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문단의 살아 있는 역사로 불리며 <페미나 상> <카트르 쥐리 상> <알베르 카뮈 상> 등 프랑스 문학의 굵직한 상들을 석권하며 탁월한 문학적 성취를 보여준 로제 그르니에의 소설집이 현대문학에서 출간되었다. ‘프랑스의 안톤 체호프’ ‘20세기의 모파상’이라는 찬사를 받는 그는 이번 작품 『이별 잦은 시절』에서도 특유의 부드럽고 나직한 어조로 삶의 우수를 이야기하고 있다. “21세기 속에서 길을 잃은 후기 낭만주의자”라는 어느 비평가의 말처럼 고전적 깊이와 섬세하고 날카로운 침묵이 머무는 공간을 표현해 소설의 진정한 맛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프랑스 문학의 산 역사 로제 그르니에. 이제 그가 품격을 갖춘 정통 프랑스 문학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 수록 작품 소개 『이별 잦은 시절』에는 총 10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이 책에서 로제 그르니에는 특유의 깊고도 섬세한 문장으로 삶의 분기점에서 자신도 모르게 내린 선택 때문에 재난에 빠져드는 사람들을 이야기한다. 표제작인 「이별 잦은 시절」은 독일 점령 치하의 암울했던 프랑스를 배경으로 소식이 끊긴 연인을 찾아 떠나는 한 청년의 고단한 여정을 그리고 있다. 파리의 건축사무소에서 일을 하고 있는 청년은 소식이 끊어진 연인을 찾아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때가 때인 만큼 교통사정은 불안정하기 짝이 없다. 끊어졌다 이어졌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그 불안한 여정에서 청년은 한 여자를 만나 가까워지지만 소식이 끊긴 연인을 생각하며, 어쩌면 평생의 반려일지도 모를 그녀를 그만 떠나보내고 만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이미 마음이 떠나간 연인의 홀대뿐, 결국 그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열정의 기억만을 지닌 채 환멸과 실의에 차서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초당」은 비행기 사고 현장을 찾게 된 한 지질학자의 이야기이다. 불에 탄 비행기 잔해 속에서 첫사랑의 흔적을 발견한 그는 사랑했던 음악과 가족으로부터 떠나올 수밖에 없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음악학교에서 피아노를 공부하고 있던 그는 러시아 출신의 한 바이올리니스트에게 매료된다. 잡히지 않던 사랑에 조바심만 치던 어느 날, 그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그녀와 함께 가족휴가를 보내게 된 것이다. 그리고 들뜬 마음으로 뒤늦게 휴가지에 합류한 그는 결국 그동안 열정에 눈이 멀어 보지 못했던 진실을 확인하게 된다. 「오스카의 딸」은 오랫동안 한 여자를 곁에서 지켜만 봐야 했던 남자의 이야기이다. 피레네 산기슭의 작은 시골마을 출신인 남자는 영화사 사장인 오스카의 딸과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내고, 그 인연으로 오스카의 영화사에 취직을 하게 된다. 이후 남자는 대론 오스카와 그의 딸 사이의 중재자로, 때론 친구로서 자신의 마음은 표현하지 못한 채 그들의 곁을 지키게 된다. 말 한 마디만 했어도 어쩌면 달라졌을 그들의 관계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끝이 나고 만다. 「비밀」의 주인공 제르멩 드바스트는 부모의 차별도, 동료들의 멸시도, 친척의 이유 없는 폭언도 그저 묵묵히 견디기만 했을 뿐, 단 한 번도 속내를 드러낸 적이 없다. 그저 죽는 날까지 비밀을 품고 있다가 혼자만 알고 있는 비밀을 유서로 털어놓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세상과 우매한 사람들을 조롱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작품에서 그르니에는 자신의 의견이나 감정을 표현하지 못해서 죽는 날까지 외로웠던 한 남자의 이야기를 아주 담담하게 풀어내고 있다. 이밖에도 천부적인 재능으로 군부대 연예단의 스타가 된 한 남자와 훗날 그의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동료들의 이야기를 그린 「몽마르트르 북쪽에」, 최고의 젖소치기의 영예를 잃지 않으려는 한 남자의 희대의 사기극을 다룬 「암소같이 고약한 사랑」, 좋아하는 남자의 곁에 있으려 그의 사촌과 결혼을 하지만, 남자가 죽는 바람에 마음에도 없는 결혼생활로 내팽개쳐진 한 여자의 기막힌 이야기 「난처한 일」, 우연히 이웃집을 도우면서 그 속에서 대칭의 재미를 발견한 「대칭」, 더 이상 글을 쓰지 못해 퇴물 취급을 받던 왕년의 대기자가 장 콕토의 사망으로 재기를 꿈꿔보지만 결국 술 때문에 실추된 명예를 회복할 기회를 놓쳐버리게 된다는 「어느 날 피아프와 콕토가……」, 자신의 으깨진 얼굴을 꿰매는 의사가 글래머 간호사에게 작업을 거는 데도 그저 무력하게 누워 있어야만 했던 한 남자의 이야기 「한 시간 동안의 바느질」 등의 작품에서 우리는 간결하고 압축된 문장 사이의 격렬하고 아이러니한 그 무엇, 바로 로제 그르니에만의 품격을 느낄 수 있다.
■ 지은이_ 로제 그르니에 Roger Grenier 1919년 프랑스 캉 출생. 일간지 《콩바》지에 카뮈의 추천으로 에세이 「피고의 역할」을 발표하며 작가생활을 시작했다. 그 후 《프랑스 수아르》지에서 기자 및 문학비평가로 활동했으며 지금까지 소설 『검은 피에로』『겨울 궁전』『물거울』『편집실』『파르티타』 『프라고나르의 연인』, 작가론 『알베르 카뮈, 빛과 그늘』『내리는 눈을 보라, 체호프의 인상』, 에세이 『율리시즈의 눈물』『스냅』 등 40여 권의 저서를 내놓았다. 1972년 『시네 로망』으로 페미나 상을 받았고, 카트르 쥐리 상, 아카데미 프랑세즈 단편소설 대상, 에세이로는 알베르 카뮈 상, 11월 상, 조제프 델테유 상, 3천만 애독자 상을 수상하는 등 탁월한 문학적 성취를 보여주었다. 1985년에는 그의 전 작품에 대하여 아카데미 프랑세즈 문학대상이 수여되었다. 그는 지난 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프랑스 최고의 명문 갈리마르 출판사를 지탱하는 기둥이었다. 87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금도 매일 갈리마르사에 출근하여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왕성한 집필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 옮긴이_ 김화영 문학평론가.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문학 상상력의 연구』『행복의 충격』『바람을 담는 집』『소설의 꽃과 뿌리』『시간의 파도로 지은 집』『어린 왕자를 찾아서』 등 10여 권의 저서 외에 미셸 투르니에, 르클레지오, 파트릭 모디아노, 장 그르니에, 로제 그르니에, 레몽 장, 크리스토프 바타이유, 실비 제르멩 등 프랑스 주요 작가들을 한국에 처음 소개하였고, 『알베르 카뮈 전집』(전18권) 『섬』『뒷모습』『율리시즈의 눈물』『내 생애의 아이들』『걷기 예찬』『마담 보바리』『지상의 양식』 등 90여 권의 역서를 내놓았다.
■ 이 책은… “아주 적은 단어로 우리를 아프게 한다.” 바로 《르 몽드》지가 로제 그르니에를 일컬어 한 말이다. 로제 그르니에는 삶에 스며 있는 자잘한 슬픔들을 연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로제 그르니에의 작품에는 거창하고 대단한 사건, 위대하고 훌륭한 인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아주 사소하고 일상적인 이야기 속에서, 삶에서 스쳐 지나가는 현실적인 허무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딱히 비극적으로도 비참하게도 여겨지지 않는다. 그저 삶의 어긋난 진실을 들여다보는 작가의 매섭고도 날카로운 시선에 가슴 한쪽에 서늘한 바람이 부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바로 로제 그르니에의 작품이 가진 현실성 때문이다. 그가 자신의 소설에서 이렇다 할 것 없는 인생들을 통해서 이야기하려는 것이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기 때문이다. 로제 그르니에는 프랑스 문학의 살아 있는 역사이다. 2차 대전 중 레지스탕스 운동에 가담한 그는 《콩바》지에서 알베르 카뮈와 함께 일하면서 그의 추천으로 에세이를 발표하며 작가생활을 시작했고, 이후 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기자, 작가, 문학비평가 그리고 프랑스 최고의 명문 갈리마르 출판사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해왔다. 늙지 않는 정신과, 87세라는 나이가 무색한 왕성한 활동. 때문에 문단에서는 그를 “87세의 청년작가”라고 일컫는다. 지난 2003년 심포지엄 참석차 방한한 그는 한 인터뷰에서 지금도 소설을 쓰냐는 질문에 “계속 씁니다. 다른 것은 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한 바 있다. 그리고 지금 그가 이 작품을 통해 삶의 덧없음과 아이러니하게도 그 덧없음 때문에 더욱 귀중한 삶을 노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