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책 냄새 맡는 것을, 책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 중고 책을 살 때 그랬다. 새 책도 어떤 종이를 썼는지, 제본할 때 어떤 접착제를 사용했는지에 따라 다양한 냄새가 나지만, 책을 사 간 사람의 집 안에 가만히 머문다. 그 책들에는 아직 이야기가 없다. 책 자체에 담긴 이야기와는 또 다른 이야기, 확산되고 은밀한 평행의 이야기 말이다. 어떤 책들은 곰팡이 냄새가 나고, 또 어떤 책들은 페이지 사이에 카레, 차, 혹은 마른 꽃잎 냄새를 간직하고 있다. 어떤 때는 버터 얼룩이 묻어 있기도 하고, 긴 여름날 오후 동안 책갈피 역할을 했던 기다란 풀잎이 가루가 되어 떨어져 내리기도 한다. 밑줄 그어진 문장이나 페이지 여백에 적힌 일종의 내면 일기 같은 불분명한 메모들이 한 사람의 전기를, 격분을 불러온 어떤 사건이나 결별의 증거를 구성하기도 한다.
_ 29~30쪽
“전달자가 책에 독자를 골라줘야 해요. 관찰하고, 더 나아가 어떤 책이 필요한지 감이 올 때까지 독자를 쫓아가야 하죠. 착각하지 마세요, 이건 진짜 일입니다. 우리는 도발하려고, 일시적 변덕 때문에, 혹은 세상을 혼란에 빠뜨리거나 선동하려는 의도로 책을 나눠 주는 게 아닙니다. 정당한 이유 없이 그러지는 않아요. 나와 함께 일하는 훌륭한 전달자들은 큰 공감 능력을 가졌습니다. 상대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어떤 낙담과 원한들이 쌓여 있는지를 느낍니다.”
_ 48쪽
쥘리에트는 차 한 모금을 더 마셨다. 뜨거운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자, 기이한 안정감이 마음속에 퍼져나갔다. 기분이 좋아졌고, 이상하게도 내 집에 있는 것처럼 편안했다. 모든 의문에 응답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정원들은 아직 존재합니다’라는 단순한 말이 어떻게 그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동화 속에 살지 않았고, 솔리망처럼 책들 속에 살지도 않았다. 전혀 아니었다.
그러나 의문들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_ 122~123쪽
쥘리에트는 곁눈질로 그를 훔쳐보고는 웃기 시작했다. 이 사람과 이야기하는 게 좋았다. 온화하고 학식이 풍부한 사람, 마치 옛날 소설에 나오는 친근한 삼촌 같았다. 조카가 어렸을 때는 무릎에 앉히고 예물 시계의 시곗줄을 갖고 놀게 해주고, 조카가 자란 뒤에는 밤에 놀다가 귀가하지 못했을 경우 알리바이를 제공해주는 삼촌 말이다. (…)
그는 살아 있는 생명체—오랜 친구, 때로는 무시무시한 적—에 대해 이야기하듯 책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중 어떤 책들은 도발적인 청소년처럼 느껴졌고, 또 어떤 책들은 난롯불 옆에 앉아 장식융단을 꿰매는 할머니처럼 느껴졌다. 그의 이야기에 따르면, 책장들 속에는 까다로운 학자, 사랑에 빠진 여자, 격분해서 날뛰는 사람, 잠재적 살인자,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표현들이 바뀜에 따라 그 아름다움이 사그라지는 연약한 아가씨들에게 손을 내미는 날씬한 청년들이 있었다. 어떤 책들은 우리로 하여금 몸을 똑바로 세우지도 못한 채 숨을 죽이고 간신히 갈기에 매달리게 하는, 그렇게 미친 듯이 질주해 우리를 어디론가 데려가는 혈기왕성한 말이었다. 어떤 책들은 보름달이 뜬 밤의 호수 위를 평화롭게 나아가는 배였다. 그리고 또 다른 책들은, 감옥이었다.
_ 134~135쪽
어떻게 그 말이 맞는다고, 조금은 그렇다고 대답한단 말인가? 마침내 나는 두꺼운 책들 속에 모든 질병과 모든 치료제들이 감춰져 있다고 믿게 되었다고, 아니, 그렇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고. 책에서 배신을, 고독을, 살인을, 광기를, 격분을, 다른 사람들의 존재에 대해 말하지 않고도 나에게 뭔가를 강요할 수 있고 내 존재를 망가뜨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만난다고. 때로는 책을 읽으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 누군가의 인생을 구원할 수 있다고. 아프리카 소설이나 한국 동화를 읽다가 영혼의 단짝을 만나는 것이 우리 인류가 똑같은 악덕들로 얼마나 고통받고 있는지, 우리가 얼마나 서로 닮았는지 그리고 우리가 조금이라도 덜 악해지기 위해 이럭저럭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그러기 위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에게 미소 짓고, 서로를 어루만지고, 무엇이 되었든 감사의 표시를 나눌 수 있다고.
_ 212~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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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말 · ‘책’을 둘러싼 매력적인 모험
지은이 _ 크리스틴 페레플뢰리 Christine Féret-Fleury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하고 프랑스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다양한 책을 기획하고 편집했다. 1996년 어린이책 『꼬마 타무르』를 발표하며 작가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1999년 성장소설 『파도는 호랑이처럼 부드럽다』를 출간해 《르몽드》를 비롯한 유수의 언론으로부터 찬사를 받았고, 십 대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책에 주는 ‘안티고네상’을 수상했다.
페레플뢰리는 고대 전설이나 역사적인 사건, 인물을 조합해 글 쓰는 것을 좋아하여 『씨씨』 『폼페이의 재』 『S.O.S. 타이타닉』 등의 생동감 넘치는 동화와 소설을 썼다. 또한 딸과 함께 여러 책을 작업했는데 그중 「아틀란티스」 시리즈는 특히 많은 사랑을 받았다.
주로 모험이 가득한 소설을 써온 작가는 2017년 ‘책과 함께 떠나는 모험’을 그린 『지하철에서 책 읽는 여자』를 출간했다. 지금까지 50권이 넘는 책을 썼고, 다양한 문학 장르의 글쓰기를 시도해보고 싶어 한다.
옮긴이 _ 최정수
연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 『오 자히르』 『마크툽』, 기 드 모파상의 『기 드 모파상』 『오를라』, 프랑수아즈 사강의 『한 달 후, 일 년 후』, 아멜리 노통브의 『아버지 죽이기』,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 아모스 오즈의 『시골 생활 풍경』, 마리 다리외세크의 『가시내』, 에릭 엠마뉴엘 슈미트의 『브뤼셀의 두 남자』 등 뛰어난 작가들의 수많은 작품을 우리말로 옮겼다.
책의 진정한 주인을 찾아 떠나는 모험
반복적인 일상에 위로와 희망을 전하는 우화
‘책’의 진정한 주인을 찾아 떠나는 모험 이야기로 반복적인 일상에 위로와 희망을 전하는 소설 『지하철에서 책 읽는 여자』(2017)가 현대문학에서 출간되었다. 프랑스 문학을 대표하는 출판사 갈리마르에서 편집자로 다양한 책을 기획하고 편집한 작가 크리스틴 페레플뢰리가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책을 마주하고, 책의 참된 가치를 지켜봐온 경험과 애정에서 우러난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하는 소설이다. 작가는 ‘책이 인생을 바꿀 수 있을까?’라는 궁극적인 물음에 매일매일 반복되는 따분한 삶을 사는 소심한 여주인공 쥘리에트를 내세워 경쾌하고 산뜻하게 그 해답을 찾아간다.
쥘리에트는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서 파리 지하철 6호선을 타고 부동산 사무소로 출근한다. 지하철에 자리 잡고 앉아서 주변의 책 읽는 사람들을 관찰한다. 책 읽는 사람들의 반짝이는 눈, 열정적인 모습을 보면 단조롭고 뻔한 자신의 삶에서 잠시라도 벗어날 수 있어 행복하다.
우연히 두 정거장 전에 내려 낯선 길로 출근하던 어느 날, 쥘리에트는 ‘무한 도서 협회’라고 적힌 문을 발견하고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문을 밀고 들어간다. 순식간에 시끌벅적한 도시의 빛과 소음으로부터 차단된 그곳은 바닥에서 천장까지 온통 책으로 둘러싸여 있다. 고요한 정적만 흐르는 그곳에서 책을 정리하고 있는 남자, 솔리망을 만난다. 그는 그녀에게 “새로운 전달자로 온 건가요?”라고 자연스럽게 물으며 책들이 알맞은 독자의 손에 들어갈 수 있도록 사람들을 잘 관찰해 그들의 내면 깊은 곳에 쌓여 있는 고민을 해결해주는 ‘책 전달자’의 역할을 알려준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의 책방에서 책과 함께하며 행복했던 추억이 떠오른 쥘리에트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그와 책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눈다. 놀랍게도 그저 대화를 나눌 뿐인데 마음이 한껏 편안해지고 걱정과 고민이 사라지는 경험을 한 그녀는 의미를 찾을 수 없던 부동산 사무소 일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책 전달자 일을 하게 된다. 이후 그녀는 책을 둘러싼 기묘한 소용돌이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고, 이때껏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모험이 그녀 앞에 펼쳐진다.
‘책이 인생을 바꿀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대한 경쾌한 대답
“몸이 아플 땐 약을 먹고 마음이 아플 땐 책을 보세요.
이 책이 당신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거예요.”
『지하철에서 책 읽는 여자』의 주인공 쥘리에트는 ‘지하철 – 일 – 잠’으로 표현되는 전형적인 직장인의 삶을 사는,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인물이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지만, 기계처럼 돌아가는 현대 사회에서 개인적인 의미는 찾지 못하고, 인생에 많은 의문을 가지고 있다. 그런 그녀를 단조롭고 반복적인 일상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게 해주는 ‘구원의 매체’가 바로 책이다. 그녀는 자신이 읽는 책으로 간접 경험을 하고, 주변 사람들이 읽고 있는 연애소설이나 요리책을 보며 대리 만족한다. 하지만 단지 그뿐, 다 읽은 책은 다시 책장에 꽂히고 서랍에 박힌 채 잊혀 그녀의 삶도 제자리에서 뱅뱅 돌 뿐이다.
그러던 쥘리에트가 책 전달자로서 처음으로 추천한 책인 대프니 듀 모리에의 『레베카』가 알맞은 독자를 제대로 찾음으로써 그녀는 의욕적으로 이 일을 하게 된다. 그녀는 직장 선배 클로에가 잘하는 일을 찾을 수 있도록 오가와 이토의 『달팽이 식당』을 권하고, 부동산 사무소 소장 베르나르 씨가 마음속에 품고 있던 꿈을 깨닫도록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을 책상에 올려둔다. 그리고 그녀 자신이 부동산 사무소 일을 그만둘 때 서랍을 정리하면서는 플로랑스 들레의 『평범한 시간들의 종말』이라는 책을 발견한다. 중요한 순간마다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제목과 내용의 책들이 알맞은 독자들을 잘 찾아가 삶의 자극제가 되기도 하고, 마음의 근심과 고민을 해결해주는 치료제가 되기도 한 것이다.
이렇듯 이 소설에서는 책이 주인공으로,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나온다. 책을 정리하던 솔리망과 책 전달자의 입을 통해 책들은 오랜 친구 같은 책, 도발적인 청소년 같은 책, 난롯불 옆에 앉아 바느질하는 할머니 같은 책 등으로 나누어진다. 이에 더해 책과 관련된 위대한 작가들의 일화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와 책에 더욱 생생한 생명력을 부여한다. 차가운 물에 발을 담가 졸음을 쫓아가며 글을 쓴 실러, 『백년의 고독』을 쓰는 동안 생계를 잇기 위해 가전제품을 팔러 다닌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서로 자신의 글을 표절했다고 비난했던 셰익스피어와 말로의 일화들이 그러하다.
그뿐만 아니라 이 책에는 에밀 졸라, 모파상, 톨스토이, 토마스 만, 버지니아 울프 등 수많은 위대한 작가들과 작품 이야기가 쏟아진다. 이에 이 소설의 작가 크리스틴 페레플뢰리는 책의 말미에 책 속에서 인용된 책들과 주인공 쥘리에트가 책 전달자로서 가지고 있는 도서 목록을 정리해놓아 독자들에게 도움을 준다.
『지하철에서 책 읽는 여자』는 출퇴근하는 동안에도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며 모든 소통이 SNS로 이루어지는 이 시대에 책을 통해 이루어지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끈끈한 유대감이나 소통이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고 일깨워주는 따뜻한 소설이다. 소심하고 의욕 없던 쥘리에트가 책으로 진정 자신이 원하는 일을 깨닫고, 의욕적인 책 전달자가 되어 독자들이 우연히 만나게 되는 책을 통해 필연적으로 자신의 삶과 마주하도록 이끄는 여정은 구도자의 것과 다름이 없다.
책벌레들과, 미소 지으며 책을 덮고 싶어 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아름다운 우화.
- 《트리뷴》
SNS 시대에 책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따뜻한 소설.
- 《마담 피가로》
변화무쌍한 이 시대에 책과 사람 사이의 끈끈한 유대감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책.
독자들의 마음과 영혼을 울리는 책.
- 《북셀러》
문학적인 언어로 흐트러진 마음의 균형을 잡는 아름다운 이야기!
- 《아방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