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속의 에튀드 Etüden im Schnee (2014)
- 저자 다와다 요코 지음
- 역자 최윤영
- ISBN 978-89-7275-973-7
- 출간일 2020년 06월 30일
- 사양 440쪽 | 124*195
- 정가 15,000원
언어와 언어 사이를 줄타기하며
인식의 세계를 항상 낯설게 하는 작가,
다와다 요코의 새로운 대표작
★ 2011년 제64회 노마문예상 수상작
★ 2016년 클라이스트상 수상작
★ 2017년 여성을 위한 워릭상 번역부문 수상작
책 속으로 ●
얼어붙은 땅이 녹고 질척거리며 징징거린다. 간지러운 콧구멍에서 콧물이 벌거벗은 달팽이처럼 기어 나온다. 눈물이 눈 주위의 부어오른 점막 피부에서 흘러나온다. 한마디로 말해서 봄은 슬픔의 계절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봄이 그들을 더 젊게 만들어 준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더 젊어지는 사람은 유년 시절로 돌아가는 것이고 그것은 그를 아프게 만든다. 그 회의에서 의견을 첫 번째로 말한 존재가 나라는 것이 자랑스러워 한동안은 기분이 최상이었다. 나는 내가 어떤 연유로 이렇게 손을 빨리 움직이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는 지식에 대한 갈증이 없었다. 지식이라는 이미 엎질러진 우유를 잔에 다시 담고 싶지도 않았다. 아주 달콤한 우유 향내가 식탁보에서 풍겨 나왔고 나는 나의 봄에 대해서 울어 버렸다. 유년 시절이, 쓴 꿀맛이 내 혀를 찔렀다. 내게 음식을 장만해 준 사람은 언제나 이반이었다. 나는 엄마에 대한 기억이 없다. 엄마는 어디로 가 버린 것일까?
_ 23~24쪽, 「제1장 할머니의 진화론」에서
이반이 불쑥 내 옆에 서서 내가 쓴 글을 위에서 내려다보았다. ‘이반, 요즘 어떻게 지내? 그동안 어떻게 지냈느냐고?’ 나는 그에게 이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그러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내가 숨을 여러 번 깊이 들이쉬고 내쉬는 동안 이반의 모습은 아무 기척도 없이 사라졌다. 그는 내가 잘 알고 있는 몸의 온기와 피부 위의 가벼운 간지러움을 남기고 사라졌다. 나는 보통 때처럼 숨을 쉬는 것이 힘들어졌다. 이반은 오랫동안 내게는 죽은 사람이었다가 내가 그에 대한 글을 썼기 때문에 다시 삶의 세계로 불려 왔다. […]
_ 28~29쪽, 「제1장 할머니의 진화론」에서
자서전을 쓴다는 것은 이상한 느낌을 준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주로 의견을 외부에 전달하기 위해서 언어를 사용했다. 이제 언어는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 안에 있는 부드러운 부분을 건드린다. 마치 내가 뭔가 금지된 것을 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것에 대해 부끄러웠고 누군가가 내 삶의 이야기를 읽기 원치 않았다. 그러나 나는 글자들이 종이 위에 무성해지는 것을 보았고 그것을 누군가에게 보이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
_ 36쪽, 「제1장 할머니의 진화론」에서
나는 인정해야만 한다. 작가가 됨으로써 바로 그 때문에 내 인생이 달라졌다는 것을.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가 나를 가지고 뭘 만든 것이 아니라 내가 쓴 문장들이 나를 가지고 작가로 만들었고 그것은 아직 이야기의 끝이 아니다. 어떤 결과는 다른 결과를 낳는다. 그리고 나는 그 이전에는 있는 줄도 전혀 몰랐던 어떤 장소로 떠밀려 갔다. 글을 쓴다는 것은 굴러가는 공 위에서 춤을 추는 것보다 더 위험한 곡예라 할 수 있다. 공 위에서 춤을 추는 것은 뼈를 깎는 힘든 노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실 나는 공 위에서 춤을 추다가 뼈를 부러뜨린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결국 나는 목표를 달성했다. 나는 결국 내가 굴러가는 물체 위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다는 데 확신을 갖게 되었지만 글을 쓰는 것에 대해서는 똑같이 이야기할 수 없다. 글을 쓰면 그 공은 어디로 굴러갈까? 이 공은 똑바로 굴러서는 안 된다. 그러면 공은 무대 아래로 굴러떨어질 것이다. 내 공은 나 자신의 축을 따라 구르면서도 동시에 무대의 중앙 주위를 굴러가야 했다. 마치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것처럼 말이다.
_ 58~59쪽, 「제1장 할머니의 진화론」에서
인생에서 우리는 선택권이 없다. 삶이라는 것에 비추어 보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착각하는 만큼 그렇게 많지는 않다. 그러나 이 얼마 안 되는 것조차도 백 퍼센트로 자신 있게 해낼 수 없다면 우리는 살아남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기본 원칙은 풍요 사회에서 응석받이로 편하게 살아가는 젊은 사람들에게도 그다지 다를 것이 없다.
_ 62쪽, 「제1장 할머니의 진화론」에서
‘춥다’라는 특성을 가진 말들은 얼마나 매력적인가. 나는 추운 데 갈 수만 있다면 모든 걸 감내할 수 있었다. 얼음 여왕의 아름다움. 소름이 돋는다는 기분. 얼음처럼 차가운 진실. 또 손발이 차가워지는 용감한 곡예. 모든 경쟁자들을 창백하게 만들고 얼어붙게 하는 재능. 고드름처럼 아주 날카롭게 갈린 이성. 차가움의 영역이란 이렇게 정말 넓다. “캐나다가 정말 그렇게 추워?”― “응, 그곳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추워.” 나는 건물의 외벽이 투명한 유리로 된, 얼어 버린 도시에 대한 꿈을 꾸었다. 자동차 대신 거리에 연어들이 헤엄쳐 다니는 도시 말이다.
_ 83쪽, 「제1장 할머니의 진화론」에서
[…] “이건 같은 작가가 쓴 다른 책이에요. 이 작가는 동물의 시각에서 이야기를 몇 편 썼답니다.” 우리의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뭔가가 혼란스러운 것 같았다. “제 말은 이 문학은 문학으로서 값어치가 있다는 것이지, 소수자의 시각에서 써서 그렇다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원래 주인공은 한 번도 동물인 적이 없어요. 동물이 동물 아닌 것으로 변신하거나 인간이 인간 아닌 것으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기억이 상실되고, 바로 이 상실 자체가 주인공이니까요.” […]
_ 90쪽, 「제1장 할머니의 진화론」에서
[…] “그렇지만 내가 그 과정에서 독일어를 배울 수 있잖아. 나는 독일어로 글을 쓸 거야. 그러면 너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잖아. 더 이상 번역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안 돼, 그건 안 될 말이야! 모국어로 글을 써. 그리고 너의 영혼을 털어놓으란 말이야.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그렇게 되어야 돼!”―“내 모국어가 뭔데?”―“너희 엄마의 말.”―“난 엄마랑 이야기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어.”―“엄마는 엄마지. 한 번도 이야기해 본 적이 없어도 말이야.”―“엄마는 러시아어를 못 했을 것 같은데.”―“네 엄마는 이반이야. 그걸 잊었단 말이야? 엄마가 여성이어야 하는 시대는 벌써 지나갔다고!”
나는 혼란스러워졌다. 왜냐하면 볼프강은 거짓말 냄새를 풍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지금 자기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를 믿을 수가 없었다. 내게 러시아어를 강요하는 것은 틀림없이 그의 보스의 생각이리라. 그러면 번역자는 내 글을 자기들의 정치적 취향에 맞도록 구부릴 수 있으니까. 벌은 꽃의 즙을 꿀로 변하게 만들 수 있다. 그 즙 자체가 이미 달콤하지만 꿀이 가진 강력하고 깊은 맛은, 곤충 몸 안에서 나오는 구역질 나는 액체가 가세해 시작되는 발효의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생겨난다. 이러한 지식은 ‘양봉의 미래’라는 주제의 회의에서 얻어 온 자료에서 나온 것이다. 볼프강과 그의 친구들은 그들 몸의 액체를 나의 자서전과 섞어서 그것으로 다른 작품을 만들고 싶은 것이리라. 이러한 위험에서 벗어나려면 나는 글을 독일어로 바로 써야 했다. 제목도 이번에는 내가 직접 달아야 했다.
_ 93~94쪽, 「제1장 할머니의 진화론」에서
자연은 인간에게 그 어떤 권리를 부여할 수 없다. 권리는 자연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가 말했다. “사람들이 인권을 가지고 싶다면 그럼 동물들에게는 동물권을 주어야 해. 그렇지만 그렇게 되면 내가 어제 고기 먹은 것을 뭐라고 정당화할 수 있을까? 나는 이런 문제를 끝까지 생각할 정도로 용기가 있는 사람은 아니야. 형이 채식주의자가 되기는 했지만 말이야.” 그의 시선은 내가 대답하기를 요구하고 있었다. “나는 채식주의자가 될 수 없어”라고 나는 재빨리 대답했다. 비록 내가 조상들이나 먼 친척들이 고기를 안 먹고도 잘 살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말이다. 그들은 주로 채소와 과일을 먹고 살았지만 아주 드물게는 가재나 생선도 먹었다. 나는 자본주의와 육식이라는 주제에 대해 열렸던 회의 생각도 났다. 그때 나는 다른 동물들을 왜 죽이는가라는 질문을 받았었다. 대답을 할 수 없었다.
_ 99~100쪽, 「제1장 할머니의 진화론」에서
얼음처럼 차가운 나라를 향한 동경이 사그라지지 않았지만 내게는 예상치 못한 걱정이 하나 생겼다. 처음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가 점점 더 그렇게 되었는데 바로 내가 이제 영어를 배워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의문이 그것이었다. 그럼 내가 열심히 독일어를 배운 것이 헛일이 될까? 여러 언어가 동시에 내 삶에 대해 쓰는 일이 나를 헷갈리게 만들지 않기를 바랐다. 그다음 떠오른 의문은 첫 번째보다 더 위험해 보였다. 내가 종이 위에 쓴 것은 이제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확고한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세계에서 나를 기다리는 사건들은 어떠할지? 나는 인생이 흘러가는 속도에 맞추어 매번 새로운 외국어를 배울 수는 없다. 사라질 수 있는 것은 예컨대 ‘나’라는 이름을 가졌다. 죽는다는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때까지는 나에게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었다. 하지만 자서전을 쓰면서부터 불쑥 공포가 생겨났다. 내가 내 인생에 대해 끝까지 쓰기도 전에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 말이다,
_ 117~118쪽, 「제1장 할머니의 진화론」에서
나는 토스카의 고통이 상상되자 괴로워졌다. 그리고 생각했다. ‘무대예술가의 삶이란 얼마나 불쌍한가!’라고. 예술가가 되는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가에 상관없이 관객들은 오로지 공연에 따라서만 판단을 내린다. 예술가가 아주 유명해지고 어떤 작가가 전기를 써 주지 않으면 모든 것은 사라진다. 만약 토스카가 사람이라면 자서전을 쓰고 자비로 출판도 했을 텐데. 그러나 동물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암곰으로 시작했던 그 고통스러운 여성으로서의 삶은 죽음과 더불어 잊히고 말 것이다. 불쌍한 존재여, 그대 이름은 암곰이구나! 나는 이런 생각을 홀로 했다. […]
_ 186쪽, 「제2장 죽음의 키스」에서
“우리 엄마는 자서전을 썼어.”―“대단한데.”―“엄마에게는 장애물이 많았어. 엄마는 때로 비틀거렸고 일곱 번이나 넘어지기도 했지. 그렇지만 여덟 번 일어났대. 엄마는 글쓰기를 그만둔 적도 없어.” 토스카의 목소리는 얇고 투명한 막처럼 분명했다. “그런데 엄마와 달리 난 글을 쓸 수 없어.”―“왜 못 쓰는데?”―“엄마가 이미 엄마 책에서 나를 등장인물로 다루어 버렸거든.”―“그럼 내가 너를 위해 써 줄게. 너의 전기를 말이야. 그러면 너는 엄마의 자서전을 벗어날 수 있을 거야.”
_ 187쪽, 「제2장 죽음의 키스」에서
“내가 너의 삶의 이야기를 써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이제까지 내 이야기만 썼네, 미안.”―“괜찮아. 먼저 너 자신의 이야기를 글자로 옮겨. 그다음에 너의 영혼이 다 비워지면 암곰을 위한 자리가 날 거야.”―“너는 그럼 내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는 거야?”―“그래.”―“나 겁이 나는데.” 우리는 한마음으로 웃었다.
_ 231쪽, 「제2장 죽음의 키스」에서
“북극에 사는 사람들이 부러워. 거긴 전쟁이 없잖아.”―“전쟁은 없지. 그렇지만 사람들이 무기를 가지고 우리에게 오지. 그리고 그들은 총으로 우리를 쏴.”―“왜?”―“나도 몰라. 인간에게는 사냥 본능이 있다는 말을 들었어. 나는 본능이 뭔지 모르겠어.”―“내 생각에 사냥은 옛날에는 사람들에게 생존을 위해 중요했었어. 오늘날에는 그렇지 않지. 인간들은 이제 그냥 그만둘 수가 없는 거야. 인간들은 어쩌면 수많은 난센스 행위들로 이루어져 있는지도 몰라. 그래서 삶에 뭐가 진짜 필요한 행위들인지를 모르는 거야. 그들은 기억의 잔재들에 조종을 당하는 거지.”
_ 232~233쪽, 「제2장 죽음의 키스」에서
그 어떤 서커스 동물들도 통일의 날이 다가올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나는 불안한 봄의 징표처럼 공중에서 뭔가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내 발바닥은 참을 수 없이 가려웠다. 사람들이 곰에게 공동체의 미래를 점치게 하는, 오랜 종족들의 지혜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면 그들은 내 간질거리는 발바닥에서 미래의 모습을 찾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통일’이라는 개념을 생각하지 못했었더라도, ‘납치’ ‘셰어하우스’ 혹은 ‘입양’ 같은 단어는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단어들을 알면 그들에게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있었으리라.
_ 270쪽, 「제2장 죽음의 키스」에서
도대체 마티아스는 언제나 오려나? 이 질문은 크누트에게 참을 수 없는 것이었지만 어쩌면 이 질문이 아니라 시간 자체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고 크누트는 생각했다. 시간이라는 것은 일단 존재하기 시작하면 시간 자신이 자기 손으로 그 끝을 맺을 수는 없다. 해가 진 다음에 창문이 잃어버린 자신의 밝음을 다시 찾기까지는 얼마나 오래 걸리던지 참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시간이 흐르며 크누트의 인내심이 바닥날 즈음에야 드디어 발자국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방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마티아스는 상자로 몸을 숙이고 크누트를 두 손으로 끄집어내어 인간의 코로 곰 주둥이를 대고 누른 후에 “안녕, 크누트!” 하고 인사했다. 바로 이 순간에 항상 크누트가 ‘시간’이라고 느끼던 것이 사라졌다. 왜냐하면 크누트는 이 순간부터는 시간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더 이상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디에나 대고 코를 킁킁거리고 음식을 먹고 수많은 음식물들과 씨름해야 했다. 마티아스가 그 방을 떠나면 그때부터 시간은 다시 시작되었다.
시간은 음식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시간은 아무리 열심히 먹어도 양이 줄지 않았다. 시간 앞에 서 있으면 크누트는 무력감을 느꼈다. 시간은 마치 고독으로 이루어진 빙산 같았다. 크누트가 갉아 먹고 긁어 대도 아무 일도 없었다. 크리스티안은 자주 시간이 없다고 불평을 했다. 그래서 크누트는 그가 부러웠다.
_ 307~308쪽, 「제3장 북극의 추념」에서
크누트는 아침 산책을 할 때마다 새로운 동물 종족들을 알게 되었다. 한 동물이 높은 가지에 여유롭게 앉아 있었는데 좁게 딱 들러붙는 셔츠를 입고 있어서 관능적으로 보였다. “말레이곰과 한번 말을 나눠 봐!” 크누트가 보기에는 말레이곰이 건방지거나 천박하지 않은 것 같아 이 제안을 따랐다. “오늘도 다시 더운 날이 되겠네요. 이 시간에 벌써 이렇게 덥잖아요.” 크누트의 조심스러운 말에 말레이곰은 슬렁슬렁 대답했다. “전혀 덥지 않은데. 지금은 추운걸.”―“당신이 옷을 얇게 입어서 그런 것 아닐까요. 크누트 좀 보세요. 예쁜 털 스웨터를 입고 있잖아요.” 말레이곰이 이 말을 들었을 때 갑자기 얼굴에 수많은 웃음 주름이 나타났다. “너는 자신을 크누트라고 부르니? 삼인칭으로 말하는 곰일세! 그런 웃기는 짓거리를 내 평생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데! 너 아직도 아기니?” 크누트는 화가 팍 끓어올라 앞으로 말레이곰과는 어떠한 접촉도 하지 않으리라 굳게 결심을 했다. 크누트는 그냥 크누트다. 왜 크누트가 크누트를 크누트라 부르면 안 되는가? 말레이곰의 말을 머리에서 떨쳐 버리기는 불가능했다. 마티아스와 크리스티안이 하는 말을 주의 깊게 들어 보면 사람들은 요컨대 마티아스가 스스로를 마티아스라 부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자기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다. 마치 그 이름이 자기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듯 말이다. 그러고는 자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넘겨주었다. 이 얼마나 이상한 현상이란 말인가! 마티아스는 자기를 뭐라고 부르는가? ‘나’. 그렇지만 더 이상한 것은 크리스티안도 자신을 ‘나’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어째서 모두 다 자기 자신에게 같은 단어를 사용하는데 서로 혼동이 오지 않을까?
_ 345~346쪽, 「제3장 북극의 추념」에서
“너는 여기에 이름을 입력한 다음 여기를 클릭해야 돼. 잘 봐! 그건 네 사진이야. 이제 너는 인터넷에서 네 모습을 볼 수 있어.” 마티아스는 다시금 자판을 쳤고 나는 뭔가 하얀 것이 암벽 바위 위에 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 “너인지 알아보겠니? 저게 너라고. 얼마나 귀엽니!”
마티아스는 마치 사랑에 빠진 것처럼 다른 크누트를 열심히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진짜 크누트가 바로 옆에 앉아 있는 것을 잊어버렸다는 듯이 말이다. 만약 저 사진이 크누트라면 나는 크누트가 아니다.
_ 356~357쪽, 「제3장 북극의 추념」에서
서커스는 자연의 모든 종류의 부당함에 저항한다. 마술사는 그의 중산모가 비둘기를 낳게 할 수 있다. 곡예사는 원숭이로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뛰어오를 수 있다. 맹수 조련사는 불을 무서워하는 동물들로 하여금 활활 타는 링에 뛰어오르게 할 수 있다. 그리고 마티아스는 자신의 손가락에 우유가 흐르게 할 수 있다. 언젠가 나는 동아시아 서커스단의 공연을 텔레비전에서 본 적이 있다. 꿩으로 분장한 여자들의 손가락 끝에서 분수처럼 물이 솟구쳐 나왔다. 정말 대단한 공연이었다! 마티아스도 적어도 그 정도의 일을 해낸 것이다. […]
_ 378쪽, 「제3장 북극의 추념」에서
[…] “사람들은 자연스럽지 못한 것은 모두 증오해”라고 미하엘이 설명했다. “사람들은 곰은 곰으로 남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많은 사람들은 바로 똑같은 논리로 하층민은 하층민으로 남아야 한다고 생각을 해. 다른 것들은 모두 그들에게는 자연스럽지 못한 것이지.”―“그러면 동물원은 왜 만들었데?”―“아, 그게 사실상 모순인 거지. 하지만 모순이 인간의 유일한 천성이야.”―“너 사기 치는 것 아냐!”―“너는 자연스럽거나 부자연스럽거나 한 것에 대해 너무 골치를 썩이면 안 돼. 그냥 네 마음에 드는 그대로 살면 돼!”
자연스러움에 대한 질문은 나에게 잠이 잘 들고 또 깊이 자는 자연스러운 능력을 앗아 갔다. 내가 토스카의 젖꼭지를 맹목적으로 입안에 넣고 힘차게 빠는 것이 자연스러웠을까? 시작도 끝도 없는 따뜻한 가죽 털이 나를 받아들이고 나를 절대로 떠나지 않으면 자연스러운 것인가? 그러면 나는 엄마의 몸 냄새가 나는 동굴 속에서 내 인생의 첫 주를 보냈을 것이다. 험한 겨울이 지나갈 때까지 말이다. 태어난 이후로 나는 자연과는 거의 관련이 없었다. 나의 인생은 그래서 자연스럽지 못한가? 나는 마티아스가 플라스틱 젖병으로 우유를 주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그것은 더 큰 자연의 일부가 아니란 말인가? 호모 사피엔스는 괴물은 아니더라도 돌연변이의 결과다. 그리고 바로 그 호모 사피엔스가 버림받은 북극곰의 새끼를 살리겠다고 결정을 내렸다. 그것은 자연의 기적 아닌가?
모든 것이 자연의 질서에 따라 이루어졌다면 나는 곰 동굴의 한가운데에서 엄마의 몸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자라난 상자의 한가운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의 코앞에는 장벽이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장벽 뒤에 있는 세계에 대해 동경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내가 베를린 토박이라는 증거가 아닌가? 내가 태어났을 때 베를린 장벽은 이미 역사의 한 조각이 되었지만 많은 베를린 사람들은 아직도 장벽을 머릿속에 가지고 있었다. 이 장벽이 오른편 반과 왼편 반을 나누고 있었다.
_ 375쪽, 「제3장 북극의 추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