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끝내 썩지 않는 날것,
그 독하고 정한 마음에 대하여
시집 『생 마음』
전작들을 통해 천진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인간/비인간 존재들을 살피며 깊은 애정과 연민을 보여주었던 김복희 시인은 이번 신작 시집 『생 마음』에서도 환상적이고 기묘한 존재들, 그리고 그들/그것들에 깃든 마음에 주목한다. 특히 민담과 설화, 민요와 타령, 속담 등의 고전적 서사를 빌려 와 현실과 환상, 현재와 과거, 있음과 없음, 영혼과 육체,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탐색하는 과정은 색다른 시적 공간과 정황을 건축하며, 나와 타자, 사회와 현실의 관계를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해준다. 인간으로서 감내해야 하는 근원적 고독과 허기, 생존의 갈망, 소외되고 아픈 존재의 슬픔과 비애를 들여다보면서 소통과 위로를 모색하는 신작시 35편과 에세이가 실렸다.
총 4부로 구성된 시집 1부의 첫 장, 시인은 도깨비라는 친숙하고도 기묘한 존재를 등장시켜 미지의 세계 속으로 안내한다. 그 외에도 ‘새’ ‘두더지’ ‘귀신’ ‘범 아이’ 등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찾아오는 것들”(「하느님 부처님 외로운 선생님」)과 동행하면서 생과 사의 가운데, 무릇 인간 됨의 진정한 의미를 고민하며, “독하지만 정한”(「생 마음」) 마음들을 백지 위에 그려 보여준다. 2부는 호랑이 설화를 바탕으로 한 에세이다. 사람으로 살고자 호랑이로 변신했으나 종내 다시 사람의 모습을 찾지 못하게 된 자의 욕망과 아이러니를 다룬다. 3부에는 타령과 설화를 모티프로 삼아 사회적, 역사적, 종교적 상상력을 확장해가며 일상의 ‘여기’에서 “아름다운 것”(「까마귀 고기」)들을 찾아가는 시편들이 담겼다. 4부에서 시인은 요정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하는 양을 순하게 지켜본다. 아이들의 꿈에서만이라도 “햇빛 고루 들게 하느라”(「크리스마스 요정」) 분주한 요정의 마음을 읽는 일은 시인이 지향하는 바를 짐작게 해주는 다정한 노래에 가닿는다.
가볍지 않은 주제와 비극적 장면들을 특유의 유머와 호흡, 리듬감으로 한판의 놀이처럼 풀어내며 독특한 활력을 불어넣는 시인의 역량은 이번 시집에서도 어김없이 발휘된다. “몸 없는 이들의 존재를 느끼는 감성과 직관력”(김기택)으로, 인간은 아니나 마음을 지닌 짐승, 도깨비, 요정 등 수많은 경계의 존재들을 알아보고 불러내는 시인은 그 가공되지 않은 생명력을 통해 도리어 인간 내부의 들끓는 감정, 생생한 진짜 마음을 마주하게 하는 것이다. 존재의 물성과 관계없이, 오랜 고통 속에서도 끝내 썩지 않는 날것의 진심, 생의 의지를 증명하고, “희망을 되살리기 위해 담담히 애쓰”(박상수)는 시인의 단단한 문장들은 지극한 미적 체험을 선사한다.
고전 설화로 빚어낸 슬픔의 서사시
에세이 「환절, 호랑이 사람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기록」은 ‘호랑이가 된 남편’ 설화를 바탕으로 한다. 어머니의 병환을 호전시키는 데 필요한 개 백 마리를 잡기 위해 호랑이로 변신한 남편이 꼭 하루를 앞두고 저간의 사정을 모두 알게 된 아내로 인하여 부적을 잃고, 사람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는 이야기다. 시인은 변사와 같은 이야기의 전달자로 분해 때로는 능청스럽고 구성지게 때로는 기구한 사연에 안타깝게 공감하며,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어머니에게 효를 행하려는 선한 마음은 살생을 필요로 하기에 남편의 행동은 결국 아내와 어머니의 목숨까지 앗아 가는 비극을 잉태하고 만다. 사람이었던 호랑이는 인간일까, 아니면 그저 짐승에 불과한 것일까. 개를 죽일 때 남편을 움직인 것은 사람의 효심이었을까 호랑이의 본능였을까, 긴 장시처럼 읽히기도 하는 이 글은 씁쓸한 결말과 함께 깊은 여운을 남기며 인간 존재와 마음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남긴다.
■ 추천사
『생 마음』에는 “껍질과 과육을 분리할 수 없”고, “내부와 외부를 구별하지 않는” 마음이 있다. (……) 있는 그대로의 마음은, 즉 “생 마음”은 달콤하지만은 않다. 김복희의 세계가 언제나 좀 쌉쌀한 맛의 영역이기는 했지만 이번엔 더더욱 쓰고 독하다고 썼다. 안과 겉의 구분이 없는 날것인 마음을 보여주기. _시인 임유영, 「발문」 중에서
■ 본문 중에서
온갖 괴로움 다 당하고 괴로움인 줄 모르고
지나가다 문득 누워 다시 일어나지 않으면
돼요
이루어진 거예요
사람 되셨어요
― 「하느님 부처님 외로운 선생님」 부분
아 이 마음은 등을 돌리고 누워
나를 안아주지 않고
거의 나에게 안긴 듯
나를 재우려고 한다
(...)
넌 죽고 싶은 마음이 아니야 아니야 너는
그냥 마음이야
― 「두더지 땅굴 파듯」 부분
머리칼은 얼마나 힘이 센가
죽은 채로도
죽지 않고
산 채로
산 것 아닌
나의 무거운 뿔을 감추어주는
(…)
어린 짐승들 다 재우는
어린 짐승의 심장 뛰는 소리
피 도는 소리
들으며 먼지를 다시 모으는
죽일 힘을 풀어헤쳐
― 「쑥대머리」 부분
온통 당신 앞에
아무것도 아닌 채
있으려고 가는
남은 것 있어
빛이 내리니 너무 아파서
손차양을 만든다
당신은 자꾸
손 좀 내려보라고 한다
오늘따라 볕이 부드럽다고
내 표정 좀 보자고
― 「가죽을 남김」 부분
새 아이였는데
널 닮지 않았고
냄새도 나
자라날 텐데 더럽고 아픈 채로
오잖아 너만을 엄마로 부르잖아
기회가 온 거야
―「새 아이」 부분
아 이 마음
백지에 놓기 위해
백지부터 만들기로 한다
처음부터 내 손으로 할 일
내 땀 내 피로 할 일
필요한 것
티끌 없는 오전
진솔 속옷 진솔 양말
온갖 말 가르쳐준 이들
생각처럼 들어와
피도 땀도 함께 흘려주는 것
(……)
백지를 가리키며
말을 배우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넌지시 보여줄 수도 있으리라
생마음은 독하지만 정한 것이라고
―「생 마음」 부분
오늘 본 아름다운 것,
뒷머리가 일어선
내 두 손바닥만 한 새 한 마리,
꼭 까치집 지은 것처럼
늦잠 자서 머리가 붕 뜬
첫사랑처럼
싫어지지가 않네
저런 건
― 「까마귀 고기」 부분
아이 잃은 부모들 꿈에
아무것도 나오지 않게
아이가 나오더라도
깨지 못한 채
울더라도
햇빛 고루 들게 하느라
아이의 표정 희미해
눈물 없이 울 때
대신 기억해주느라
―「크리스마스 요정」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