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세는 어느 글에서 자신의 작품들을 ‘영혼의 전기’로 규정했다. 각 작품들은 그 시기의 헤세의 고민과 문제의식이 숨김이나 과장 없이 잘 드러나 있다. <수레바퀴 밑에>는 헤르만 헤세의 많은 작품 중에서도 자전적인 요소가 가장 두드러지는 ‘유년 시절의 자서전’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이다.
시골 마을에서 주위 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수재 한스 기벤라트(Gibenrath라는 이름에는 ‘Geben Sie mir Rat’ 즉 내게 조언을 해주세요, 라는 뜻이 담겨 있다. 하지만 기벤라트는 가정과 학교로부터 진정한 조언을 받지 못하고 사회의 몰이해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다)가 명문학교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하지만 억압적인 규율과 학업의 부담감,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몰이해 속에서 원초적인 건강한 생명력이 말살 당해 결국 파멸에 이르는 이야기는 가감 없이 헤세의 신학교 입학과 자퇴에 이르기까지의 전말을 다루고 있다.
소설 속의 주요한 캐릭터인 한스 기벤라트와 헤르만 하일너는 열세 살 때부터 ‘시인이 아니면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다’던 헤세의 두 분신이라 할 수 있다. 주위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행동하는 모범생 한스 기벤라트와 규율에 반항적이며 시인을 꿈꾸는 몽상가 기질의 헤르만 하일너는 속 깊은 우정을 나누며 답답한 신학교 생활을 이겨내려 하지만 권위적인 교육 시스템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두 소년의 불행한 결말로 소설은 획일적이고 자유로운 영혼을 억압하는 교육 제도에 대한 비판을 일면 강조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그런 어두운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에서 기벤라트와 하일너가 나누는 우정은 너무도 아름답다. 감수성 강한 사춘기 때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우정을 쌓아가는 과정을 이렇게 문학적으로 아름답게 형상화해 보여준 사례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청춘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기벤라트와 하일너라는 두 소년의 이름은 청춘과 우정의 영원한 심벌로 앞으로도 계속해서 성장통을 겪는 모든 이들을 위로할 것이다.
헤르만 헤세Herman Hesse(1877~1962)
20세기 유럽의 작가 중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읽히고 소개된 독일 출생의 소설가이자, 시인이자, 화가. 1877년 독일 남부 칼프에서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명문 마울브론 신학교에 입학했으나 시인이 되고자 학교에서 도망쳐 나왔다. 15세 때 자살을 기도해 정신병원에서 요양을 했고 시계 공장과 서점에서 일했다. 이십대 초부터 작품 활동을 시작해 1904년 첫 장편소설 『페터 카멘친트』를 발표했다. 이후 자신의 질풍노도의 청춘기가 투영되고 삶과 자연에 대한 성찰이 담긴 『수레바퀴 밑에』『데미안』『싯다르타』『황야의 늑대』등을 발표해 현대 독일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떠올랐다. 1943년 13년에 걸쳐 집필한 대작 『유리알 유희』를 발표했으며 이 작품은 3년 뒤에 헤세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60년대 초반까지 국지적이었던 헤세의 명성은 60년대 중반 이후 전 세계적인 반문화 운동의 기운 속에서 삶의 대안을 찾으려는 젊은이들에게 다시 한 번 주목을 받으며 미국을 비롯해 세계 각국에서 헤세 붐이 일어났다. 이후『데미안』과 『수레바퀴 밑에』를 비롯해 헤세의 수많은 작품들은 성장통을 겪는 모든 청춘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으로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말년에는 집필 활동을 중단하고 수채화 제작에 오랫동안 몰두했다. 1962년 8월 제2의 고향 몬타뇰라에서 눈을 감았다.
■ 옮긴이
홍성광
서울대 독문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토마스 만의 소설 『마의 산』의 형이상학적 성격」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옮긴 책으로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토마스 만의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 『마의 산』, 카프카의 『변신』, 『소송』, 『성』 하인리히 뵐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페터 한트케의 『어느 작가의 오후』 등이 있다.
추천사
이 소설은 부모와 후견인 그리고 교사들에게, 실용주의와 성과주의에 매몰되어 있는 사회가 어떤 식으로 건강하고 재능 있는 한 젊은이를 파멸로 몰아넣는지를 환기시켜주는 지침서 같은 역할을 한다. 뿌리를 잘라버림으로써 채 자라지 못한 어린 줄기를 말라 죽게 만드는 사회 말이다. - 아르투어 엘뢰서
하나의 경향소설? 물론이다. 따뜻한 가슴의 언어로 길어 올린, 젊음을 갈망하는 청춘의 권리가 살아 숨 쉬고 있지 않은가. - 테오도어 호이스
내가 살아 있는 한 난 헤세의 편에 설 것이다. 관습적 어리석음이 빚어낸 끔찍한 결과를 공론화했다는 점에서 이 작은 소설은 그 당시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 유효성을 인정받을 작품이다. 평화와 아름다움과 행복감을 늘 가슴속에 지니고 살아가는 한 존재의 진지한 언어는 삶의 공포적 상황과 극단적인 대조를 이루고 있다. 나는 한스 기벤라트에게 고통을 주는 자들을 보면서 나치의 앞잡이 노릇을 했던 나의 어리석은 스승들을 떠올렸다. 하지만 헤세의 이 작품을 통해 문학을 통한 연대감을 확인할 수도 있었다. 나는 기꺼이 헤세의 작품을 함량 미달의 교육자들이 아이들에게 저지르는 부당한 행위에 대해 조소와 증오로써 응징하고자 하는 타당한 보복 행위로 간주하고 싶다. - 가브리엘 보만
본문에서
한스는 기필코 남들보다 앞서고 싶었다. 왜 그래야 하는지는 자신도 알지 못했지만.
루치우스가 바이올린을 배우고 싶다고 하자 음악 선생님 하스는 머리털이 곤두섰다. 음악 수업을 하면서 루치우스의 음악적 재능이 형편없음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루치우스가 노래를 부르면 학생들은 꽤나 즐거워했지만, 음악 선생은 절망하곤 했었다.
“야, 하일너, 넌 대체 부끄러운 줄도 모르니?”
“부끄러워? 너희들 앞에서?” 그는 경멸하듯 큰 소리로 말했다. “천만에, 이 친구야!”
하일너에게 우정은 즐거운 사치이자 위안 혹은 한낱 장난이었다. 하지만 한스에게 그것은 자랑스러운 보물이자 때로는 무거운 짐이기도 했다.
어느 누구도 야윈 소년의 얼굴에 나타난 어찌할 줄 모르는 미소의 배후에, 불안과 절망에 빠져 허우적대며 살려 달라는 눈빛을 보내는 무너져 가는 한 영혼이 있음을 보지 못했다.
한스는 왜 하필이면 오늘 그날 일이 떠올랐는지, 왜 그 추억이 이처럼 아름답고 강렬하게 다가왔는지, 왜 그 추억이 자신을 이다지도 비참하고 슬프게 만드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이 자신에게 작별을 고하기 위해, 행복의 고통을 남기기 위해, 추억의 옷을 입고 자기 앞에 나타났음을 깨닫지 못했다. 머릿속이 온통 어젯밤 에마와의 일로만 가득 차 있는 이때,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건 적절치 않다는 것만 감지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