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야의 늑대>는 1960년대에 미국을 중심으로 세계 문학계에 ‘헤세 르네상스’를 불러온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작품이다. 1946년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헤세의 문학세계에 평단이 월계관을 씌워주었지만 헤세가 쓴 책들의 판매는 그의 사후 조금씩 줄어드는 추세였다. 그런 상황 속에서 기존 체제와 관습에 저항하는 청년 문화가 확산되고 삶의 대안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런 삶의 대안을 모색하던 문화 그룹들이 헤세의 <황야의 늑대>에 주목하게 되었고 그것이 헤세의 다른 작품들에 대한 관심으로까지 확산되었다. <황야의 늑대>는 헤세의 작품 중 연극, 음악, 영화 등의 대중문화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1960년대에 설립되어 오늘날까지 미국의 대표적 극단으로 인정받고 있는 ‘매직 시어터’와 ‘스테픈울프 시어터 컴퍼니’는 <황야의 늑대>에 등장하는 가공의 무대와 주인공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고 작품과 동명의 밴드와 앨범, 노래, 영화 등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황야의 늑대>는 헤세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기법이 매우 현대적이다. 일반적인 내러티브와는 거리가 있는 방식으로 시민사회의 한 아웃사이더를 1인칭 시점, 관찰자의 시점, 소논문의 세 요소로 입체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리고 후반의 실재인지 환각인지 분명치 않은 ‘마술 극장’ 장면의 분위기는 서정과 낭만이 넘치는 초기작들과는 사뭇 다른 카니발적인 요소들로 가득 차 있다.
<황야의 늑대>의 집필 동기는 헤세가 1차 대전 당시 겪었던 개인적인 체험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주인공 하리 할러는 시민사회의 시민성이 비겁함과 속물성과 안전제일주의로 흐르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거리를 두려 한다. 하지만 자신이 완전한 늑대로서 야생에서 살 수도 없기 때문에 그는 시민사회의 경계에 아웃사이더로서 머물려 한다. 황야의 늑대도 시민사회의 건전한 시민도 될 수 없는 하리 할러의 딜레마는 원천적으로 해결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1차 대전 당시 헤세는 전쟁을 비판하는 글을 발표했다가 독일 국민들과 언론들로부터 매국노라는 욕을 얻어먹어야 했다. 전쟁이라는 악을 방지하는 데 시민사회가 보인 무력감과 이성의 상실은 헤세에게 커다란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작품 속에서 하리 할러가 어느 교수의 집을 방문했다가 교수가 자신이 쓴 반전 신문 기사를 거론하며 필자를 욕하는 말을 듣는 장면과 보수적이고 선동적인 신문으로부터 신랄하게 공격받는 대목은 1차 대전 중 겪은 헤세의 체험의 직접적인 반영이다.
헤르만 헤세Herman Hesse(1877~1962)
20세기 유럽의 작가 중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읽히고 소개된 독일 출생의 소설가이자, 시인이자, 화가. 1877년 독일 남부 칼프에서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명문 마울브론 신학교에 입학했으나 시인이 되고자 학교에서 도망쳐 나왔다. 15세 때 자살을 기도해 정신병원에서 요양을 했고 시계 공장과 서점에서 일했다. 이십대 초부터 작품 활동을 시작해 1904년 첫 장편소설 『페터 카멘친트』를 발표했다. 이후 자신의 질풍노도의 청춘기가 투영되고 삶과 자연에 대한 성찰이 담긴 『수레바퀴 밑에』『데미안』『싯다르타』『황야의 늑대』등을 발표해 현대 독일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떠올랐다. 1943년 13년에 걸쳐 집필한 대작 『유리알 유희』를 발표했으며 이 작품은 3년 뒤에 헤세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60년대 초반까지 국지적이었던 헤세의 명성은 60년대 중반 이후 전 세계적인 반문화 운동의 기운 속에서 삶의 대안을 찾으려는 젊은이들에게 다시 한 번 주목을 받으며 미국을 비롯해 세계 각국에서 헤세 붐이 일어났다. 이후『데미안』과 『수레바퀴 밑에』를 비롯해 헤세의 수많은 작품들은 성장통을 겪는 모든 청춘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으로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말년에는 집필 활동을 중단하고 수채화 제작에 오랫동안 몰두했다. 1962년 8월 제2의 고향 몬타뇰라에서 눈을 감았다.
■ 옮긴이
안장혁
동의대, 고려대에서 독문학을 공부했고 브레멘대학에서 괴테 연구로 독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와 응용문화연구소의 연구교수를 거쳐 지금은 동의대 인문사회연구소의 학술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쓴 책으로『괴테의 친화력과 이성의 타자성』(독문), 『독일문학과 한국문학』(공저)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내 아이 숨은 재능 찾기』『Re: 지금 우리 사랑일까』『내 안의 돌고래를 찾아라』(공역) 등이 있다.
추천사
<황야의 늑대>는 내게 진정한 독서란 무엇인지에 대해 처음으로 일깨워준 작품이다. - 토마스 만
시대 전체가 하리의 영혼 속으로 집결되는 듯한 강렬한 인상이 들었다. 자신과의 싸움을 벌이는 과정이 곧 우주 전체와의 투쟁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 설정이 탁월했다. - 오스카 뢰르케
저자는 이 소설에서 이른바 세 개의 상이한 의식의 단계를 들여다본다. 첫 번째 단계에서는 객관적인 시민의 시각, 두 번째 단계에서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예술가적 자아의 관점, 그리고 마지막 단계에서는 초월적 심급으로 관점 전환을 한다. 『황야의 늑대』가 취하고 있는 이러한 작품 구조는 헤세의 그 어떤 작품보다도 제임스 조이스의『율리시스』이래로 우리가 ‘현대 소설’이라 부르는 장르에 가장 근접해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이 소설이 야기하는 정치적 충격과, 문화계에 대한 진단을 제대로 인지하기 위해서는 냉철한 머리를 필요로 한다. - 헤르만 부르거
본문에서
“인간의 삶이 정말로 고통이고 지옥이 되는 때는 두 개의 시대, 두 개의 문화, 두 개의 종교가 충돌을 일으킬 때예요. 고대의 한 인간이 중세 때 살아야 했다면, 그는 그 문명의 한복판에서 고통스럽게 질식하고 말았을 겁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두 개의 시대, 두 개의 삶의 양식에 끼어 살고 있지요. 그래서 자명한 윤리도 안정감도 순수성도 잃어버린 겁니다.”
정신을 죽이고 현실에 만족하는 이 시민적 시대의 한복판에서, 이따위 건축물들과 사업들과 회사들 사이에서, 이따위 정치와 인간들 속에서는 그것을 발견하기 어렵다. 이렇듯 추구하는 목적과 기쁨이 나와는 전혀 다른 이 세상의 한복판에서 어찌 내가 한 마리 황야의 늑대가, 거친 은둔자가 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우리는 내일이면 잊히거나 비웃음거리가 될, 마지막으로 남은 소수의 까칠한 노이로제 환자가 아닐까? 문화, 정신, 영혼, 아름다움, 성스러움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오래전에 죽었는데, 우리 몇몇 멍청이들만 그것이 실재한다고 믿고 있는 유령이 아닐까? 우리 같은 바보들이 잡으려고 애쓰는 것은, 어쩌면 하나의 환영에 불과한 게 아닐까?
한쪽 길은 성자, 정신에의 순교자, 신을 향한 귀의의 길이고, 또 다른 길은 탕자, 본능에의 순교자, 자발적 타락의 길이다. 시민은 이 두 갈래의 길 사이에서 중용의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 시민은 신에게 귀의하기를 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타락하고 싶어 한다. 그는 결코 그 두 갈래 길 중 한쪽에 빠지거나 의지하려 들지 않는다. 시민의 이상은 자아 희생이 아니라 자아 보존이기 때문이다. 시민은 신성함도 그 반대도 지향하지 않는다. ‘절대성’이란 것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시민은 신에게 귀의하기를 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타락하고 싶어 한다. 덕성을 갖추고자 하면서도 동시에 세상의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어 한다. 요컨대 시민은 양극단 사이의 중간, 다시 말해 격렬한 폭풍우로부터 비껴나 있는 안전한 회색지대에 안주하려 한다.
성인과 죄인을 비롯해 모든 절대성을 추구하는 자들이 중립적이고 미온적인 중도, 즉 시민적인 것을 긍정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위대한 것을 행하라는 소명과 재능을 받았으나 그를 이루지 못한 비극적인 인물들의 훌륭한 발명품이라 할 수 있는 유머, 인류의 가장 독특하고 탁월한 업적인 유머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유머의 프리즘을 통과한 빛이라야 인간의 모든 영역을 하나로 통합시킬 수 있는 것이다. 세상 속에 살면서도 마치 세상 밖에 있는 듯 사는 것, 법규를 준수하면서도 법을 초월하는 것, 소유하면서도 소유하지 않는 듯 사는 것, 포기하면서도 마치 포기하지 않은 듯 사는 것 등, 고차원적인 삶의 지혜를 실현시켜 주는 것은 오로지 유머뿐이다.
그래도 아무튼 우리의 황야의 늑대는 적어도 파우스트적인 이중성은 자신 안에서 발견했다. 자신이 하나의 육체 속에 하나의 영혼이 깃든 통일체가 아니라, 기껏해야 그러한 조화로운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기나긴 순례길에 오른 존재임은 깨달은 것이다.
“춤은 전혀 못 춘다고요? 원스텝조차? 그러면서도 힘겨운 삶을 살아왔다고 주장하는군요. 그건 엄사라이에요. 춤 하나 배울 의지도 없었으면서 어떻게 치열하게살아왔다고 말할 수 있어요?”
“나에겐 더 이상 조국이란 것도, 이상이란 것도 존재하지 않아. 그런 것들은 다음 살육을 준비하는 양반들을 위한 장식품일 뿐이야.”
이 전쟁에서는 황제, 공화국, 국경, 깃발의 색깔 등 장식적이고 연극적인 시시콜콜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금방이라도 질식해 버릴 것 같은 인간, 더 이상 삶의 낙을 찾지 못하게 된 인간들이 자신들의 불만을 표출해 차가운 회색빛으로 물든 문명 세계를 해체하려 한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인간이 영속적인 통일체라는 견해는 오류일 뿐만 아니라 불행까지 초래한다는 사실을 당신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아울러 인간은 수많은 영혼과 자아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겉보기에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고 있는 개성을 그토록 많은 형상들로 분열시키는 것은 어쩌면 미친 짓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과학은 그것에다 정신분열증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기까지 했지요. 어떠한 다양성도 통제 없이는, 다시 말해 규칙과 체계에 따르지 않고서는 길들일 수 없다는 점에서는 그러한 과학적 입장은 타당하다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수많은 잠재적 자아마저도 어떤 유일무이하고 절대적이며 평생을 따라다니는 질서의 지배를 받을 것이라 믿고 있다는 점에서는 과학은 틀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