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중에서
당신이 원한다면
식당의 문을 계속 열어둘게요
언제라도 돌아와
이 노래 속에서
잠들 수 있도록
노래를 멈추지 않을게요
―「가수의 공연이 있는 밤의 식당」 부분
서점이었다
나라별로 책이 정리되어 있었고
책장에 느슨하게 기대어
책을 읽는 사람들이 있었다
다 외국어 사전이었다
밤이 오면 서점은
펼쳐진 상자가 되어
어두운 일기들을 쏟아낼 것이다
―「작은 걸리버로부터」 부분
“더 푹신하고 부드럽고 기분 좋은 것을 줄게. 마음대로 가지고 놀아. 늙어 죽을 때까지.”
아이가 떠난 자리엔 구겨진 기분이 남겨져 있었다. 아이는 늘 아이에게 버려졌다. 좋은 어른이 되기 위해 그렇게 교육받았다.
―「성장」 부분
달고 부드러운 충만감, 흔들리는 보트에서 잠이 들었다. 풍경이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부모님의 별장과 순한 개와 친구들도 사라졌다. 나의 작은 마을은 잠든 내게 고요한 작별을 고했다. 다시 마을이 서고 약국과 병원이 들어서는 동안 나는 비천한 어른이 되어 있었다.
―「작은 인간」 부분
잠에 빠지면, 시간 공장의 불이 켜진다. 컨베이어벨트를 타고 꿈은 흐르고. 봉급도 있다지. 매일 아침을 모으면 1년이 되고 10년이 되고. 다 모으면 죽음이 된다지. 성실한 시간 공장의 근로자는 잠을 자면서 죽게 된다지. 공장장의 전언이다. 영원한 잠이 가장 명예로운 퇴직일 것이다.
―「밤은 옛날의 공장」 부분
수직으로 자라던 꽃을
무덤에 눕힌다
볕은
침묵을 침해하지 않는다
―「볕의 자율성」 부분
아니 나는 살아 있고
살아 있어 아직 그래
날씨가 추워
부길아
밥은 먹었냐
양말 두꺼운 거 신고 아무튼
나도 이따가 죽을 거 같은데
여보세요 부길아
팥빵 좀 사 갈까 너 당뇨 저기
―「띄엄띄엄 말하기」 부분
나의 발레는 총 검 쇠
내 허벅지는 수많은 무기를 지녔지
쏘지 않고 베지 않으며
녹슬지 않는 능력을
―「나의 발레는 총 검 쇠」 부분
그런 내게 술과 오디션을 동시에 권하거나, 연인들이나 함께 할 법한 드라이브 코스를 일정에 넣거나, 무불노동을 시키고 밥 대신 술을 사며 스킨십을 시도하는 어른들을 만나는 것도 나의 일이었다. 그들에게 혐오를 감추며 일을 뺀 나머지를 거부하는 것도, 폭력을 폭력이 아닌 실수로 둔갑시켜 상대가 민망하지 않게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주는 것도, 거절을 거절이 아닌 방식으로 표현하는 불가능한 언어를 발명하는 것도 나의 일이었다. 실패하면 얼마나 순식간에 “거지 같은 년 ”으로 전락하게 되는지 경험하는 것마저도 나의 일이었다.
일과 일 같지 않은 것을 오가며, 미성년도 성년도 아닌 채로 나는 어른들의 세계에 편입되어갔다. 그때 만난 그 많은 어른들 중 ‘ 한국의 가난한 어린 여자 ’를 편견 없이, 한 인간으로 존중해주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을 나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그 시절, 나쁜 어른도 좋은 어른도 아닌, ‘이상한 어른 ’을 만난 기억은 오래도록 나를 사로잡았다.
―에세이 「어떤 코트」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