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을 잇고 문학을 조명하는 <현대문학 핀 시리즈>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한국 문학 시리즈인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 마흔네 번째 시집인 정현우의 『소멸하는 밤』을 출간한다. 2015년 등단(『조선일보』 신춘문예) 이후, 첫 시집 『나는 천사에게 말을 배웠지』(2021) 이후 2년 만에 내놓은 신작 시집이다. (이미 가수로 먼저 이름을 알린 시인이다.)
정현우의 『소멸하는 밤』은 생명을 지닌 존재들의 죽음과, 실패하기 마련인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슬픈 찬가이자 비가라고 할 수 있는 시 41편과, 사랑하던 존재들과의 이별을 환상동화처럼 그린 삶과 죽음의 신비로운 이중주라고 할 수 있는 에세이 「슬픔의 반려」를 붙였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 VOL. Ⅷ』은 정현우를 비롯해 김승일, 정재율, 이영주, 서대경, 유희경 시인의 개성을 담은 시집을 선보인다. 여섯 시인의 다양한 감수성으로 무한하고 다채로운 한국 시 문학의 목소리를 만나볼 수 있는 시리즈이다. 이번 시리즈는 영국 현대미술의 거장이자 개념미술의 선구자 마이클 크레이그-마틴의 작업과 함께해 예술의 지평을 넓혀간다.
정현우 시집 『소멸하는 밤』
<현대문학 핀 시리즈> 마흔네 번째 시집 『소멸하는 밤』은 세련된 이미지의 서정성으로 주목받은 정현우 시인의 2년 만의 신작이다. “혼돈의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영혼들의 상처를 위로하는 비가”(이병률)라는 호평을 받은 첫 시집에 이어 이번 시집에서는 상실로 인한 빈자리를 “지친 몸과 더듬거리는 마음으로 누벼가며” 슬픔을 통해서 해답을 찾는 사유의 힘을 보여준다.
시 속의 화자는 누군가의 죽음으로 인한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를 외면하면서 파편처럼 부서진 삶을 살아간다. 화자는 떠난 사람을 애도하며 “방심과 외면에 대한 죄”를 깨닫고 “모든 슬픔이 완벽하게 애도될 수 없다는 진실을 마주하게”(임지훈) 된다. 화자가 속한 세계는 “이 겨울 숲에 살아 있는 것은 없”(「반딧불이의 노래」 부분)을 만큼 황폐하고 참혹한 공간이다. 그에게는 ‘작은 소녀’가 되어 꿈에 나타난 엄마뿐만 아니라 생생하게 피어난 꽃과 곡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잠자리도 애도의 대상이다. 모든 존재는 소멸하고, “사라지는 것은 여백을 증명하”(「기일」 부분)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사물을 바라보든 “마음의 뒤편은 늘/멍빛으로 젖어”(「수국」 부분), 그의 일부였으나 이미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그리워한다. 그의 마음에는 알면서도 짐짓 모르는 척했던 과거의 기억들이 산재해 있다. 아물지 않은 상처는 죄의식으로 뒤덮여 상실의 슬픔은 완전히 메꿔지지도, 산산이 부서지지도 않는다. “‘슬픔’은, 이 메꿔질 수도 없고 산산이 부서질 수도 없는 한 사람의 삶을 기워나가는 유일한 방식”이라는 임지훈 평론가의 표현처럼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하기 전까지” 그 어떤 이야기도 시작되지 않는다(「프리즘」 부분).
“너는/첫눈으로 휘갈겨 쓴 편지”(「너는 모른다」 부분)처럼 잠시 머물다가 떠났지만, “어떤 슬픔은 머무르는 그대로 우리를 살게”(「소멸하는 밤」 부분) 한다. 마주한 빈자리에서 울리는 독백은 존재론적인 성찰을 담은 방백으로 점차 나아간다. “눈부신 칼이 부드러운 고백이 될 때까지”(「스튜의 역사」 부분) “용서받지 못한 나를 이해”(「파종」 부분)하기 위한 따뜻한 시선과 애도가 곳곳에 스며 있다.
“소멸이라는 뜻은 ‘사라져 없어짐’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에너지가 합쳐져 다른 형태의 에너지를 내보내는 의미”도 있다고 말하는 정현우 시인은 이번 시집을 통해 ‘소멸’ ‘죽음’ ‘사랑’의 이미지를 다채롭게 구현하며 특유의 감수성과 섬세한 언어로 시적 성취를 이뤄내고 있다.
핀 시리즈 공통 테마 <에세이>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에 붙인 에세이는, 시인의 내면 읽기와 다름없는 하나의 독자적인 장르로 출발한다. 이로써 독자들이 시를 통해서만 느꼈던 시인의 내밀한 세계를 좀 더 구체적이고 심도 있게 다가설 수 있게 해준다. 나아가 이 에세이가 ‘공통 테마’라는 특별한 연결고리로 시인들의 자유로운 사유공간의 외연을 확장시키고 자신만의 고유한 정서를 서로 다른 색채로, 서로 다른 개성으로 보여주는, 깊숙한 내면으로의 초대라는 점은 핀 시인선에서만 볼 수 있는 매혹적인 부분이다. 새로운 감각으로 여섯 시인이 풀어나가는 이번 볼륨의 에세이 주제는 ‘반려’다.
정현우 시인의 에세이 「슬픔의 반려」는 첫눈이 오던 날 고양이 묘묘를 안고 말없이 걸었던 장면으로 시작된다. 아버지는 묘묘를 내다버리라고 했지만, 시인은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어 고양이를 품에 안은 채 길거리를 내달린다. 묘묘를 묻던 밤, 그는 “모든 슬픔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말하던 할머니의 죽음을 회상한다.
죽음에 관한 경험은 영혼과 사후 세계에 대한 궁금증으로 확장되어, 어린 그를 교회로 이끈다. 그는 성경에서 전하는 말씀과 상반된 행위를 하는 성도들을 뒤로 하고 고양이에게도 영혼이 있는지 고민한다. “사람이 죽으면 꽃이나 풀 혹은 나비 아니면 고양이 같은 것으로 다시 세상에 온다”고 믿었던 시인은 묘묘가 실은 증조할머니일 수도 있겠다는 마음을 품는다. 묘묘를 묻던 밤, 꿈속에서 할머니와 고양이가 함께 눈 덮인 길을 걸어가는 것을 보고 할머니와 묘묘를 힘껏 끌어안는다.
시인은 어린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삶과 죽음, 영혼을 중첩시키며 소멸하는 존재를 환상 동화처럼 그려낸다. 시인이 사랑하던 존재를 애도하는 방식과 재회에 대한 갈망은 그의 시세계의 원천을 들여다보게 한다. 내면의 슬픔이 층층이 쌓여 한층 견고한 감정의 지층을 형성하는 따뜻한 에세이다.
현대문학 × 아티스트 마이 클 크레이그-마틴
아티스트와의 컬래버레이션으로 독창적인 시선집을 선보이는 이 핀 시리즈 시인선의 이번 시집은 개념미술의 시초인 마르셀 뒤샹(1887-1968)의 정신을 이어받아 ‘1세대 개념미술가’로 활동해온 영국 현대미술의 거장 마이클 크레이그-마틴의 작품과 함께 어우러진 만나보기 어려운 귀한 시선이라고 할 수 있다.
▲ 본문 중에서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의 추모는 내가 할 수 없어서 나는 슬퍼야 합니까.
―「소멸하는 밤」 부분
천사는 아직 내게 남은 것들을 물었다.
우리라는 알 수 없는 꿈들이
이목구비가 사라진 얼굴들이 무너지고 있었다.
―「오브제」 부분
네가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하기 전까지
이 이야기는 시작되지 않는다.
―「프리즘」 부분
나는 눈보라 치는 너의 숲으로 들어간다.
두 손 가득 흰 눈을 퍼 올리고
아른거리는 것을 망설인다.
손바닥으로 햇살을 가리면 울음이 만져진다.
―「몫」 부분
하늘을 뒤덮은 폭설 위에 집을 짓고, 강수가 차오르면 무엇이 나를 대신할까,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 투명한 얼음 편지, 달아나는 유리의 빛, 빛에 쓸려가는 우리의 시간.
―「유리 숲」 부분
아주 가끔씩 나는 꿈을 꾼다. 나의 고양이와 할머니가 눈을 밟고 있는 소리가 들리고, 부를수록 저만치 멀리 먼저 가버리는, 그리고 와락 그것들을 껴안아보는 꿈을. 이 꿈을 지키려 자꾸 눈 감는 겨울을.
― 에세이「슬픔의 반려」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