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을 잇고 문학을 조명하는 <현대문학 핀 시리즈>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한국 문학 시리즈인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 마흔두 번째 시집, 이혜미의 『흉터 쿠키』 를 출간한다.
몽환적인 감수성으로 감각적인 시세계를 펼쳐온 이혜미 시인의 네 번째 저작인 이번 시집에는 시간 속에서 우리가 “비슷한 각도로 기울 수 있다면 좋겠”다는 시인의 소망이 담긴 시들이 실려 있다. 시간과 경험에 덧대져 따뜻하고 풍부한 시선으로 모욕과 슬픔을 관통해 독자들을 위로하는, 깊이 있는 관찰과 강렬한 묘사와 상처받은 내면을 회복하는 아름다운 시 30편과 에세이가 담긴 시집이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 VOL. Ⅶ』은 오은경, 박상수, 장수진, 이근화, 서효인 그리고 이혜미 시인으로 마무리된다. 여섯 시인의 다양한 감수성으로 무한하고 다채로운 한국 시 문학의 목소리를 만나볼 수 있는 시리즈이다.
이혜미 시집 『흉터 쿠키』
이혜미 시인의 『흉터 쿠키』는 커피로 시작해서 도넛으로 끝나는 독창적인 시집이다. 향긋한 커피 한 잔과 달콤한 도넛으로 아침을 시작하듯, 그의 시편들은 우리의 무뎌진 감각을 나지막한 목소리로 깨운다. 시집에는 자신이 누구인지 온전히 알기 위해 겪어내야 했던 결핍으로 생긴 텅 빈 자리를 매만지는 따뜻한 시적 언어들이 가득하다.
시 속 화자는 과거의 기억을 이불처럼 걷어 툭툭 털어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을 마주하고 힘없이 쏟아지는 낱말과 바스라지는 영혼을 느낄 때면 “무늬목처럼 서서히” “가짜 마음”이 부풀어 오른다.(「라파이티」) 아물지 않는 상처는 현실과 꿈의 경계에서 “통증으로부터 흘러나와//점차 흉터가 되어”간다.(「흉터 쿠키」) 고통의 근원을 직시하고 집요한 태도로 마음을 돌보면서 점차 “흉터의 안쪽까지 도달하”(「스크래치」)게 되고 생생한 감정을 거침없는 언어로 풀어낸다.
시인은 “시는 상처보다 흉터에 가깝다”고 이야기하며 상처받은 마음을 회복하는 과정을 특유의 감수성과 밀도 높은 언어로 그렸다. 비대한 슬픔에 침몰하지 않고 상처가 아물어 흉터가 되는 순간 시인에게서 아름다운 언어들로 옷 입혀진 시인의 문장은 아픈 자리를 오래 쓰다듬어 분노하고 좌절했다가 그 구멍마저 사랑하게 되는, 삶을 향한 독백이자 기꺼이 결핍을 끌어안는 목소리다.
핀 시리즈 공통 테마 에세이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에 붙인 에세이는, 시인의 내면 읽기와 다름없는 하나의 독자적인 장르로 출발한다. 이로써 독자들이 시를 통해서만 느꼈던 시인의 내밀한 세계를 좀 더 구체적이고 심도 있게 다가설 수 있게 해준다. 나아가 이 에세이가 ‘공통 테마’라는 특별한 연결고리로 시인들의 자유로운 사유공간의 외연을 확장시키고 자신만의 고유한 정서를 서로 다른 색채로, 서로 다른 개성으로 보여주는, 깊숙한 내면으로의 초대라는 점은 핀 시인선에서만 볼 수 있는 매혹적인 부분이다.
이혜미 시인은 원고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한 가수의 콘서트에 간 날을 회상하면서 “시를 지면에 실을 때마다 무대 위에 올라서는” 듯한 감정을 고백한다. 머리를 삭발하고 높은 의자에 위태롭게 앉아 있던 가수는 관객들 앞에서 “잊혀지고 싶지 않아요” 하고 힘겹게 입을 연다. 작업의 단면을 잘라 자신을 끊임없이 평가하는 사람들 앞에서도 그가 노래를 지속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시인은 그의 콘서트를 떠올리며 단어와 단어를 이어붙일 때 그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자신의 시간을 느낀다. 종이에 글자들을 한 자 한 자 부려놓을 때마다 실패할지도 모르는 노래를 불러야 하는 가수처럼 그는 몰아치는 바람을 견디며 홀로 서 있다. 시인에게 시를 쓰는 행위는 모욕과 슬픔을 관통하는 용기이자 나지막한 노래가 된다. 창작에 대한 열망과 집요한 믿음은 한 편의 시가 탄생하기까지 견뎌야 하는 고독과 고통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현대문학 × 아티스트 채지민
아티스트와의 컬래버레이션이라는 특색을 갖춰 이목을 집중시키는 핀 시리즈 시인선의 이번 시집의 표지 작품은 최근 건축적 요소를 통한 공간성 위에 인물과 상황의 어긋난 이미지 등을 초현실적으로 재구성한 화면을 보여주며, 국내외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는 채지민 작가의 작품들로 채워졌다.
▲ 본문 중에서
버려진 영수증을 주워 펼치면 음용 시 주의사항이 작은 글씨로 적혀 있었지 ; 오늘의 감정에는 오늘의 책임이 필요합니다
―「원테이크」 부분
쿠키를 찍어내고 남은 반죽을
쿠키라 할 수 있을까
뺨을 맞고
얼굴에 생긴 구멍이 사라지지 않을 때
슬픔이 새겨진 자리를
잘 구워진 어둠이라 불렀지
―「흉터 쿠키」 부분
저녁을 선물 받은 그림자처럼
희박해진 몸을 털고
전생을 기념하는 이상한 박물관에서
비대한 슬픔이 우리를 기다린다
―「전생기념관」 부분
계속할 것이다. 모욕과 슬픔을 관통하며 걸어가 더 환한 생각들을 만나야지. 잊혀지고 싶지 않으니까. 어떤 이의 목소리는 듣는 자에게 스며들어 새롭게 나아갈 용기를 준다. 능란한 노래보다는 나지막하고 쓸쓸한 고백의 힘으로.
― 에세이「흰 페이지를 열고 무대 위로 나아가」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