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싯다르타>는 인도를 배경으로 한 모든 소설 중에서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읽힌 작품이다. 인도에서는 이 <싯다르타>를 인도에서 사용되는 모든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하기 위해 헤르만 헤세 협회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1926년 우리나라에 최초로 소개된 헤세의 소설도 바로 <싯다르타>였다.
헤세의 인도를 비롯한 동양문화와의 인연은 어렸을 때부터 매우 각별했다. 외할아버지가 저명한 인도어 학자였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인도에서 선교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헤세가 <싯다르타> 2부를 헌정한 외사촌 빌헬름 군데르트는 일본 학자로 일본 선불교에 조예가 깊었다. 헤세는 어린 시절부터 외할아버지의 서가에서 <우파니샤드>를 비롯한 힌두교 경전들과 불경들을 읽었고 노자의 <도덕경>에도 크게 영향을 받았다. 유년 시절 이후 부모의 경건주의적 기독교에 반감을 품었던 것은 어렸을 때부터 접했던 인도와 중국 등의 동양사상이 그 배경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싯다르타’는 불교의 역사적 사실과 달리 부처와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 부처는 고타마라는 이름으로 등장해 싯다르타에게 영향을 주지만 그 역할은 제한적이다. <데미안>의 데미안과 싱클레어, <수레바퀴 밑에>의 기벤라트와 하일너가 헤세 자신의 두 가지 속성을 분리시킨 인물이듯이 헤세는 <싯다르타>에서도 부처를 깨달음을 얻으려고 영혼의 투쟁을 하는 싯다르타와 깨달음을 얻은 존재로서의 고타마를 분리시키고 있다.
<싯다르타> 속의 여러 인물들은 인도 문화에서 가져온 것으로 불교뿐 아니라 힌두교의 종교적 표상도 담고 있다. 작품 속 인물들의 이름은 불교와 힌두교의 경전에 등장하는 여러 신들의 이름이 변용되어 사용되었다. 하지만 싯다르타가 자기실현을 완성하여 해탈의 경지에 들어서는 깨달음을 얻는 계기는 무위자연을 강조하는 도가철학과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불교의 고행과 금식, 속세로 귀환해서 벌이는 무절제한 욕망의 탐닉으로 처절하게 구원의 길을 향해 몸부림치던 싯다르타는 뱃사공 바주데바의 무언의 가르침과 침묵하는 강이 전하는 가르침을 통해 결국 내면의 평화를 찾게 된다.
헤세는 <싯다르타>를 발표하고 난 뒤 어느 글에서 자신이 생애의 절반 이상을 인도와 중국 연구에 몰두했다고 적었다. 기독교와 서양 문화의 세계관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을 고민했던 헤세가 그 바탕으로 삼았던 것이 동양문화라는 사실은 헤세의 작품세계와 정신적 궤적을 이해하기서도 매우 중요하다. <싯다르타>는 동양문화에 대한 헤세의 오랜 관심과 연구가 응축된 그 결정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헤르만 헤세Herman Hesse(1877~1962)
20세기 유럽의 작가 중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읽히고 소개된 독일 출생의 소설가이자, 시인이자, 화가. 1877년 독일 남부 칼프에서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명문 마울브론 신학교에 입학했으나 시인이 되고자 학교에서 도망쳐 나왔다. 15세 때 자살을 기도해 정신병원에서 요양을 했고 시계 공장과 서점에서 일했다. 이십대 초부터 작품 활동을 시작해 1904년 첫 장편소설 『페터 카멘친트』를 발표했다. 이후 자신의 질풍노도의 청춘기가 투영되고 삶과 자연에 대한 성찰이 담긴 『수레바퀴 밑에』『데미안』『싯다르타』『황야의 늑대』등을 발표해 현대 독일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떠올랐다. 1943년 13년에 걸쳐 집필한 대작 『유리알 유희』를 발표했으며 이 작품은 3년 뒤에 헤세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60년대 초반까지 국지적이었던 헤세의 명성은 60년대 중반 이후 전 세계적인 반문화 운동의 기운 속에서 삶의 대안을 찾으려는 젊은이들에게 다시 한 번 주목을 받으며 미국을 비롯해 세계 각국에서 헤세 붐이 일어났다. 이후『데미안』과 『수레바퀴 밑에』를 비롯해 헤세의 수많은 작품들은 성장통을 겪는 모든 청춘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으로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말년에는 집필 활동을 중단하고 수채화 제작에 오랫동안 몰두했다. 1962년 8월 제2의 고향 몬타뇰라에서 눈을 감았다.
■ 옮긴이
홍성광
서울대 독문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토마스 만의 소설 『마의 산』의 형이상학적 성격」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옮긴 책으로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토마스 만의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 『마의 산』, 카프카의 『변신』, 『소송』, 『성』 하인리히 뵐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페터 한트케의 『어느 작가의 오후』 등이 있다.
추천사
노자의 도덕경 이후 내게 이보다 더 큰 의미를 일깨워준 책은 없었다. 짧고 간결한 책이지만 심오한 철학을 담고 있으며, 웃음을 통해 속세의 혼탁함을 극복함과 동시에 세상을 재발견하게 해주는 지혜를 선사해준다. 헤세는 동서양의 정신적 유산을 문학적으로 승화시켜 우리가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붓다를 넘어 또 하나의 붓다를 창조하였다. 이것은 독일인들로서는 실로 전대미문의 성취라고 할 수 있다. 헤세의 『싯타르타』는 적어도 내게는 신약성서보다 더 큰 치유력을 가진 작품이다. - 헨리 밀러
오늘날 헤세만큼 전통에 천착하면서 그 안에 의식의 토대를 두고 있는 작가도 드물 것이다. 사물을 꿰뚫어 보는 그의 눈에는 한 치의 과장도 한줌의 허튼 수작도 용납되지 않는다. 그의 목소리는 국가의 모든 계층들에게 반향을 일으키며, 그들에게 헤세는 언제나 ‘젊은’ 존재로 남아 있다. 헤세의 모든 발언들, 말하자면 그의 저서뿐만 아니라 그가 남긴 수많은 기고문과 서평들을 살펴보면, 그가 자신이 걸어온 파란만장한 삶의 여정들을 성찰함과 동시에 그것을 철저히 객관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헤세에게서 감각의 세계는 활짝 열려 있으며, 더 없이 순수하고 거리낌 없는 공간이다. 헤세는 치열한 자기 성찰의 과정을 거친 뒤 이것을 밖으로 드러내는데, 이것이 바로 ‘신중함’이다. - 후고 발
본문에서
“도대체 네가 스승들한테서 배우려고 했던 것이 무엇이지? 그리고 너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던 그들이 도저히 가르쳐 줄 수 없었던 것이 무엇이지? 바로 자아의 의미와 본질이었어. 나는 자아에서 빠져나오고 싶었어. 하지만 그럴 수 없었어. 단지 자아를 속이고 그것으로부터 도망쳤을 뿐이야. 정말이지 자아만큼 내가 몰두한 화두는 없었어. 내가 살아 있다는 수수께끼, 내가 모든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남다른 존재라는 이 수수께끼, 내가 싯다르타라고 하는 이 수수께끼만큼 나를 몰두하게 만든 것은 없었어. 그런데도 나는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나 자신, 싯다르타에 대해 가장 적게 알고 있어!”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것은, 싯다르타가 내게 낯설고 생소해 보이는 것은, 오로지 한 가지 이유 때문이야. 내가 나 자신을 무서워하고, 나 자신을 두려워하기 때문이야! 나는 아트만을 추구했어. 그리고 브라만을 추구했어. 내 자아를 부수고 껍질을 벗겨 내 미지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아트만을, 생명을, 그 신성하고 궁극적인 것을 찾아내려고 했어. 그러나 바로 그러다가 나 자신을 잃어버렸어. 나는 나 자신한테서 배워서 나 자신의 제자가 될 것이며, 나는 나를, 싯다르타라는 비밀을 알아내겠어.”
사물의 본질과 의미는 사물의 배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들 속에, 아니 모든 것 속에 있었던 것이다.
“그렇습니다. 싯다르타, 당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바로 이런 것이지요? 강물이란 어디서나 동시에 존재한다, 강의 원천에서나, 강어귀에서나, 폭포에서나, 나루터에서나, 시냇물의 여울에서나, 바다에서나 산에서나, 어디서나 동시에 존재한다, 그리고 강물에는 현재만이 있을 뿐 미래의 그림자는 없다는 것이지요?”
“바로 그렇습니다.” 싯다르타가 말했다. “그리고 그것을 배우게 되자 나의 인생을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나의 인생도 한 줄기 강물과 다름없더군요. 소년 싯다르타와 장년 싯다르타와 노년 싯다르타는 단지 그림자에 의해 분리되어 있을 뿐 현실에 의해 분리되어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싯다르타의 전생도 결코 과거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싯다르타의 죽음이나 브라마에로의 복귀도 결코 미래의 일이 아닐 것입니다. 과거였던 것이나 미래에 있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현재입니다. 모든 것이 실재하는 현재입니다.”
“깨달음을 추구하는 자가 흔히 겪는 일이지요. 다시 말해 그 사람의 눈은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것만 보기 때문에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하게 되고, 아무것도 마음속에 받아들이지 못하게 됩니다. 자신이 추구하는 것만 생각하고, 자신이 정한 목표에만 정신이 팔려 있기 때문이지요. ‘추구’라는 말 자체가 이미 목표를 갖고 있다는 뜻이지요. 반면 ‘깨달음’은 자유롭게 열려 있는 상태, 목표가 없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보게 고빈다, 내가 얻은 생각들 중 하나는, 지혜란 남에게 전달할 수 없다는 것이야. 지혜는, 현인이라고 해도 그것을 전달하려고 하면 할수록 어리석은 소리가 되네.”
“자네 농담하는 건가?” 고빈다가 물었다.
“농담하는 게 아닐세. 내가 깨달은 사실을 말하고 있는 걸세. 지식은 전달할 수 있지만, 지혜는 전달할 수 없는 법이라네. 우리는 지혜를 찾아낼 수 있고, 그것을 체험할 수도 있네. 그것을 지니고 있을 수도 있고, 그것으로 기적을 행할 수도 있네. 그러나 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말로 가르칠 수는 없다네. 젊은 시절부터 나는 가끔 이러한 사실을 예감했고, 그 때문에 스승들을 떠난 거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