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은 단절된 인간관계로 인해 고립된 현대인들의 삶에 필요한 ‘역할’을 대행해주는 직업을 택하게 되면서, ‘대리’하게 되는 역할과 함께 자신의 삶이 변화되어 가는 한 여자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작가는 현대인들이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형성하지 못함으로써 충족되지 못한 욕망과 공허한 삶, 그것을 채우기 위한 대리욕구가 생산해내는 인물대행업이라는 병적인 사회 현상을 용의주도하게 다루고 있다. 애인, 가족, 친구 등의 대리역의 체험으로 타인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갖게 되는 주인공이 대리역과 자신의 현실을 혼동하면서 너무나도 인간적일 수밖에 없는 한계에 당면하게 되는 이 서사의 클라이맥스는 스스로 소외되어진 현대인들의 삶의 생존방식과 그 실존 문제에 대한 보다 근원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 지은이 세드릭 프레보 Cedic Prevost 1975년에 태어난 세드릭 프레보는 배우이면서 동시에 연극 연출가이며, 단편영화 감독이자 연극과 교수이다. 저서로 『오늘도 무사히』(악트 쉬드사의 바벨 총서)가 있다. ■ 옮긴이 양영란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 3대학에서 불문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잠수복과 나비』『테오의 여행』『나의 연인 뒤라스』『서양과 불교의 만남』『행복한 나날』『매일 떠나는 남자』 『사라진 도시 우루아드』 등을 우리말로 옮겼으며, 김훈의 『칼의 노래』를 프랑스어로 옮겼다. ‘코리아 헤럴드' 기자, ‘시사저널' 파리 통신원으로도 근무했다.
■ 이 책은…… 프랑스 작가 세드릭 프레보의 소설 『대리사랑』이 현대문학에서 출간되었다. 세드릭 프레보는 2005?2006년 출간하는 책마다 각 언론의 찬사를 받으며 세계 문단을 이끌 주목받는 젊은 작가로 거론되었다. 배우이면서 동시에 연극 연출가이며, 단편영화 감독이자 연극과 교수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프레보는 젊은 독자층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역시 그의 이채로운 이력이 밑바탕되었음직한 이 소설은 사랑을 대리해주는 한 여자의 나래이터식 이야기로, 인간관계의 고립과 단절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꽉 막힌 현대사회의 보통사람들, 그들에게 필요한 사랑마저 대행하겠다는 별난 사업에 뛰어들어 점차 자신의 삶이 변화되어 가는 한 여자의 영화 같은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작가는 현대인들이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형성하지 못함으로써 충족되지 못한 욕망과 공허한 삶, 그것을 채우기 위한 대리욕구가 생산해내는 인물대행업이라는 병적인 사회 현상을 용의주도하게 다룬다. 애인, 가족, 친구 등의 대리역의 체험으로 타인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갖게 되는 주인공이 대리역과 자신의 현실을 혼동하면서 너무나도 인간적일 수밖에 없는 한계에 당면하게 되는 이 서사의 클라이맥스는 스스로 소외되어진 현대인들의 삶의 생존방식과 그 실존 문제에 대한 보다 근원적 질문을 던진다. 『대리사랑』은 배우의 꿈을 안고 파리로 상경한 젊은 여자의 이야기다. 감독의 요구에 제대로 울지 못해 매번 캐스팅오디션에서 낙방하는 여주인공은 너무 절망하고 의기소침해진 나머지 ‘배우'의 꿈을 포기할까 고민한다. 그때 마침 “고독한 사람을 위해 그 사람의 소중한 사람이 되십시오. 당신이 누구든지 우리는 당신을 필요로 합니다”라고 적힌 광고를 본다. 그 광고에 끌려 찾아간 곳에서 여주인공은 고용주 아벨로부터 대리업을 위한 연기력 테스를 받는다. 그리고 직원으로 채용된다. 일정액의 돈을 받고 고독하고 상처받은 사람들의 ‘파트너'가 되어주는 대리역으로 취직하게 된 것이다. 그 후 주인공의 삶은 변해간다. 독신남의 애인 역할, 집 나간 딸을 그리워하던 부부의 사랑스런 딸 역할, 친구를 만들지 못해 늘 외롭게 지내던 여자의 제일 친한 친구 역할 등등…… 그들이 필요로 하는 사람의 역할을 맡게 된 주인공은 혼신의 힘을 다해 배역에 몰입한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공은 고용주 아벨의 요청으로 그의 ‘임신한 약혼녀' 역할을 맡게 된다. 주인공은 배우로서 한 남자의 약혼녀의 역할과 자신과의 경계에서 혼란에 빠진다. 그리고 아벨이 대역으로의 약혼녀가 아닌, 실재의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믿게 되고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게 된다. 마침내 주인공은 자신의 대리역의 세계가 모두 해체되며 실재로 자신이 어디에 존재하는지 알 수 없는 비현실적 상황에 빠져들게 된다. ■ 본문 중에서 숨 가쁘게 마지막 계단에 올라섰을 때, 그보다 더 기가 막힌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이름이 적힌 갈색 봉투가 대문 입구 깔개 밑에 놓여 있었다. 봉투 안에 들어 있는 종이에는 타자기로 친 문장이 적혀 있었다. 이제부터 당신 이름은 에바니까 잘 처신하라, 에바는 스무 살이며 아벨과 함께 사는데, 아벨은 지금 당신 눈앞에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곳에 있을 것이다. 당신은 아벨을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사랑한다. 여느 때처럼 당신은 열쇠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초인종을 눌러야만 한다. 그게 전부였고, 편지 끝에는 서명도 없었다. 도대체 이건 또 무슨 도깨비 같은 이야기란 말인가? -36p 그 점에 대해서 골똘히 생각하다보니, 혹시 내가 처음부터 그 남자의 마음에 들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나한테 자꾸 자기 약혼녀 배역을 맡기고 실제로도 내가 자기에게 애정을 느끼게 되기를 바라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혹이 생겼다. 그의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세밀하게 관찰해보니, 내가 약혼녀 노릇을 하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나에 대한 그의 행동도 점점 더 진실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긴 나는 처음부터 그의 행동이 몹시 자연스러웠기 때문에 놀랐지만 말이다. -110p “그 따위 코미디는 집어치우시지!” 라고 말했다. 나는 내 귀가 의심스러운 나머지 잠시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리고는 그에게 물었다. “코미디라니, 무슨 코미디?” 남자는 자기 주위 공간으로 손을 허우적거리며 거의 반쯤 숨이 막히는 듯한 투로 말했다. “이 모든 게 다 코미디지. 이 웃기는 저녁 파티랑 허울뿐인 결혼 계획, 그리고 네가 거짓말로 뱃속에 달고 다니는 아기, 이 모든 게 다 코미디라고!"-188p 시릴의 거짓말을 낱낱이 알게 될까봐 두려웠는지, 아니면 진실을 알게 될까 두려웠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오늘 온 내 약혼자의 손님들이 모두 진정한 의미의 손님이었기를 바랐는지 혹은 그의 회사에서 고용한 배우들이었기를 바랐는지, 사실 나는 내 진심을 알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나의 존재여부는 지금부터 내가 발견하게 될 사실에 달려 있었다. 나는 어느 연극엔가 나오는 대사처럼, 존재하는 것이 나은지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 편이 나은지 도저히 판단이 서지 않았다. 죽는 걸까, 잠이 드는 걸까. 어쩌면 그저 꿈인지도 모르지. 문제는 바로 그거야. -200p “지금 장난하십니까?” 간호사들 중에서 한 사람이 시릴 쪽으로 몸을 돌리며 물었다. 하지만 시릴은 내가 보기에도 전혀 농담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 시릴이 자기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 보이자, 간호사는 내가 옷 속에 착용하고 있던 물 빠진 고무주머니와 내 주머니에서 찾아낸 빨간 잉크병을 시릴에게 내밀었다. 나는 그의 책상에서 커터와 함께 잉크병도 집은 다음, 자살을 가장하기 위해 내 손목에 병 속의 잉크를 쏟아부었던 것이다. 시릴은 도저히 자기 눈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고, 심지어는 작은 잉크병이 정말로 존재하는 물체인지를 확인해보겠다는 듯이 직접 손으로 만져 보기까지 했다. -230p “세상에서 제일 공포스러운 생각이 무언지 알고 싶니?” 그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 밤하늘을 응시했다. 나는 감히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내 침묵을 동의로 받아들였는지, 허공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 세상이 정말로 존재한다는 거야.” -234p ‘나' 는 누구인가 ? ‘그' 는 누구인가? 이 간단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얼핏 생각한 것만큼 분명하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현실이 영화나 소설보다 더 영화적이고 더 소설적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 허구의 세계가 지니는 거짓스러운 진실과 현실의 세계가 내포하고 있는 진실스러워 보이는 거짓말 사이에서 우리는 어느 쪽이 진실이고 어느 쪽이 거짓이라고 단정지어 말할 수 없다. 아니, 사실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할 필요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신문만 보는 것이 아니라, 소설도 읽고 영화도 보는 것이 아닐까 ? 경쾌하고 재치 있는 시대 풍자소설처럼 시작한 『대리사랑』은 이야기가 전개되어감에 따라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제법 무게 있는 질문을 던진다. -옮긴이의 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