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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리스 (세계문학 단편선 32) Jean Rhys: The Collected Short Stories (1992)

  • 저자 진 리스 지음
  • 총서 세계문학 단편선
  • 부제 한잠 자고 나면 괜찮을 거예요, 부인 외 50편
  • 역자 정소영
  • ISBN 978-89-7275-927-0 (0
  • 출간일 2018년 09월 28일
  • 사양 600쪽 | 145*207
  • 정가 16,000원

백인 남성이 지배하는 시대에 펜으로 맞선
탈식민주의와 페미니즘 문학의 선구자, 진 리스(1890~1979)
?
?예리한 통찰력과 약자에 대한 애정으로
낡은 세계 위에 거침없이 펜을 휘두르는 작가.?
_포드 매덕스 포드

“맙소사!” 내가 큰 소리로 내뱉었다. 그러고는 너무 놀라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정말 재밌는 사람일세!” 브루스 양의 장롱이 열렸을 때 그 안에는 색색의 온갖 부드러운 실크들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모든 것들이.
중앙의 영광스러운 자리에는 정말 아름다운 색조의 빛바랜 금색 연회복이 걸려 있고, 그 곁에는 불타는 듯한 붉은색 드레스도 있었다. 검은 드레스 두 벌이 있었는데, 하나는 은빛이 약간 돌고, 다른 하나는 청록색과 파란색의 세련된 자수가 놓여 있었다. 세련된 벨트가 딸린 흑백 체크며 꽃무늬—정말 꽃무늬였다!—의 얇은 실크며 마스크까지 다 갖춘 축제용 의상, 말 그대로 온갖 색깔과 온갖 재질의 옷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던 것이다.
도벽이라도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잠깐 떠올랐으나 곧 떨쳐 냈다. 그럼 모델 일을 하나? 말도 안 돼! 모델을 하려고 수천 프랑을 들여 옷을 사는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어쨌든 여기 잠옷은 없었다.
머뭇거리며 들여다보는 중에 한쪽 구석에 있는 뚜껑 없는 상자가 눈에 띄었다. 그 안에는 작은 상자들이 가지런하게 놓여 있었다. 루즈 파시나시옹, 루즈 망다린, 루즈 앙달루즈, 몇 개의 분, 눈꺼풀에 바르는 검은 가루와 눈썹용 염료…… 막 피어나는 마농 레스코에게 어울리는 것들이었다. 없는 게 없었다. 난 황급히 문을 닫았다. 들여다보며 추측 같은 걸 할 권리는 내게 없었으니까. 하지만 추측을 했고, 알게 되었다. 다른 쪽 장롱 문을 열고 잠옷을 찾아 선반 위를 뒤지면서 확실히 알았다. 아름답고 싶다는 끝없는 갈망, 이브에게 내린 진짜 저주였던 사랑에 대한 갈구를 그럭저럭 억눌러, 그럭저럭 자각도 못 할 정도로 단정한 옷 아래에 잘 감추어 놓고는 상점 앞을 지나가는 브루스 양을.

_ 12~13쪽, 「환상」

 

문득 낭만적 여인에게 영감이 떠올랐다. 자신이 성공적이고 훌륭한 패션 아티스트인 만큼 그 역시 성공적이고 훌륭한 초상화가라고 들었다…… 분명 그도 그녀처럼 자신의 성공을 경멸하면서 더 고귀한 젊은 날의 이상을 애도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물론 그는 아주 젊긴 했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 닮은 영혼이 있는 것이다. 새벽 1시의 몽파르나스의 무도장에 삶의 공허함을 이해한 또 다른 영혼이 있는 것이다. 이해했다고! 하지만 그가 절대 그것을 표현하지 못할 것임을 알았고, 그래서 절망하는 것이다. 인공 감미료 레모네이드로 강화된 낭만적 정신은 그런 식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천천히 방을 가로질러 가서는 그의 우울한 어깨에 손을 얹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슬픈 거로군요! 정말 안됐어요! 충분히 이해해요!”
젊은이가 무거운 머리를 들어 올리고는 눈을 몇 번 깜박거렸다. 보통은 잘 하지 않는 일이지만, 토요일 밤에는 그 역시 다른 사람처럼 너그러워질 수 있었으므로 모호하게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녀를 알아보고는 눈 속에 공포심이 떠올랐고, 그는 도와줄 사람을 찾아 정신없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 말인가요!” 그가 화난 듯이 외쳤다. “전 말할 수 없이 행복한 사람이에요!”

_ 33~34쪽, 「몽파르나스 사람들과 한 여인」

 

아침은 꿈처럼 흘러갔다. 멋지게 장식된 의상실의 뒤편은 의외로 음침했다. 헷갈리는 수많은 복도와 계단들, 토끼굴이나 미로 같은 그곳은 만약 비어 있다면 우중충하고 우울했을 것이다. 도대체 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마네킹 분장실에서 그녀는 한 시간 동안 수줍게 화장을 했다. 붉은 연지로 더욱 선명해 보이는 하얀 얼굴과 하얀 팔, 시끌벅적한 목소리와 화장품 냄새, 실크 란제리가 가득한 그곳은 갸름함과 아름다움이 두드러지는 독특한 분위기였다. 거울에 비친 애나에게 차갑게 뜯어보는 시선이 꽂혔다. 그 누구도 애나를 똑바로 바라보지 않았다…… 휑하고 냉랭한 방은 그 자체로는 얼마나 우울한지, 이들 인간 꽃들에게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온실이었다. 

_ 37~38쪽, 「마네킹」

 

“뭐야, 이 자식, 침대에 누워서! 더러운 검둥이 놈! 일어나서 빨리 안 움직여!”
“많이 아파!” 아랍인이 신음했다.
울화와 짜증이 치미는지 거만한 교도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잠깐만, 내가 아픈 게 뭔지 보여 주지, 이 게을러빠진 새끼! 세상을 뭐로 보고, 기다려 봐, 이 버러지 같은 검둥이 자식, 더러운……” 발로 걷어차는 소리가 둔탁하게 들렸다. 두 번, 세 번…… 아랍인에게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더니 의자가 뒤집어지는지 요란한 쿵 소리가 났다.
“바닥에 계속 누워 있고 싶다고 했지? 그래 계속 누워 있어. 침대에는 얼씬거리지도 마, 아니면 아주 작살을 낼 테니까. 후레자식.” 감방 문이 닫히고, 징 박은 구두 소리가 복도를 울리더니 고요해졌다.
그날 밤 힘없고 가냘픈 신음 소리가 수도꼭지에서 물이 한 방울씩 떨어지듯 규칙적으로 밤새 이어지다가 동틀 무렵 그쳤다.
‘잠이 들었나 보군, 불쌍한 녀석.’ 54번이 생각했다.
7시에 침대를 검사하러 교도관이 왔을 때 시디의 감방 쪽에서 다시 요란하게 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더니 반쯤 당황하고 반쯤은 성가시다는 투의 외마디가 들렸다. “젠장, 죽었잖아, 이 검둥이!”
54번은 잘생긴 옆방 친구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경악했다. 모로코의 뜨거운 해와 형형색색의 이미지를 가득 담고 있던, 웃는 표정의 그 커다란 두 눈을 영원히 감으면서 마지막으로 본 것이 프랑스 감방의 차갑고 음울한 벽과 더럽고 지저분한 침대와 손톱이 시커먼 살진 주먹, 격분하여 벌게진 얼굴과 욕을 내뱉는 ‘기독교인’ 관리의 험한 입이었으리라 상상했다.

_ 110~111쪽, 「시디」

 

미스 버니는 아이를 다시 소리쳐 부르거나 따지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래 봐야 소용없다는 걸 알았으니까. 힘이 빠져나가고 무감각해지는 느낌이 서서히 그녀를 사로잡았다. 추위보다 더 강하게. 두려움보다 더 강하게. 이제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그런 느낌. 거의 체념과도 같은. 다른 누군가 지나간다 한들 다시 소리쳐 도움을 요청할까? 그럴 수 있을까? 냉랭한 무감각과 싸우면서 그녀는 마지막으로 몸을 움직여 보려고, 적어도 무릎의 빵 조각이라도 떨어뜨려 보려고 무진장 애를 썼다. 하루 종일 잊고 있었던 쥐에 대한 두려움이 다시 그녀를 헤집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전혀 되질 않았다.
분명히 쥐가 모습을 나타낼 구석 쪽—낡은 의자와 카펫이 놓인 구석, 건초 더미가 쌓여 있는 구석—을 눈을 부릅뜨고 쏘아보았다. 곧바로 공격을 할까, 아니면 그녀가 움직이지 못하는 게 확실해질 때까지 기다릴까? 어쨌든 조만간 나타날 것이었다. 그렇게 미스 버니는 어둠 속에서 괴물 쥐를 기다렸다.

_ 562쪽, 「한잠 자고 나면 괜찮을 거예요,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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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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