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은경 시집 『산책 소설』
서른일곱 번째 핀 시리즈 시집 『산책 소설』은 첫 시집 『한 사람의 불확실』에서 익숙한 세계의 낯섦을 일상적 언어로 포착해내며 주목받은 오은경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이다.
이번 시집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친밀한 일상을 산책하듯 거닐다가 문득 찾아온 낯선 감각과 이질적 상황을 객관적이고 절제된 어조로 드러내면서, 그 안에 존재하는 관계의 불투명함, 세계의 불확실함에 대해 집요하게 파고드는, 총 3부로 구성한 신작시 28편과 에세이로 묶었다.
그간 일상의 세밀한 순간들을 보이는 대로 있는 대로 바라보고 진술하는 방식, 즉 “오은경식의 사실 쌓기”(김유림)로 구체화하여, 그 현실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이 관계를 갖고 어그러지는 상태, 서로에게 침투하는 찰나를 면밀히 살펴온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도 생활 속에서 경험하고, 감지하며, 생각한 바를 담담하고 차분하게 표현하면서, 사실과 사실이 만들어내는 충돌과 미세한 균열, 거기에서 발견되는 모호한 관계성을 효과적으로 그려낸다. 또한 “사실의 연쇄, 사실임 직한 진술 문장”(김유림)의 사용과 선명한 묘사를 통해 존재하는 그대로의 사실과 그 이면, 이상의 의미를 발견해가는 과정과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행위와 감정, 사건과 인물, 자신과 관계된 모든 것들의 에너지와 방향성, 그리고 상호 영향력와 연결성에 대해 끊임없이 고찰하는 오은경의 작품들은 문득 어깨를 잡는 누군가의 “차가운 손”(「흩어진 구름」)처럼 선득하게 다가와, 현실을 환기시키는 특별한 힘을 보여준다.
핀 시리즈 공통 테마 에세이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에 붙인 에세이난은 시인의 내면을 구체적으로 심도 있게 비춰주는 하나의 독자적인 장르로, 독자들이 시인에게 한 걸음 다가서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공통 테마라는 즐거운 연결고리로 다른 에세이들과의 외연을 확장시키고 있다. 다시 말해 자신만의 고유한 정서를 드러내는 이 에세이는 독자들에게 시인 자신의 깊숙한 내면세계로의 초대라는 점에서 핀 시선만의 특징으로 꼽게 된다. 이번 볼륨의 주제 혹은 테마는 ‘대중 스타, 인물’이다.
오은경 시인의 에세이 「미끄러짐」은 청소년기에 몰입했던 패션모델 김다울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눈에 띄는 재능과 매력에 반해 적잖은 영향을 받았던 사람, 그러나 이제는 세상을 떠나 그 실재에 결코 다가설 수 없는 한 스타에 대한 오래된 기억을 더듬는다. 그에게 열렬히 마음을 주었던 이유와 시간을 밝히는 과정은 시인이 평소 추구해온 글쓰기의 지향점과 창작론으로 자연스럽게 오버랩되면서, 역으로 시인의 재능과 매력을 발견하게 해주는 독특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현대문학 × 아티스트 채지민
아티스트와의 컬래버레이션이라는 특색을 갖춰 이목을 집중시키는 핀 시리즈 시인선의 이번 시집의 표지 작품은 최근 건축적 요소를 통한 공간성 위에 인물과 상황의 어긋난 이미지 등을 초현실적으로 재구성한 화면을 보여주며, 국내외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는 채지민 작가의 작품들로 채워졌다.
▲ 본문 중에서
나는 계속 걸었다 친구의 형체가 작아 실루엣만 남은 것 같았다 개나리와
진달래는 봄에 피는 식물이었지 시간 가는 것도
계절이 바뀐 것도 모르고 있었다 나는 두꺼운 옷차림이었다 목도리를 풀었다 목도리가 바닥에 끌리면
목도리를 두르고 떠날까? 망설이기도 했다 너의 눈에도 내가
보였을까? 나는 네가 허상이라고만 생각했다 아무도 너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았으니까
―「꽃샘추위」 부분
하지만 나는 한눈을 팔았던 적도
자리를 비웠던 적도 없다 너는 차라리 벽을 닮은 듯했다 어둠이 확장되고
비늘을 주워 네게 덮었다
모서리 없이 넓은
창의 존재를 잊지 마, 네 앞에만 서면
나는 몸이 배배 꼬여 덩굴 같았다
―「카무플라주」 부분
인파 속에서
너를 찾아야 한다 네가 있어야 끝나는
게임이다 너를 데려갈 것이다 네가 누군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
이곳의 유일한 규칙이며 내게는 너를 지정할 능력과 자유가 있다 사람들
틈에서 서로 다른 차이를 분간하고 식별해내 너를
가질 것이다 어둠의 가장자리로 나는 존재해
네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오래 지나 네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순연한 눈빛일 때
내게는 너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때는」 부분
그림자를 실체라 오해할 수도 있다 그림자와 실체 사이에는 차이가 있지만
우열을 가릴 순 없다 나는 빛과 어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때로는 모든 것이 될 수 있다고……
―「강아지의 이름은」 부분
천장과 바닥이 다른 것처럼
나는 둘이 될 수 없다 말하는
나는 생각하지 않으며
보이지 않는다고
네가 집에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순간처럼
계속되던 소음이 멎어버렸다; 정적이 찾아왔다
―「잠깐 멈춤」 부분
나무의 보이지 않음, 멀어지는 네게는 안중에도 없을 네 뒤의 사람, 내가 아닌데도 자꾸만 나라고 이입하게 되는, 그러므로 너의 마음속에는 내가 없고, 나는 너 아니면
아무것도 관심 없는데, 네게서 눈을 떼기 어려운데, 너를 놓칠까봐 겁나는데, 어째서 너는 내가 아닐까(네 앞에 있던 사람이 사라졌으며…… 그렇다면 내가 목격한 자는 어디로 가버렸나)? 너는 혼자 흰 셔츠를 펄럭이면서 무얼 하는 걸까?
―「조개껍데기 가면」 부분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계기를 찾으려는데
계기보다는 용기, 용기보다는 한 번의 선택이 해결책이다
너는 나보다 이 공간에 대해 잘 파악하는 상황 아닌가, 두려움의 실체는 장소가 아니라 너라는 대상인 것이 밝혀진다
나는 네게 통제되고 있다고 느낀다 흰 블라우스가 나를 저지하는 벽의 일종이라고
날카로워진다
―「트랩」 부분
나는 오늘 김다울에 대해 상상해보고 싶다. 그녀가 걸었을 복잡한 도시와 도로 위의 크고 작은 차들, 따스한 햇빛과 바람, 카페와 공원에서의 한가로운 시간 같은 것을 떠올린다. 작은 에스프레소 잔이 철제 테이블 위에 놓여 있고 깨끗이 비워진 접시와 나이프 같은 것이 보인다. 빠르게 스쳐 지나갔을 일상의 풍경은 그때나 지금이나 어디에든 있다. 우리는 모두 텅 빈 표정으로 아무 생각도 없이(마치 잠을 잘 때 그 시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시간을 보낼 때가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고 잃어버린 시간이다.
상상에는 제약이 없다. 상상이 가능하다면 사람들은 모든 서사를 동원해서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지만 내가 좋아하는 상상은 그런 종류가 아니다. 나에게는 모두가 익명의 얼굴로 물질의 물질성을 체험하는 시간이 중요하고 언제든 다시 경험할 수 있는 가능성만이 상상이고 그러한 것 같다.
―에세이 「미끄러짐」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