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수채화 작품을 통해 헤세의 화가로서의 면모는 잘 알려져 있지만 그의 삶에서 음악이 차지했던 역할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헤세의 삶과 창작에서 음악은 항상 특별한 역할을 차지했다. 음악가의 전통이 있는 집안에서 태어난 헤세는 어렸을 때부터 바이올린 연주를 배웠고 수많은 음악가, 작곡가들과 교분을 쌓았다. 음악 비평과 논평도 썼고, 그의 수많은 시들은 노래로 작곡되었다.
실제 삶뿐 아니라 헤세의 많은 소설에서도 음악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처녀 장편소설인 <페터 카멘친트>에는 리하르트 바그너에 매료되었던 경험이 반영되어 있고 <데미안>에서 싱클레어는 오르간 연주자 피스토리우스에게 기분이 울적할 때면 북스테후데의 파사칼리아를 연주해 달라고 부탁한다. <황야의 늑대>에서 주인공 하리 할러는 재즈 연주자인 파블로에게 베토벤, 브람스, 바그너의 음악은 화성이 넘쳐 나서 감정을 드높이지만 바흐나 모차르트 음악에 나타나는 정신성은 억누른다고 말한다. 그리고 <유리알 유희>의 세계에서는 퍼셀의 바로크 음악이 감동적으로 울려 퍼진다.
<게르트루트>는 음악이라는 소재를 전면에 내세운 헤세의 초기작이다. 국내에는 1970년대에 <사랑의 삼중주>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는데 그당시 제목대로 <게르트루트>는 사랑의 삼각관계를 다룬 작품으로 읽을 수도 있고 헤세의 보편적 주제인 양극성의 조화에 대한 음악적 변주로 볼 수도 있다. 헤세가 자신의 자아를 두 인물로 분리하여 그린 수많은 작품들처럼 <게르트루트>에서도 일인칭 화자인 작곡가 쿤과 삼인칭으로 묘사되는 오페라 가수 무오트는 한 예술가의 아폴론적인 속성과 디오니소스적인 속성을 형상화한 것이다. 헤세 소설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이원적인 존재이다. 그들은 인간이면서 늑대이고, 범죄자이면서 신사이고, 소시민이면서 예술가이고, 건강하면서 병들어 있다. ‘내 가슴에는 두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괴테의 <파우스트>의 다양한 변주라고 할 수 있다.
<게르트루트>는 작품 전체에서 서정성과 낭만성이 다른 작품들에 비해 두드러진다. 특히 사고로 불구가 된 쿤이 알프스 산악 마을을 갔다가 자연 속에서 작곡의 영감을 얻는 대목은 ‘은은한 리듬감과 색채감, 표현의 소박함’이 묻어난다. ‘언어의 우아함을 이처럼 매력적으로 드러낸 책은 없다’는 현지 평론가의 말대로 이 소설 속에는 ‘음악이 오롯이 담겨 있다’.
헤르만 헤세Herman Hesse(1877~1962)
20세기 유럽의 작가 중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읽히고 소개된 독일 출생의 소설가이자, 시인이자, 화가. 1877년 독일 남부 칼프에서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명문 마울브론 신학교에 입학했으나 시인이 되고자 학교에서 도망쳐 나왔다. 15세 때 자살을 기도해 정신병원에서 요양을 했고 시계 공장과 서점에서 일했다. 이십대 초부터 작품 활동을 시작해 1904년 첫 장편소설 『페터 카멘친트』를 발표했다. 이후 자신의 질풍노도의 청춘기가 투영되고 삶과 자연에 대한 성찰이 담긴 『수레바퀴 밑에』『데미안』『싯다르타』『황야의 늑대』등을 발표해 현대 독일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떠올랐다. 1943년 13년에 걸쳐 집필한 대작 『유리알 유희』를 발표했으며 이 작품은 3년 뒤에 헤세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60년대 초반까지 국지적이었던 헤세의 명성은 60년대 중반 이후 전 세계적인 반문화 운동의 기운 속에서 삶의 대안을 찾으려는 젊은이들에게 다시 한 번 주목을 받으며 미국을 비롯해 세계 각국에서 헤세 붐이 일어났다. 이후『데미안』과 『수레바퀴 밑에』를 비롯해 헤세의 수많은 작품들은 성장통을 겪는 모든 청춘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으로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말년에는 집필 활동을 중단하고 수채화 제작에 오랫동안 몰두했다. 1962년 8월 제2의 고향 몬타뇰라에서 눈을 감았다.
황종민
서울대 독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독일 괴팅겐대학에서 수학했으며 서울대, 한양대, 동국대, 한성대에 출강했다. 현재 뉴질랜드에 거주하면서 번역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라데츠키 행진곡』 『키치』 『이집트 미술』 『초현실주의』 『현대 미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 주다』 등이 있다.
추천사
이 소설은 기본적으로 음악에 대한 소설이면서 동시에 삶의 의미를 다룬 소설이다. 니체에 기대어 우리는 헤세 소설의 주제를 ‘음악의 정신으로 부터 재탄생한 인간의 자유로운 영혼’으로 읽어 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적어도 금세기에 출간된 독일 소설 중에서 이성적인 명료함과 추진력 면에서 이처럼 매력적으로 언어의 우아함을 드러낸 작품을 경험한 기억이 없다. 은은한 리듬감으로 채워져 있는 이 소설 속에는 음악이 오롯이 담겨 있다. 하나의 절제된 안단테라고 할 수 있다. - 요제프 빅토르 비트만
헤르만 헤세의 고백은 오늘날 하늘이 들썩거릴 정도로 요란스럽게 살아가는 젊은 세대들에게 이중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처럼 보여진다. 하나는 자연과 풍경과 자연스러움을 만끽하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언어의 소박성을 추구하라는 것이다.
- 로베르트 노이만
내가 보기에 헤세는 우리 시대의 가장 아름다운 독일어를 구사하는 작가이다. 그의 문장들엔 색채감과 리듬감이 흘러넘치는가 하면, 더없이 순수하면서도 표현의 의식적인 소박함이 묻어난다. 자연경관을 묘사하는 헤세의 솜씨는 단연 압권이다. 그의 작품을 동시대의 다른 독일 소설들과 차별화시키는 결정적인 부분은 이른바 ‘구체성’의 미학이다. 우리는 그의 구체화된 분위기에 취하게 되고 때론 자신의 기력을 소진시키기도 한다. 나아가 헤세는 색채와 분위기에다 윤곽을 그려 넣고, 확고한 틀을 구축하기도 한다. - 테오도어 호이스
본문에서
어느 날 저녁 고즈넉할 무렵 바위 비탈에서 집으로 돌아오다가, 그 모든 것을 처음으로 뚜렷이 느꼈다. 이를 골똘히 생각할수록 나 자신이 수수께끼처럼 보였을 때, 불현듯 그 모든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떠올랐다. 내가 어렸을 적 어렴풋이 맛봤던 저 낯설고 경이로운 시간이 돌아온 것이었다. 그 기억과 더불어 눈부시게 맑은 시간이 되돌아왔다. 감정들이 거의 유리처럼 환하게 내비쳐서 어느 감정이든 아무 가식이 없었고, 어떤 감정도 고통이나 행복을 품지 않고 오로지 힘과 울림과 흐름만을 의미했다. 내 고조된 느낌들이 일렁거리고 아른거리고 맞싸우면서 음악이 생겨났다.
인생사와 인간사란, 이것은 미워하고 저것은 사랑하며, 이자는 존경하고 저자는 경멸하면서 그리 손쉽게 헤쳐 나갈 수 없다. 세상만사는 얽히고설켜 있어서 거의 떼어놓을 수 없고 어떤 때는 거의 분간할 수 없다.
“청춘이란 속임수입니다. 신문이나 교과서에서 떠드는 진짜 속임수예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때라니! 노인들이 하는 일이 내게는 훨씬 더 만족스러워 보입니다. 청춘은 인생에서 가장 고달픈 때입니다. 이를테면 나이가 지긋해지면 자살하는 일이 거의 없지요.”
“우리 노인들은 당연히 그 반대라고 말하지. 하지만 네 친구는 무언가 진리를 알아챘구나.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청춘과 노년 사이에 경계를 뚜렷이 그을 수 있다. 청춘은 이기심이 없어지면서 끝나며, 노년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면서 시작되거든. 무슨 말인가 하면, 젊은이들은 자기 자신들만을 위해서 살기 때문에 인생에서 즐거움과 괴로움을 숱하게 겪는다. 어떤 소원이든 어떤 생각이든 소중하며, 어떤 기쁨이든 끝까지 즐기지만 어떤 고통이든 끝까지 겪기도 한다. 소원을 이루지 못하면 곧바로 인생 전체를 내던지는 젊은이들도 있지. 이것이 청춘이다..... 가장 정열적이었던 젊은이가 가장 훌륭한 노인이 되는 법이다. 학교 다닐 적부터 애늙은이처럼 행동했던 젊은이는 오히려 그렇지 못하지.”
“제대로 된 예술가라면 인생이 불행할 수밖에 없네. 배가 고파서 자루를 열어 보면 그 안에는 늘 진주만 들어 있으니까!”
“어떤 철학자는 같은 시대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아서 개인주의를 생각해 내고, 다른 철학자는 홀로 지내는 것을 견디지 못해 사회주의를 만들어 내지. 우리의 외로운 감정은 일종의 병일지도 몰라. 다만 이를 어떻게 해볼 수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