선 상황 설정 등을 통해 이 분야의 고전적인 단편들로 현재 인정받고 있다. 1969년 대프리 듀 모리에는 문학적 공헌을 인정받아 남자의 기사 작위에 해당하는 데임 작위를 받았고 1977년에는 미국 미스터리 작가 협회로부터 그랜드 마스터상을 받았다. 1989년, 81세를 일기로 그녀의 수많은 작품의 무대가 되었던 콘월의 자택에서 사망했다.
■ 옮긴이_ 이상원
서울대학교 가정관리학과, 서울대학교대학원 소비자아동학과, 노어노문학과 및 한국외대 통역번역대학원 한국어-노어과를 졸업했다. 현재 전문 통번역가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레베카』『유린되고 타버린 모든 것』『아버지와 아들』『프리메이슨』『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독서의 탄생』『콘택트』『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등 80여 권의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 저서로 『서울대 인문학 글쓰기 강의』가 있다.
대프니 듀 모리에는 20세기 중반 이후 만개한 대중문화와 현대적인 상상력의 정초를 닦은 작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앨프리드 히치콕의 영원한 뮤즈로 불리는 그녀가 쓴 작품들은 50차례 이상 영화와 드라마 등으로 옮겨졌다. 히치콕이 연출해 오스카상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한 『레베카』, 니컬러스 뢰그가 연출한 「지금 쳐다보지 마」는 영국이 만들어 낸 최고의 영화 중 한 편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이 외에도 「새」『자메이카 여인숙』 등 수많은 작품이 스크린으로 옮겨져 듀 모리에에게 불멸의 명성을 안겨 주었다.
듀 모리에는 직접적인 내러티브와 ‘옛날 스타일’의 소설들을 썼다. 사랑과 판타지, 모험, 미스터리 등을 소재로 한 것들로 대중의 욕망과 꿈을 작품에 담으며 듀 모리에는 광범위한 독자층을 확보했다. 그녀가 일급 스토리텔러라는 점은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으나 두 차례 세계대전의 참화를 겪고 난 뒤 동시대의 진지한 작가들은 전쟁, 소외, 종교, 가난, 마르크시즘, 심리학, 예술 등의 주제에 천착했다. 이런 흐름 가운데 역사와 서스펜스에 천착한 듀 모리에의 이야기들은 평론가들로부터 의구심의 대상이 되었다. 브론테 자매의 문학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듀 모리에는 스스로를 제인 오스틴의 소설들로부터 유래한 ‘로맨스 소설가’로 정의했다. 하지만 로맨스 소설이라고 선언했음에도 듀 모리에의 소설에는 예외적인 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해피엔드가 없다. 그리고 그녀의 로맨스 소설의 강력한 또 하나의 특징은 서스펜스를 문학에 도입했다는 것이다. 초자연적이고 초일상적인 요소의 도입은 그녀의 작품을 로맨스 소설의 전통과는 거리를 두게 한다. 오늘날까지도 현대적인 고딕 로맨스의 최고봉으로 자리 잡고 있는 듀 모리에의 대표작 『레베카』는 심리적 사실주의 기법으로 작품의 깊이를 확보하고 있는데 이후 단편소설들을 통해 듀 모리에는 그녀의 악몽과도 같은 무시무시한 상상력을 아무런 제약 없이 자유자재로 펼쳐 놓는다. 듀 모리에는 등장인물과 상상력이 살아 있고 암시적인 은유가 들어 있는 장르의 일급 작품들을 발표함으로써 그녀를 스토리텔러로만 평가해 왔던 세간의 평론가들에게 ‘진정한 문학’의 모든 기준을 만족시켰다고 평가받았다.
일상과 꿈의 경계처럼 듀 모리에 단편의 요소들은 느닷없고 엉뚱하기까지 하다. 유령이나 악령 등 인간의 공포를 자극하는 직접적인 대상이 나오지 않음에도 악몽처럼 섬뜩한데, 듀 모리에의 서스펜스는 단순히 상황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정교한 내러티브를 통해 발생한다. 수수께끼의 두 자매를 바라보는 현대적인 평범한 남자가 자신의 이성에도 불구하고 악몽과도 같은 상황에 빠지게 되어 버리는 「지금 쳐다보지 마」나 눈 수술을 받은 환자의 시력이 과연 수술의 의도대로 원상회복될 수 있는지를 조마조마하게 지켜보게 만드는, 그리고 수술 이후에 발생하는 상황이 과연 수술의 실패인지, 또 다른 악몽의 개입인지 독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푸른 렌즈」, 교양 있는 부인이 어떤 논리적인 전개 과정도 없이 타임 슬립을 통해 엉뚱한 시간 속에 던져지는 「눈 깜짝할 사이」에서는 자신의 정체가 사라져 버리는 최악의 악몽이 현실이 될지, 아니면 이 악몽에서 다시 깨어나 현실로 돌아갈 수 있을지, 독자들은 듀 모리에가 펼쳐 놓는 기상천외한 이야기들을 통해 백주대낮에 가위눌리는 악몽을 경험하게 된다.
듀 모리에의 단편들은 독자들에게 놀람과 공포를 안겨 주기 위해 만들어진 단순한 스릴러, 미스터리가 아니다. 이 서스펜스 가득한 단편들은 텍스트 안에 강박성, 성적 지배, 인간의 정체성, 억압된 자아의 해방에 대한 심원하고도 매혹적인 연구를 담고 있다. 인간의 본질에 대한 심리적 사실주의 기법으로 듀 모리에는 일급 스토리텔러이자, 서스펜스의 귀재이면서 동시에 현대적인 상상력을 깊이 있게 천착한 진지한 작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 준다.
문화의 중심지 런던에서 태어났으나 듀 모리에는 결혼 이후 평생을 남서쪽의 해안 반도 콘월에서 지냈다. 작품의 성공으로 명예와 부를 한 몸에 지니게 되었지만 그녀는 철저하게 은둔 생활을 관철했다. 영국 왕실로부터 데임 칭호를 받을 때도 수락을 할지 말지 고민했으며 자식들도 듀 모리에에게 그런 영예가 주어지리라는 사실을 신문 보도를 보고 알았을 정도였다. 언론과의 인터뷰도 극구 피하며 듀 모리에는 평생 동안 35권에 달하는 책을 펴냈다. 그녀가 직접 각색한 『레베카』를 비롯해 세 편의 희곡은 런던에서만 1,200회가 넘는 공연을 기록하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녀가 작가 생활 후반에 발표한 수많은 논픽션 또한 대부분 호평을 받았다. 지금 현재도 그녀의 작품들은 드라마, 영화, 라디오 드라마, 뮤지컬로 각색되고 있다. 대프니 듀 모리에는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창작에 전념했고 장르를 뛰어넘어 그녀가 생산한 작품 대부분은 그 탁월함을 대중적, 비평적으로 공히 인정받고 있다.
이 책에 실린 9편의 단편들은 New York Review Books Classics에서 펴낸 대프니 듀 모리에 선집에 실린 작품이다. 처녀 단편집을 비롯해 그녀의 나이 일흔이 넘어서 발표했던 작품집에 이르기까지 듀 모리에의 대표적인 작품이 시대별로 골고루 들어 있다. 표제작인 「지금 쳐다보지 마」를 비롯해 히치콕의 영화로 유명한 「새」, 헤르만 헤세의 작품들로도 익숙한 이상적인 공동체의 이미지를 그린 「몬테베리타」, 인상적인 하룻밤을 묘지에서 보내고 사라진 수수께끼의 매혹적인 여인의 이야기인 「낯선 당신, 다시 입 맞춰 줘요」, 일상과 광기의 접점이 종이 한 장 차이임을 경쾌하게 보여 주는 「푸른 렌즈」 등 매혹적인 이야기가 그득하다. 듀 모리에의 대표작인 『레베카』가 오늘날까지도 현대적인 고딕 로맨스의 최고봉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처럼 듀 모리에의 단편들은 서스펜스 장르의 최고의 작품들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듀 모리에의 서스펜스 넘치는 단편 세계는 우리에게 영상으로 익숙했을 뿐, 활자로는 그다지 소개된 적이 없다. 이번 작품집은 히치콕 같은 뛰어난 영상 시인이 번역하기 이전에 듀 모리에가 펼쳐 놓았던 서스펜스의 원 텍스트가 어떠한 것인지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길잡이의 역할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