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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국 De Republiek (2013)

  • 저자 요스트 더프리스 지음
  • 역자 금경숙
  • ISBN 978-89-7275-993-5
  • 출간일 2020년 04월 16일
  • 사양 404쪽 | 120*188
  • 정가 15,000원

한 히틀러 연구가의 죽음이 촉발한 부조리극
혹은 사랑하는 스승이자 친구를 위한 긴 고별사

★네덜란드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작가, 요스트 더프리스 국내 초역!
★2014년 황금책부엉이상 수상작
★네덜란드문학재단 번역 지원 도서

나는 물이 밀려들기 전에 벌써 조류를 감지하고 육지로 도망가는 동물처럼 부엌을 나왔다. 본능적이었다. 속이 메스껍지는 않았지만, 돌연 화장실로 달려가 무릎을 꿇고 지난 몇 주 동안 끈적거리는 리놀륨 바닥에 들러붙은 더께를 손가락으로 긁었다. 그것에 저항할 수가 없었다. 나보다 더 강력했다.

칠레 이후로는 겪지 못했던 격렬함과 함께 내 몸이 경련을 일으키고, 공장 냄새가 나는 담즙을 토악질하는 동안, 뒤에서는 방송 시그널 음악의 트럼펫 부는 소리, 진행자가 ‘r’ 발음을 길게 굴리는 소리가 들렸다. 충격파가 새로 밀려와 내 몸은 욕지거리가 속사포처럼 쏟아지듯이 독을 짜냈다. 누가 여기 브리크의 더러운 변기에 머리를 박고 있었나? 누가, 손가락이 미끄러지며 브리크가 아침에 눈 오줌이 튀어 말라붙은 것이 틀림없는 자국을 손톱으로 긁고 있었나? 누구인가? 그렇다. 필립 더프리스가 아니라. 프리소 더포스다.

_1부 제1세계, 본문 86-87쪽

 

‘만납시다.’ 왜? 그가 원하는 게 뭔가? 친구가 되자? 나와 함께 요시프 브리크 팬클럽이라도 창립하고 싶었나? 나는 그 전화에 신경이 곤두섰고 그냥 싫었다. 근본적인 ‘아니요’, 본능적인 거부감이 솟아 나왔고, 감당할 수가 없었다―오래전 헤어진 생부가 전화를 걸어와 내 생일에 당장 오고 싶어 하며, 아이들의 할아버지가 되고 싶어 하고, 같이 내 신발을 사러 가고 싶어 하는 듯했다. 그런데 그는 아버지가 아니라 형제였다―그와 내가 같다고, 우리는 같은 ‘브리키언’이라고 생각하는 누군가였다. 하지만 거기에는 구분이 있었다. 단계들. 모두가 늘 브리크와 관련되어 있지만, 그 모두는 거리가 다른 여러 편대로 세분되어 있었다―훈타 junta는 동료와 친구, 편집자, 프로듀서, 기자, 박사 학위 과정생, 그리고 하나같이 브리크의 옆에 가겠다고 밀치며 나아가고 있는 대학생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는 총사령관으로서 언제 누구를 받아들여야 하는지 아주 잘 알았다. 그리고 내게는 무릇 필립 더프리스가 함께 행군했었는지 확실하지도 않았다. 퍽 인기 있는 TV 방송에서 최악으로 선택된 출연자였다는 점 말고, 그는 어떤 사람이었나? 나치 독일 용어로 빗대면, 나는 그래도 마르틴 보어만이었고, 더프리스는 그래봐야 고작 영화 <서바이벌 런>의 러시아 변소에서 폭사하는 그 네덜란드의 나치 친위대일 터였다.

_1부 제1세계, 본문 130쪽

 

“아이히만의 재판이 없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나치에 관한 개념을 가질 수 있었겠소? 아이히만 없이 우리는 악의 평범성을 알지 못했을 테고, 게다가 한나 아렌트의 그 구절이 비록 번번이 잘못 이해되었다 하더라도 우리는 수동적 참여에 대해 알지 못했을 거요. 말랑한 아이히만이 없었다면 우리에게는 현란한 악인인 멩겔레만 있는 거지. 목적 없이, 순전히 피학적으로, 자신의 명령에 따라 극악무도한 실험을 했던 의사 멩겔레. 그러고 나서 아이히만처럼 ‘사회의 명령’은 받아들이지 않고 남미로 가서, 알려진 것만 해도 소녀 두 명이 죽은 불법 낙태 시술에 전념한 남자. 멩겔레 때문에 우리는 국민 감정이나 ‘상관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는 말, 그리고 평범한 시민이 어떻게 그렇게 손쉽고 저항 없이 체계적 범죄를 넘어서는 일에 일부분이 되어 가담할 수 있는지 전혀 깊이 생각할 필요가 없었지.”

_2부 필립&프리소, 본문 248-249쪽

 

나는 내가 말똥말똥 보고 있는 것도 잊은 채, 그렇게 얼마간 앉아 있었다. 어쨌거나 시간이 잠시 흘렀고 호텔 방의 정적이 내게 젖어 들기에 넉넉할 만큼 앉아 있었다. 마취제 같은 평온함.

분명 잠이 든 것은 아닌데도 가물가물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새삼 딴사람인 것처럼, 필립의 침대에서 브리크의 유골을 품에 안고 앉은 모습이 보이다가, 느닷없이 브리크의 흐로닝언 시골집에서 브리크의 유골을 품에 안고 앉은 모습이 보였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갑자기 그 집 부엌에 있던 나무로 만든 교실 의자에 브리크의 유골을 지니고 앉은 모습을 제대로 떠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의 친구들과 동료들이 정원에 빼곡하게 서 있는 장면을 떠올릴 수 있었고, 내가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도 그들의 시선을 끌며 앞에서 걷는 장면을 떠올릴 수 있었다.

_3부 맥거핀, 본문 3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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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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