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어이 써버리는 사람’ 유선혜의 신작 시집
시집 『모텔과 나방』
유선혜 시인은 첫 시집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를 선보이며 ‘인간’이라는 존재의 허무와 고독 그리고 사랑에 대한 신선한 사유를 담은 청춘의 언어로 독자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두 번째 시집 『모텔과 나방』은 보다 시각을 넓혀, 다종다양한 사랑과 이별의 방식을 면밀히 관찰하며 그로부터 파생되는 고통과 상처, 병리적 현상까지 포착해낸다. 사회적 관계 속의 폭력과 구조적 억압에 균열하는 여성 화자의 슬픔과 결핍, 허기의 적나라한 장면들에 집중하면서 시인 특유의 철학적인 사유와 질문으로 그 깊이를 더한 시 32편을 실었다. 유년 시절 외톨이의 시간을 견디게 해준 도서관이라는 장소, 남몰래 읽은 책, 혼자만의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비로소 숨 쉴 수 있었던 날들에 대해 자문자답의 형식으로 써 내려간 에세이와, 평론가 최다영의 작품해설도 함께 수록됐다.
망해버린 꿈과 생을 구원할 깊은 사랑의 시선
오로지 인간에 대한 필사의 기록
첫 번째 시집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에서 “사랑의 잔해를 더듬”는 “영혼의 문장”(조연정)으로 많은 시 독자를 열광케 했던 유선혜 시인의 신작 시집 『모텔과 나방』은 한층 정밀해진 언어, 보다 정확한 고통에 대한 감각으로 치열한 문제의식을 보여준다.
총 4부로 구성된 『모텔과 나방』에서 특히 이목을 끄는 2부는 표제작을 포함한 ‘모텔’ 연작으로 이루어져 있다. 모텔이라는 특수한 공간을 통해 인간의 욕망과 폭력성, 내재화된 허위와 혐오 의식을 날카롭고 집요하게 재현해내고, 스스로를 빛을 등진 존재 ‘나방’으로 인식하게 하는 사회 구조를 고발한다. 한편, 결국 살아내고자 몸부림치는 인간 보편의 모습을 기록하며 모텔을 “세계의 축소판”(「모텔과 냉장고」)으로 형상화하는 데 성공한다. “인간들은 사라지기”보다 그저 “살아가기를 원하”(「모텔과 나방」)는 존재다. 따라서 “죽고 싶은 마음”(모텔과 거울)을 털어내고, “손쓸 수 없는 지경”(「모텔과 나방」)에 이른 망해버린 꿈과 생을 복원하려 매 순간 분투한다. 타버릴 걸 알면서도 빛을 향해 나아가려는 처절한 몸부림이 희망의 모색으로 읽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더불어 ‘학교’라는 무대 역시 시집에서 적잖은 비중을 차지하는 시적 공간이다. 이 일상적 장소에서 경험하는 배제와 불가해한 차별, 고요한 폭력과 부조리 속에 노출된 사회적 약자의 자리를 주지시킴으로써 가해와 피해의 모습을 정교하게 조각한다. 그렇지만 화자는 혼란과 우울 속에 매몰되거나 자기연민의 감정에 빠지지 않는다. 대신 냉정하고 치밀하게 자신만의 극복 방법과 생존 전략을 발명하며 살아갈 이유를 찾아내고 삶의 의지를 다진다는 점에서 모텔 연작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노트의 페이지마다 자살이나 종말, 지옥이란 단어를 가득 채우면서도 “너의 행복”을 비는 연대의 마음을 기억하고, 너의 “결핍을 누구보다 사랑한 사람이 나라는”(「너의 천재적인 결핍과 최초의 우울」) 전언을 보내며, 이에 “나를 견뎌줘서 고”(「나방인간」)맙다는 인사를 잊지 않는 우리는 끝까지 서로의 고통과 상처를 이해하고 보듬어줄 누군가를 기다리고, 사랑하고, 결국 구원한다. 시인이 섣불리 희망을 말하지 않으면서도, “깊고 깊은 사랑의 시선”(고명재)을 거두지 않는 태도는 오직 인간만이 인간을 ‘멸종’으로부터 구원할 유일한 가능성이라는 믿음에서 기원한다. “이러한 시적 작업이 지금 우리 시에 너무나 필요한”(최다영) 이유다.
<핀 시리즈 에세이>
‘살아 있기로 해 살아가기로 해’
활자의 세계에서 써 내려간 유년
「겉도는 물음들」은 유년 시절을 지배했던 외로움과 결핍의 기억을 차분히 풀어낸 에세이다. 또래들과 화제를 공유하지 못하고, 반 아이들 사이를 겉돌며 한없이 혼자였던 어린아이는 관계 속에서 상처받지 않기 위해 위악을 과장하고, 스스로를 단절시키는 방법으로 시간을 버틴다. 그러다 우연찮은 기회에 ‘활자들의 나라’로 미끄러져 들어간 소녀는 어느새 과시적 독서에서 벗어나 책의 포근한 냄새와 온기에 위로받고, “종이와 잉크의 비밀”에 매료되면서, 유년의 불완전한 장면들을 삶의 이유로 납득 가능하게 설명할 수 있는 용기를 얻는다. ‘살아 있기로 해. 살아가기로 해’라고 중얼거리며 꺾인 무릎에 힘을 주던 시간, 책과 글쓰기를 통해 무사히 건널 수 있었던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이 특별한 성장 서사는 비밀 일기처럼 내밀하면서도 거침없이 솔직하고, 글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 “인간의 왜 글을 쓸까?”에 전하는 빈틈없는 대답이다.
■ 추천사
‘시가 반짝반짝 빛이 났었는데, 그건 알고 보니 내 눈물이었다’ 같은 유치찬란한 말을 괜스레 해보고 싶게 한다. 별 같은 시들과 별난 우리의 ‘존재’와 ‘상처’. 죽지 않고 살아봐도 될까. 사랑할 수 있을까. 나를 ‘존재’시켜주는 무언가와 연결되고 싶은 가냘픈 마음 같은 것들. 그게 슬펐고 또 사랑스러웠다.
타버릴 수 있음에도 빛이 있다면 주저 않고 날아드는 나방같이, 우리는 두려우면서도 다시 사랑할 누군가를 끊임없이 갈망한다.
그래서 나는 이 시집을 꼭 안아주고 싶었다.
어른과 어린아이 사이의 마음으로.
그리고 사랑하고 또 사랑한다고도.. _배우 심은경
■ 본문 중에서
눈이 부시면 숨고 싶다. 나방인간은 종이를 뒤집는다. 숨고 싶어. 여기 없는 모든 것들의 목록이, 내 삶에서 퇴장한, 모든 사람과, 보고 싶은 마음과, 죽이고 싶은 마음, 퍼지는 잉크 자국이, 뒷장에 비친다.
― 「없는 것들의 목록」 부분
괜찮아,
제정신으로도 문학을 할 수 있다는 거
우리가 꼭 보여주자
― 「너의 천재적인 결핍과 최초의 우울」 부분
아직까지도
나비 괴물은 화상 입은 날개를 끌고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닌다
무한히 복제되던 내 삶의 실패들처럼
― 「준법 소년」 부분
인간들은 사라지기를 원하지 않고 조각나기를 원하지 않고 아프기를 원하지 않고 떠나기를 원하지 않고 잊히기를 원하지 않고 찢어지거나 타오르기를 원하지 않고
그냥
살아가기를 원하는 것 같아
― 「모텔과 나방」 부분
삶을 방치하는 마음으로 나를 내버려둔 시간 동안
방에서 알을 까던 초파리들에게
나는 감사했다
곁에 있어줘서…… 고마워요
― 「나방인간」 부분
너의 사람답지 않은 면이 좋아
정확히 말하면 사람다워지지 않으려는 점이
미치도록 좋아
― 「동물에 대한 다큐멘터리」 부분
너만 아는 문법으로 해석되는 문장과
어떤 사전을 뒤져도 도착할 수 없는 장면이 있어
― 「세계문학과 레모네이드」 부분
너네는 내가 조용하고 재미없는 아이로 보이겠지만 나는 버젓하고 얌전한 책들의 칸막이 뒤에서 이런 일탈을 즐기고 있다고. 나는 유치한 비밀 일기나 돌려 쓰는 여자애들의 우정 따위에는 관심 없어. 내가 속한 세계는 어른의 세계라고. 나는 너네가 어려워서 손도 못 대는 장편소설과 과학책을 읽는 사람이야. 내가 속한 세계는…… 고차원적이고 은밀하고 우아한 활자들의 나라야.
― 에세이 「겉도는 물음들」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