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중에서
내가 여기 살아남은 건 여기가 좋아서가 아니라 아직 이곳이 저를 죽이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그래도 나는 아직 있어요 나날이 가벼워지고 있어요
―「월동 준비」 부분
오래 헤매는 마음으로 시내까지 나가서 아무나 떠나는 사람을 배웅하고 돌아오면 불을 끄고 벽에 기대어 선잠을 잤다 (……) 몸을 떨며 사랑했던 것들을 무대 위로 올리는 밤, 그 많은 것들이 전부 사람의 얼굴이어서 나는 어느 쪽으로도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안개 숲」 부분
아이야, 나는 네가 웃기를 바라지만 네가 찾는 산호 조각은 여기 없을 거야, 가장 작은 등과 무릎으로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갈 수 없겠지, 아니 갈 수 있겠지 흔들려도 갈 수 있기도 하겠지, 숨 쉬어 철제 의자에 묶인 진공 속에서, 숨 쉬어 조금 부족한 공기 속에서, 언제나 조금 부족한, 살아 있다는 기분.
―「무호흡」 부분
언제든 밀려날 수 있는 한 줌의 사람, 너는 한 줌의 사람으로서 간청한다 너는 한 줌의 사람으로서 쓸개를 내놓고 애원한다 너는 한 줌의 사람으로서 네가 얼마나 불행한 한 줌인지 증명하려다가 알게 된다 네가 마침내 뼛속까지 그렇게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한 줌의 사람」 부분
어떤 일은 그냥 일어나기도 하는 거니까, 그 일들이 너를 미워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니까, 이제 너를 아프게 하는 것으로 세상을 벌주려 하지 말아, 올겨울에는 연탄난로 곁에서 같이 얼린 홍시를 나눠 먹어야지
―「어떤 일은 그냥 일어나기도 하지」 부분
너에게 나는 다하지 못한 마음, 꽉 차올랐지만 더 채울 수 없어서 슬픈, 우린 절대 없는 것으로 서로를 그리워하지 말자, 없어진 것, 없는 사람, 없는 마음, 평생 그것을 생각하며 뒤에 남는 사람이 되지 않기로 하자, 한 사람에게 다하지 못한 마음, 다했는데도 끝내 그리워지는 이 마음과,―「다하지 못한 마음」 부분
여기 남기로 선택해서 너의 목소리는 이야기가 된 거야, 여전히 너는 어둡고, 마침내 실패했고, 실패한 것은 작은 사건일 뿐 눈을 가리는 진실은 아닌 거라고, 내가 여기 있을게 올드팝이 흘러나오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생각으로 흘러가겠지만, 이제 우리 이 긴 겨울을 같이 흘러가자 오각형으로 팔각형으로, 꺾어지고 굽혀지다가 다른 세계와 섞이고 가늘어지고 결정이 되고 눈발이 되어서 다 잊어버린 사람들의 머리 위로 조금씩 흩날리기로 하자 웬 검은 눈이 내린다고, 아주 긴 오지의 시간여행을 해온 눈이라고, 사람들은 입술을 모으겠지만 볼주머니에 도토리 열 개는 집어넣은 다람쥐의 마음으로 울지도 웃지도 않으면서 내가 너의 목소리에 목소리를 덧댈게 너를 절대 혼잣말로 두지는 않을게
―「들어줄게 너의 이야기를」 부분
어쩔 수 없는 실패, 그 이후에도 삶이 있음을 증명해내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때에도 조금 울겠지. 그러나 훨씬 담담하게 울 수 있게 되겠지. 시를 통해 여성의 목소리로 말할 수 있게 되면서 비로소 온전한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더 자유롭게 나를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더 자주 울고, 더 자주 나의 취약함과 연약함을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누군가 나의 시를 읽고 여기 ‘진정한 여성’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할 말이 없다. 왜 당사자도 아니면서 여성의 목소리를 빼앗느냐고 묻는다면 더더욱 대답할 말이 없다. 다만, 적어도 나는 시를 쓸 때, 비로소 진짜 나 같았다, 라는 말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화자는 쉽게 사랑받을 수 없는 말투와 생각과 행동을 가졌지만 그것 또한 나다. 나는 조금씩 내 안의 여성성을 찾아서 움직여왔다고 생각한다. 그 여성성은 내 안의 생명력이었다고 믿는다. 실패를 반복하지만 실패 이후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이어나가는 주동우를 생각하며, 그녀가 연기한 인물들을 기억하며 나는 내 안의 여성성과 함께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만들어나가고 싶다.
―에세이 「나의 디바 주동우」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