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을 잇고 문학을 조명하는 <현대문학 핀 시리즈>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한국 문학 시리즈인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 마흔다섯 번째 시집으로 정재율의 『온다는 믿음』을 출간한다. 2019년, “어긋남과 예기치 못”함, ‘서투름과 과감함 사이를 지나가는 감각’(신용목)으로 호평을 받으며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이다.
「은하철도 999」에서 영원한 삶을 꿈꾸었던 나무인간 모리키 씨를 입체적으로 형상화해 애니메이션의 장면들을 환상동화처럼 그려낸 이번 시집에는, 호명되지 못하는 존재들의 마음을 구석구석 살피는 시 22편과 카메라에 찍힌 사진들이 제기하는 현전에 대한 질문들을 떠올리며 실재했던 시간의 나를 되찾아가는 기쁨을 이야기한 에세이 「필름 카메라―사진」이 실려 있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 VOL. Ⅷ』은 기 출간된 김승일, 정현우, 정재율에 이어 이영주, 서대경, 유희경 시인의 개성을 담은 시집을 선보일 예정이다. 젊고 세련된 감각으로 한국 시 문학이 지닌 진폭을 담아내는 이번 시리즈는 영국 현대미술의 거장이자 개념미술의 선구자 마이클 크레이그-마틴의 표지 작업과 함께해 예술의 지평을 넓혀간다.
정재율 시집 『온다는 믿음』
<현대문학 핀 시리즈> 마흔다섯 번째 시집 『온다는 믿음』의 화자는 “혼자 걷고, 혼자 찾고, 혼자 계속해 기록하는 사람”(김연덕)이다. 시 속의 화자는 특별한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주인공이 되지는 못하지만, 묵묵히 세계를 바라보고 자신이 느낀 것을 담담하게 풀어나간다. 화자는 모리키 씨에 관한 이야기에 상상을 덧붙여 일상을 더욱 신비롭고 아름답게 전한다. 기계가 모든 것을 대체하는 세계에서 가장 값싼 자재인 나무 몸을 지닌 모리키 씨 또한 이야기 밖으로 밀려난 존재다. 시인은 화자와 모리키 씨를 통해 인간과 영원, 사랑에 대해 말하며 우리 안에 내재한 “어떤 강력한 믿음”(정재율)을 마주하길 소망한다.
나무인간 모리키 씨는 “완벽한 기계인간”이 되기를 꿈꾸지만 “오직 인간만이 모든 인류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열차를 가로막은 전기버섯을 제거하고 죽는다(「모리키 씨는 어디로 갔을까」). 그러나 그의 희생에도 “밖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깜깜”하고 열차는 멈추지 않고 앞을 향해 달려간다(「그래도 열차는 멈추지 않고」). 시 속의 화자는 죽은 자가 산 자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실은 “산 자가 죽은 자를 따라가기 위해”(「온다는 믿음 1」) 그를 부단히 괴롭히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죽은 자는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산 자의 곁을 계속 맴돌면서 함께 종착역을 향해 가는 것이다. 이는 죽음 이후 남겨진 사람들이 죽은 자들을 추억하는 방식으로 이어진다. 추모 자리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화음”을 맞추며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한 아이가 갑자기 달려와 “이렇게 와주셔서 정말 기쁘다고” 환영해주기도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자리의 의미는 축하 자리인지 추모 자리인지 희미해져가지만, 화자는 “무언가를 심어보려고”(「나무들의 합장」) 새로운 길을 계속해서 찾아 나선다.
이처럼 정재율의 시편에는 떠난 이를 배웅하며 각자의 자리에서 굳건하고 안전해지길 바라는 마음이 가득하다. 시인은 『온다는 믿음』을 통해 “모두들 자기 자신에게 맞게 좌석을 앞뒤로 조절해보”(「객실」)면서 각자의 종착역에 잘 도착하기를 바라는 따뜻한 마음을 전한다.
핀 시리즈 공통 테마 <에세이>_‘반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에 붙인 에세이는, 시인의 내면 읽기와 다름없는 하나의 독자적인 장르로 출발한다. 이로써 독자들이 시를 통해서만 느꼈던 시인의 내밀한 세계를 좀 더 구체적이고 심도 있게 다가설 수 있게 해준다. 나아가 이 에세이가 ‘공통 테마’라는 특별한 연결고리로 시인들의 자유로운 사유공간의 외연을 확장시키고 자신만의 고유한 정서를 서로 다른 색채로, 서로 다른 개성으로 보여주는, 깊숙한 내면으로의 초대라는 점은 핀 시인선에서만 볼 수 있는 매혹적인 부분이다. 새로운 감각으로 여섯 시인이 풀어나가는 이번 볼륨의 에세이 주제는 ‘반려’다.
정재율 시인은 에세이 「필름 카메라 사진」에서 부모님이 물려준 필름 카메라에 대해 이야기하며 자신의 시론을 독특하고 세밀한 방식으로 쌓아나간다. 그는 사진을 포착한 순간 프레임 안에 담기는 장면이 아닌, 프레임 바깥에 있는 것들을 떠올릴 때 더 먼 세계에 다다를 수 있다고 말한다.
시인에게 사진은 “서랍 안쪽에 숨어 있는” 것이며 “과거와 현재의 순간이 겹쳐지는” 장면이다. 서랍에서 인화된 사진을 꺼내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는 시인은 “잘 버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고 이야기하지만, 소망과 다르게 추억이 담긴 물건들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 물건들이 제자리에 있을 때 비로소 안정감을 느끼기에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조차 구분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기도 한다. 과거와 현재가 혼재하는 공간 속에서 시인은 자신이 쌓아 올린 추억을 시라는 형태로 재탄생시킨다.
시인에게 시와 사진은 “프레임 안에 철학”이나 과거의 한 장면을 담을 수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그래서 그는 사진과 마찬가지로 시를 읽을 때 “종종 이상한 기분에 휩싸”인다. 에세이를 통해 온갖 시간과 장면들 속에서 말없이 견디는 나무인간과 같은 시인의 면모를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 본문 중에서
사랑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사랑을 말하기엔 나는 너무 어리석은 신이라서 모래를 털고 살아난 사람들을 구경했다
―「해변에서」 부분
어둠 속에서는 유난히 더 어두운 곳이 있었고 열차가 그곳을 지날 땐 모리키 씨의 마지막처럼 반짝하고 빛이 났다 그가 내게 마지막으로 안부를 건네듯 그래도 열차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달렸다
―「그래도 열차는 멈추지 않고」 부분
완벽한 기계인간이 되고 싶었어 그러면 영원히 살 수 있을 것만 같았거든
나무인간의 말이었다
―「모리키 씨는 어디로 갔을까」 부분
사람들은 죽은 자가 산 자를 괴롭힌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산 자가 죽은 자를 따라가기 위해 괴롭히는 것이라고 죽은 자는 그걸 안 이상 산 자의 곁에서 영원히 떠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라고 모리키 씨가 말해준 것처럼 그가 우주를 유영하기 위해서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가만히 손을 쥐고 있어야만 했다
―「온다는 믿음 1」 부분
정말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모든 게 너무 쉽게 타버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사진은 태우는 것이 아니라고, 사람의 형체와 영혼이 깃든 것은 함부로 태우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 에세이「필름 카메라―사진」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