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환 작품세계의 근간을 이루는 철학적 사유와의 만남!
세계적인 현대미술의 거장이자 ‘그리지 않는 그림’의 철학자 이우환의 신작 에세이 『양의의 표현』을 출간한다. 월간 『현대문학』에서 2018년 10월부터 2021년 8월까지 연재한 글들을 주축으로, 저자가 틈틈이 메모해온 단상과 외국에서의 강연 원고, 60년대 말부터 집필한 미발표 원고 등을 함께 담은, 이우환 작품세계의 근간을 이루는 사유를 집대성한 글모음이다.
무한에 대한 끝없는 호기심과 여백의 탐구, 존재와 삶 그리고 죽음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통해 인간과 세계에 존재하는 무한한 미지성과 양의성을 보여주는 이번 저작은 2002년 펴낸 첫 에세이 『여백의 예술』, 2009년 『시간의 여울』에 이은 세 번째 에세이집이다.
『양의의 표현』에 수록된 64여 편의 글은 총 다섯 개의 장으로 나뉘어 있다. 제1장은 작업의 주변이나 일상생활에서 자극받은 것에 대한 문장들을 모아놓았고, 제2장은 작가로서의 제작 입장을 둘러싼 논술, 제3장은 미술가의 상념이나 예술에 관한 견해, 제4장은 저자의 미술운동과의 관계나 원시시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미술의 있음새에 대한 조망, 제5장은 다양한 아티스트와 그들의 작업을 통해 알게 된 것에 대한 탐색을 주제로 하고 있다.
한 예술가로서 작품관이나 예술관과는 결을 달리한 정감 있는 글로 손꼽을 수 있는, 작고한 이건희 회장을 기리는 추모글 「거인은 있었다」 와 단색파의 거장 김창렬, 정창섭과 보낸 한나절을 그린 「어떤 우정」 은 작가들이 어떻게 자신의 예술을 지향했는가를 보여주는 에피소드나 숨겨진 사연들이 소개돼 있어 아주 흥미롭다. 예술에 남다른 열정과 식견을 갖추었던 이건희 회장의 예술가적 면모를 발견케 해주고, 단색화 화가들을 통해 예술가의 마음속 심연에 들끓는 억누를 수 없는 광기와 영적인 정념을 엿보게 하는, 예술의 정신을 발견하게 해주는 값진 글이다.
더불어 예리한 분석력과 통찰력, 지성미 넘치는 사유 방식으로 예술사의 의미 있는 작업들을 기민하게 포착하여 그 성취와 가치에 대해 엄준한 비평과 객관적 비판의 시선을 담고 있기에, 『양의의 표현』은 동서양과 신구를 아우르는 예술론, 작가론을 펼친 미술평론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모노파 운동과 단색화, 그 시작과 이론적 토대, 여러 작가들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들은 물론이고, 예술에 대한 근원적인 고민에서부터 최근 주목받고 있는 AI나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19 팬데믹에 대한 다각적인 시선에 이르기까지 사회, 문화, 역사, 환경 등 시의성 있는 주제를 통해 우리의 현재를 돌아보고 성찰한다. 동시에 이우환의 예술 활동을 언어로 체계화한 작업이자 그의 작품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설을 겸하며, 우리 시대의 예술가 이우환에 한 걸음 더 다가가는 단초를 제공하고 있어 실로 즐거운 독서 경험을 전해준다.
저자는 『양의의 표현』을 통해 인간의 심연에서부터 예술의 미지에 이르기까지 예사롭지 않은 지혜와 통찰의 문을 열며, 또 한 번 다른 세계로의 열림을 예고한다. 우리 시대 한 지성이자 세계의 정상에 오른 예술가의 시선, 철학과 가치의 외연을 넓혀가는 혜안으로, 예술가 정신을 견지하면서 비로소 깨우친 예술가적 삶의 정수가 행간마다 빛나는 에세이집이다.
■ 차례
I
초봄 잡목림의 하늘 / 파편의 창 / 잡념 예찬 / 나의 작은 책상 / 아기의 웃는 얼굴, 사자死者의 미소 / 기다림에 대하여 / 표현으로서의 침묵 / 무의식에 대하여 / 억눌려 있는 것 / 물리학에 대한 우문 /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메시지 / 틀어박힘의 저편 / 위인의 길 / 조부의 기억 / 거인이 있었다—이건희 회장을 기리며
II
나의 제작의 입장 / 열리는 차원Open Dimension / 1970년대에 출발하여 / 여백 현상의 회화 / 하얀 캔버스 / 열리는 회화 / 열린 조각—만남의 메타포 / 무한의 문—베르사유 프로젝트 /집, 방, 공간—Chez Le Corbusier와의 대화 내적인 구조를 넘어서
III
데생에 부쳐 / 얼떨결의 발견 / 예술가의 토포스 / 골똘한 자들 / 예술가의 이중성 / 회화 제작의 두 가지 입장 / 인공지능과 예술가 지휘자에 대하여 / 대상과 물物이라는 언어 / AI에 대한 생각 / AI와 렘브란트, 그리고 초상화 / 문명과 문화 / AI형의 비평가 / 가짜 비평 / 이데올로기의 환상
IV
모노파—외부성의 수용의 표현 / 단색화에 대하여 / 미지와의 대화—젊은 예술가들에게 / 현대미술—이 묵시적인 것 / 현대미술의 사진을 보면서—표현과 작자의 정체성 / 지역성을 넘어서 / 라스코동굴 / 스톤헨지 / 이집트에서 온 소식 / 교토의 정원 / 조선의 백자에 대하여
V
「모나리자」 송頌 / 렘브란트의 자화상 / 셋슈이문雪舟異聞—「추동산수도」의 「겨울 그림」과 「혜가단비도」를 둘러싸고 / 겸재의 회화 / 카지미르 말레비치—만화경과 같은 카타르시스 / 보는 것에 대하여—메를로퐁티를 기리며 / 뒤샹과 보이스 사이에서 / 카라얀의 지휘 / 리처드 세라 / 어떤 우정—김창열과 정창섭의 경우 / 아트의 경이—애니시 카푸어에 대하여 / 세키네 노부오를 기리며—「위상-대지」 또는 세키네 노부오의 출현 / 안자이 시게오—70년대 또는 외부성의 시좌
저자 후기
역자 후기
지은이 : 이우환
미술가. 1936년 경남 함안 출생. 1956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중퇴 후 도일. 1961년 니혼대학 철학과 졸업. 일 본 전위예술 운동인 ‘모노파’를 이끌었음. 파리비엔날레, 카셀도쿠멘타, 베니스비엔날레 등 국제전에 출품. 파리 죄드폼국립미술관, 서울 삼성미술관 리움,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등 국내외 중요 미술관에서 개인전. 2010년 나오시마 이우환미술관, 2015년 부산시립미술관 ‘이우환 공간’, 2019년 디아 비콘 ‘이우환 코너’가 마련됨. 전 파리 에콜데보자르 초빙교수, 현 도쿄 다마미술대학 명예교수.
<호암상 예술상> <세계문화상 회화상>(일본) <금관문화 훈장> 등 수상.
작품집으로 『LEE UFAN』(美術出版社 및 都市出判, 일본), 『Lee Ufan』(ACTES SUD, 프랑스) 외 다수. 저서로 『만남을 찾아서』(학고재), 에세이집 『여백의 예술』 『시간의 여울』, 대담집 『양의의 예술』, 시집 『멈춰 서서』(이상 현대문학)를 비롯해 영역판 『The Art of Encounter, Lee Ufan』 (Lisson Gallery London) 과 불역판 『L’art de la résonance Lee Ufan』(Beaux-arts de Paris éditions) 등이 있다.
옮긴이 : 성혜경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일본 도쿄대학에서 박사 과정(비교문학?비교문화) 수료. 니혼대학 조교수를 거쳐 현재 서울여자대학교 일어일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 일본의 전통 연극인 노能를 중심으로 동서양의 문학 및 문화 교류에 대해 연구하고 있음. 일본어 저서 『西洋の 夢幻能』(河出書房新社)로 <산토리 학예상> <일본비교문학회상> 수상. 저서 『異國への憧憬と祖國への回歸』(공저, 明治書院), 『비교문학자가 본 일본, 일본인』(공저, 현대문학), 『번역과 문학의 지평』(공저, 박문사) 등과 역서 『멈춰 서서』(현대문학) 『여자의 말』(달아실)이 있다.
■ 저자의 말
나는 표현의 결과물보다는 글 쓰는 일 자체, 만드는 일 자체의 터트림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것이 삶의 영위의 빛나는 현장성이기 때문이다. 쓰인 것이 세계인 것이 아니라, 그것은 쓰이지 않은 것을 향한 호소이다. 그리고 이 대응의 펼쳐짐이 살아 있는 여백 현상을 불러오기를 바란다. 이 스탠스가 표현을 끊임없이 미지로 이끌며, 보다 열린 것으로 만들어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저자 후기」 중에서
■ 추천의 말
『양의의 표현』이 일본에서 출간되었을 때 이 책을 소개하는 글에 “저자는 가슴속의 정열을 언어화할 줄 아는 특출 난 능력의 소유자” 라며 “진정한 예술가의 감각 그 자체를 체감할 수 있는 귀중한 책”이라고 쓰여 있었던 것이 생각난다. 이우환의 작품세계는 물론이고, 예술가 이우환을 만나는 것은 이 책을 읽는 묘미 중 하나라 하겠다.
―성혜경, 「역자 후기」 중에서
■ 본문 중에서
나의 작품이 보여주는 침묵의 성격은 아마도 비인간적인 것이리라. 그것은 작품이 특정한 소재나 방법의 구사는 물론이거니와 역시 발상의 근간이 자연이나 외부와의 관계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인간의 말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나 인간 이외의 소리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싶다. 그것도 귀에 전해지거나 눈에 비치는 소리나 색채와 형태를 뛰어넘어 광대한 우주에 가득 찬 울리지 않는 소리, 들리지 않는 말과 만나고 싶은 것이다.
아마도 음악가의 궁극적인 관심은 음의 저편에 있을 것이다. 나의 관심도 이와 비슷하다. 그림을 통해 말로 할 수 없는 것, 보이지 않는 것의 차원을 열어가고 싶다. 나의 작품의 파장은 아직 인간의 말의 영역에서 멀지 않다.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침묵의 저편은 멀고도 깊다. (45쪽)
작품은 끊임없이 삶을 이어간다. 제작이 끝나도 내부와 외부가 서로 대응하는 짜임새로 기능하고 아슬아슬한 텐션을 일으킨다. 그것은 어디에 어떻게 놓이느냐에 따라 새롭게 태어난다. 작품의 대응성의 바탕에 있는 것이 근원적인 양의성이며, 거기에서 작품의 다이너미즘이나 초월성이 발휘되는 것이다.(98쪽)
살아 있는 인간은 끊임없이 무의식과 함께 있으며, 타자와의 관계로 변화하며 다시 태어난다. 바꿔 말하자면, 인간은 세계와의 무한한 관계성 속에서 살아가는 생물인 것이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세계의 불투명함, 미지성을 메울 수는 없다. 그것들은 존재가 아닌 관계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내가 자기 자신이나 공동체를 지양하고 타자와의 대화와 교류에 중점을 두는 것은, 표현이 관계에 의한 탄생이며 비약이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술은 매개의 산물이며, 세계와의 경이로운 만남인 것이다. (109쪽)
여백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른바 유有가 무無와 서로 관계하고 반응하여, 거기서 생기는 장 場의 힘의 현상인 것이다. 대상을 장에 녹여 넣고, 그 공간을 볼 수 있도록 하는 것, 다시 말하면 대상의 유를 무로 하여 장을 부각시키는 행위—. 그 터트림이 여백으로서 퍼져 나간다. 그러므로 여기서 회화란, 장이 열리는 여백 현상을 가리킨다. 회화는 이쪽의 건넴에 의해 외계와 공명하는 파장이며, 대상을 넘은 초월의 퍼짐새의 발로인 것이다. 내가 회화에서 바라는 것은, 의미나 개념의 제시 이상으로 그것들을 빛나게 하고 생생하게 만드는 하나의 경이적인 장이 열리는 것이다. 이 여백 현상의 향연이 있음으로써 비로소 회화의 내용이 산다. 그려진 대상의 확인이나 의미를 해독하는 것은 그 후여도 좋은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그림을 보는 것의 시작은 눈길에 의한 화면과의 만남이다. 화면에 일어나고 있는 판 벌임에, 보는 이 또한 반향하며 파문을 넓혀가렷다. (116-117쪽)
나의 견해로는 예술작품이란 하나의 제시이지 탐구의 결과물은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순으로 가득 찬 산 존재임을 깨닫는다. 작품은 외부와의 관계나 신체를 매개로 한 제작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다는 말이다. 물론 나는 심사숙고하며 제작에 임하지만 그럼에도 도중에 상황적인 것이 작용하거나, 얼떨결에 마음의 변화가 생기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의식에 떠밀려 자기 자신을 벗어난 표현이 나올 때가 있다. 표현이 안과 밖에 걸친 신체 행위 속에서 의지를 깨부수고 탈선할 때, 그곳에 경이의 눈이 반짝이느냐 않느냐다.
아트에는 당연히 주장이 있고 콘텍스트가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비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방향을 되돌리게 되는데 어느샌가 또 탈선을 허용한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가는 끊임없이 위험한 다리를 오가는 숙명을 짊어지고 있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예술가의 자의성은 자유로운 상상력을 암시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불가해함과 그 미래를 대변하는 사항이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177쪽)
나는 그림을 그릴 때처럼 조용한 터트림을 오히려 선호한다. 하지만 표현에서 배어나오는 것은 세계와의 직접적인 만남이나 신체적 교류에 의한 생생한 리얼리티였으면 한다. 한창 표현 작업에 몰두해 있을 때의 행위는 외부나 무의식의 작용으로 본질이나 제도에서 밀려 나온다.
그리고 그 어떠한 표현이라 하더라도 시대적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으며 제도나 환경을 완전히 무효화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러한 사실 자체가 표현이 순수하다거나 전지전능할 수는 없는 것임을 말해준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요해사항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될 수 없다. 또한 그것이 일방통행으로 읽어내는 텍스트가 된다면 재미없을 뿐만 아니라 결코 바람직한 모습이라고도 할 수 없다. 작품은 아티스트의 적극적인 작용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 하더라도 시대나 상황적 제약에 더해 외부나 타자와 자극적으로 관계 맺음으로써 자신의 로고스를 뛰어넘는 것이 된다. 부언하자면 자기를 한정하고 남을 받아들이는 마음가짐과 구조에 의해 작품은 내부와 외부의 양의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아티스트는 창조주가 아니라 양쪽을 끊고 잇는 매개자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작품은 결코 자신의 표상이 아닌 세계와의 관계 작용에 의한 살아 있는 매개라는 것이다. (351-35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