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 북부의 험준한 산자락에 자리한 가상의 시골 마을 ‘로흐두’를 주 무대로 펼쳐지는 유쾌한 미스터리 <해미시 맥베스 순경 시리즈>가 현대문학에서 출간되었다. 나이는 30대 중반, 직업은 법을 지키는 경찰이지만 부업으로 가끔 밀렵을 자행하며, 잡종견 한 마리와 함께 유유자적 살아가는 태평한 주인공 해미시 맥베스 순경의 이야기는, 1985년 『험담꾼의 죽음』으로 시작되어 2016년 현재 두 편의 외전을 포함해 모두 33권, 시리즈 번호로는 31번째 권까지 이어지면서 30년 넘게 사랑받고 있다. <해미시 맥베스 순경 시리즈>는 영미권을 비롯해 폴란드, 헝가리, 에스토니아, 태국, 네덜란드, 독일, 인도 등지에서 번역 출간되었으며, 현대문학에서는 이번에 시리즈 첫 세 권인 『험담꾼의 죽음』 『무뢰한의 죽음』 『외지인의 죽음』을 동시 출간한 것을 시작으로 후속작들을 지속적으로 펴낼 예정이다.
『험담꾼의 죽음』에서는 그동안 단 한 번도 흉악 범죄가 일어나지 않았던 평화로운 로흐두 마을에 살인 사건이 일어나면서 게으른 순경의 감춰졌던 수사력이 처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시리즈를 여는 첫 번째 권답게 로흐두 마을과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세밀한 스케치가 돋보이는 이야기는 앞으로 순경과 좌충우돌 엮일 인물들을 자연스럽게 등장시키면서 이어지는 이야기들에 대한 기대감을 높인다.
스코틀랜드 북부의 조용한 마을에서 일어나는 죽음들
영국 황금기 미스터리의 계보를 잇는 코지 미스터리
우리나라에는 처음 소개되나 <해미시 맥베스 순경 시리즈>의 작가 M. C. 비턴은 오늘날 영국의 대표적인 대중작가로 유명하다. 영국 내 모든 공공 도서관의 대출 현황을 집계하는 국립도서관 공공대출권(PLR, Public Lending Right) 2016년 자료에 따르면, 비턴은 6년 연속 ‘소설 분야 성인 독자들이 가장 많이 빌린 국내 작가’ 1위에 올랐으며, 전체 대출 목록 최상위권에 오래도록 위치하고 있다.
비턴은 태초의 광활한 위용을 간직한 스코틀랜드 최북단 지역 서덜랜드로 여행을 떠났을 때 낚시 교실 참가자들 간에 일어나는 다툼을 목격하면서, 고전적 미스터리의 배경으로 적격인 이 공간을 무대로 한 이야기를 떠올리게 되었다. 20세기 초 영국 고전 미스터리의 황금시대 유산을 계승한 코지cosy 미스터리 <해미시 맥베스 순경 시리즈>는 조용한 마을을 소란하게 만드는 인물의 출현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살인 사건이 아마추어라 할 수 있는 일개 순경의 손에 통쾌하게 해결되는 과정을 짜임새 있는 구조 속에 그린다. 특히 비턴은 수수께끼 플롯, 다중 시점, 폐쇄된 공간에서 사건이 일어나는 클로즈드 서클Closed Circle, 그리고 ‘영국적’인 배경과 인물들을 설정함으로써 황금시대 미스터리의 여왕 애거서 크리스티와 자주 비교되고 있다.
태평하고 게으른 주인공 탐정 ‘해미시 맥베스 순경’과
유쾌한 괴짜 캐릭터들이 만들어 가는 웃음 가득한 수사극
<해미시 맥베스 순경 시리즈>가 오랫동안 사랑받는 데는 무엇보다 매력적인 주인공 해미시를 비롯해 저마다 개성 가득한 등장인물들 덕분이라 할 수 있다.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흔한 이름이자 셜록 홈스의 영원한 파트너 왓슨의 중간 이름인 ‘해미시’라는 이름을 가진 꺽다리 주인공은 불타는 듯 새빨간 머리칼과 개암빛 눈동자를 한 전형적인 스코틀랜드 북부인의 모습이다. 후줄근한 제복 아래 숨겨져 있지만 잘생긴 외모와 다정다감한 성품, 재치 있는 유머를 겸비한 그의 매력은 보면 볼수록 빛을 발한다.
“이 집 저 집에 들러 차를 얻어 마시며 천천히 순찰”을 도는 것이 주 업무, 자그마한 농장 일과 밀렵, 그리고 스코틀랜드 전통 축제 때 치러지는 각종 스포츠 경기 우승 상금으로 가외 소득을 올리는 해미시는 자신의 단순한 생활에 무척 만족하며 살아간다. 그런 그가 누려 온 평화는 마을에서 살인이 일어나고, 인근 스트래스베인 경찰서에서 출동한 형사들과 제멋대로인 용의자들을 상대하면서 자꾸만 깨지고 만다. 감초 같은 조연들과 주인공의 포복절도 수사극은 끊임없이 새로운 에피소드를 만들어 간다.
"궂은 날 끔찍한 시간을 견디게 해 주는" 최고의 오락물
미스터리와 블랙코미디, 그리고 로맨스가 어우러진 M. C. 비턴만의 세계
지금껏 세상에 쓰이지 않은 종류의 이야기를 읽고 싶은 바람이 있었다고 말하는 저자는 자신의 미스터리 시리즈를 가리켜 그동안 단 한 권도 없었던, 할리퀸 로맨스와 정통 문학 작품의 경계에 있으면서 “궂은 날 끔찍한 시간을 견디게 해 주는 책”이라고 정의한다.
살인 사건 해결이 소설의 중심축이라면, 이 시리즈에서 해미시와 마을 지주의 외동딸 프리실라 할버턴스마이스 간의 로맨스는 이어지는 다음 이야기에 대한 궁금증을 일으키는 보조 역할을 톡톡히 한다. 두 사람은 미묘한 연애 관계에 있으나 너무도 다른 환경 탓에 쉽게 마음을 털어놓지 못하는데, 비턴은 이러한 안타까운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 냄과 동시에 두 사람을 가로막는, 현대에 아직도 엄연히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신분제도와 이를 충실히 따르려 드는 속물들을 신랄한 블랙코미디로 풍자한다.
과연 다음에는 어떤 ‘죽음’이 또다시 로흐두 마을을 덮칠 것이며, 점점 깊어지는 주인공들의 사랑과 우정은 어떻게 흘러갈까? 용의자들에 관한 정보를 캐내기 위해 세계 각지에 사는 스코틀랜드인 친척과 지인들에게 거는 “장거리 전화에 대고 수다 떨기에 중독”된 해미시 순경의 사건 수사는 앞으로도 계속된다.
◆ 그 밖의 이야기
* <해미시 맥베스 순경 시리즈>는 1990년대 중반 로버트 칼라일 주연의 BBC 스코틀랜드 드라마로 제작되어 많은 인기를 누렸지만, 비턴은 원작과 다른 내용과 해미시가 멀쑥한 대마초 골초로 묘사되는 모습에 이 드라마를 끔찍이 싫어했다고 전해진다. 십수 년이 지나 이제는 어느 정도 마음이 풀렸다는 그녀는 “덕분에 사람을 죽이고 싶은 기분에 대해 배웠다”고 웃으며 말한다.
* 비턴은 “코지 미스터리cosy crime”라는 용어를 싫어하며, 최근에는 누구든 자신의 작품을 이렇게 분류하는 사람에게는 “글래스고 키스(박치기)”를 해 주겠다고 위협하고 있지만, 그녀 자신을 제외한 대부분의 이들은 30여 년째 비턴의 미스터리를 코지 미스터리라고 표현한다.
■ 줄거리
“그 여잔 아마 다른 종류의 낚시 기술을 익혔나 봐요.
사람들한테 누구나 숨기고 싶은 비밀이 하나쯤은 있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는 것 같아요.”
스코틀랜드 북부의 작은 마을 로흐두의 여름 낚시 교실에 여덟 명의 참가자가 모인다. 상원의원의 미망인 레이디 제인 윈터스는 교실에 도착하자마자 쉴 새 없이 다른 참가자들의 심기를 거스른다. 그녀의 날카로운 레이더망은 커피 한 잔 얻어먹으러 어슬렁어슬렁 그 자리에 끼어든 마을 순경 해미시 맥베스마저도 표적으로 삼는다. 수상쩍게도 레이디 제인은 처음 만난 그들 모두를 두려움에 떨게 하는 의미심장한 말들을 던졌고, 그녀에 대한 사람들의 증오심은 점점 깊어진다. 그리고 얼마 후, 해미시의 불길한 예감대로 평화로운 로흐두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낚싯바늘에 물고기가 아닌, 사람의 시체가 낚여 올라온다. 범죄라고는 주정뱅이 술꾼들의 행패가 전부였던 로흐두에서 일어난 가장 강력한 범죄! 태평하게 순찰이나 돌며 지내온 순경 해미시는 과연 이 사건을 해결할 수 있을까? 그가 단지 알고 있는 것은 비밀을 가진 자는 위험하다는 것, 살인범은 다시 현장으로 돌아온다는 것, 그리고 모든 수사의 기본은 아는 것이 힘이라는 것뿐이다.
■ 언론사 서평
● 10점이 만점이라면 <해미시 맥베스 순경 시리즈>는 만점에 10점을 더 받을 만하다. _《버펄로 뉴스》
●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아늑한 코지 미스터리 시리즈. 마을의 순경과 주민들이 얼마나 현실적으로 그려지는지 머지않아 관광객들이 로흐두 마을을 찾기 시작할지 모른다. 그리고 셜록 홈스의 존재를 믿듯 해미시 맥베스의 존재를 믿게 될 것이다. _《덴버 로키 마운틴 뉴스》
● 비턴의 작품을 읽는 일은 땅속에 묻힌 보물을 발견하는 것과 비슷한 경험이자, 진정한 미스터리 대가의 작품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남다른 독서 경험이다. _《북 리스트》
● 해미시 맥베스는 갈수록 정감 가는 주인공이다. 독자들은 그의 소박한 외면 안에 모든 터무니없는 헛소리를 단번에 뭉개 버리는 기지가 숨어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_《시카고 선타임스》
● 터무니없이 엉뚱한 블랙코미디의 대가인 M. C. 비턴의 탐정소설은 미국에서는 숭배받는 경지에 이르렀다. _《더 타임스 매거진》
● 맥베스의 매력은 계속 더해질 뿐…… 재미있고 엉뚱하며 잘 만든 스콘처럼 말랑말랑하다. 이 시리즈의 책이라면 단 한 권도 놓치지 않을 것이다. _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
● 이 시리즈는 진정한 축복이다. _ 《애틀랜타 저널컨스티튜션》
● 최고급 몰트위스키처럼 풍부하고 따뜻한 맛이 느껴지는 최고의 오락물. _《휴스턴 크로니클》
● 따뜻하고 아늑한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독자들을 위한 작품. 물론 비턴의 작품에서라면 그 장밋빛 유리잔은 언제나처럼 어두운 빛으로 물든다. _《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
● 황당하면서도 진심 어리며 지극히 사랑스럽게, 해미시는 달콤하고 만족스러운 성공을 거둔다. _ 《퍼블리셔스 위클리》
● 비턴은 스코틀랜드 북부 지방의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그려 내며 간결한 언어로 그 지방의 정취를 포착해 낸다. _ 《라이브러리 저널》
● 스코틀랜드 북부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로흐두 마을을 다시 찾는 일은 언제나 특별한 기쁨이다. _ 메릴린 스타시오, 《뉴욕 타임스 북 리뷰》
■ 책 속으로
존 카트라이트는 호텔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더니 얼굴을 찌푸렸다. “저기 만날 얻어먹고만 다니는 마을 순경이 왔네. 호텔에는 커피를 여덟 사람분만 준비하라고 말해 두었는데. 분명 해미시는 커피 한 잔 얻어먹을 때까지 배고픈 개처럼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을 테지. 아래에 전화해서 커피 잔을 하나 더 준비해 놓으라는 편이 좋겠어.
저 순경한테 필요한 건 관심을 돌릴 만한 흥미진진한 살인 사건이야. 그러면 우리한테 걸리적거리지 않을 텐데. 경찰이랍시고 하루 종일 하는 일이라고는 마을을 어슬렁거리면서 사람들 발에 이리저리 거치적거리는 게 다잖아. 하천 감시관인 지미가 전에 하는 말로는 해미시 맥베스가 밀렵을 하는 것 같다던데.”
“설마 그럴 리가요.” 헤더가 말했다. “그러기엔 너무 게으른걸요. 그 사람도 어서 결혼을 하면 좋을 텐데. 벌써 서른다섯은 넘었을 거예요. 마을 처녀 애들은 대부분 한 번쯤은 해미시를 마음에 두고 애를 태운 적이 있대요. 도대체 그 사람 어디가 여자애들 마음을 끄는 건지 나는 전혀 모르겠지만요.”
헤더가 창가의 남편 곁으로 다가서자 존은 아내의 통통한 어깨에 팔을 둘렀다. 로흐두 마을의 순경인 해미시가 호텔 앞쪽으로 뻗은 부두를 따라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모자를 머리 뒤로 한껏 젖혀 쓴 채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있었다. 훤칠하니 큰 키에 길쭉하기만 한 체구는 어딘가 볼품없어 보이는 구석이 있었다. 그 마른 몸 위에 경찰 제복을 자루처럼 걸치고 옷소매가 미처 덮지 못한 끝자락에서 앙상한 손목을 드러냈고, 목이 긴 경찰 군화 위로는 털실로 짠 아가일 무늬의 긴 양말이 삐죽 고개를 내밀었다. 해미시는 챙이 있는 모자를 벗더니 붉게 타오르는 듯한 빛깔의 머리칼을 긁적였다. 그리고 제복 상의 안으로 손을 밀어 넣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한쪽 겨드랑이를 긁어 댔다. _본문 10~11쪽
“제발 좀. 순경한테 그냥 커피 좀 주면 안 되나요?” 에이미 로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소처럼 커다랗고 순한 눈망울에 잘 손질된 금발 머리칼과 부드럽고 풍만한 가슴을 지닌 여자였지만 뜻밖에도 손목만은 마치 정기적으로 테니스를 치는 사람처럼 튼튼하고 강인해 보였다.
“그럴 순 없지.” 레이디 제인이 고집스럽게 말했다. 존 카트라이트는 수첩을 펴 보는 척하면서 이 곤경이 속히 끝나기만을 기도했다. 도대체 왜 해미시는 어서 가 버리지 않는 것일까?
레이디 제인은 해미시에게 등을 돌리고 어디 한번 커피를 더 따라 보기만 하라는 듯이 마빈을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상황을 지켜보던 앨리스 윌슨은 더없이 비참한 기분에 휩싸였다. 도대체 왜 이토록 지독한 휴가에 온 것일까? 이곳에 오기 위해 앨리스는 아주 비싼 돈을, 그것도 자신이 감당하기에 도를 지나칠 정도로 비싼 돈을 지불했던 것이다.
그러나 앨리스는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에 이내 깜짝 놀라고 말았다. 순경이 꽉 끼는 바지를 입은 레이디 제인의 궁둥이를 엄지와 검지로 꽉 쥐고는 세게 꼬집어 버린 것이다.
“당신, 내 엉덩이를 꼬집었어!” 레이디 제인이 비명을 질렀다.
“어이쿠, 그럴 리가요.” 순경은 침착하게 대답하며 격분에 휩싸인 숙녀 옆을 능청스레 지나쳐 탁자로 다가오더니 직접 커피를 잔에 따랐다. “아마도 고지 각다귀일 겁니다. 그 각다귀는 이빨이 익수룡 못지않다니까요.”
순경은 창문가에 있는 안락의자로 어슬렁어슬렁 되돌아가더니 의자에 앉아 커피 잔을 소중한 듯 감싸 쥐었다. _본문 19~20쪽
“실제로 유부녀가 아닌 여자를 쫓아다니는 젊은이를 만나다니, 이렇게 흐뭇할 수가 없군요.” 레이디 제인이 딱히 누구에게랄 것 없이 사람들 전부를 향해 말했다. “나는 참으로 구식 여자라서 불륜은 죄악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하인을 유혹하는 것만큼이나 나쁜 죄악이지요.”
다른 사람들은 <업스테어즈 다운스테어즈>에나 나올 법한 레이디 제인의 말을 별생각 없이 흘려들었지만 제러미와 대프니 고어는 이상하리만치 흠칫하고 놀랐다. 제러미는 앨리스의 무릎에서 슬며시 손을 떼더니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고, 대프니는 손에서 커피 잔을 뚝 떨어뜨리더니 욕설을 내뱉었다. “그런 짓을 저질러서 끝이 좋을 리가 없지요.” 레이디 제인이 끈질기게 말을 이었다. “내가 아는 어떤 처녀는 스페인 출신 종업원을 유혹해 사랑의 도피를 해서는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지 뭐예요. 어떤 젊은이는 글쎄, 유부녀인 여급한테 들이댔다지요. 참으로 역겨운 짓거리들 아닙니까!”
오랫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대프니가 몹시 기분을 상했다는 것은 누가 봐도 역력했고 제러미는 어디 아픈 사람처럼 보였다. _본문 86~87쪽
앨리스는 나른하면서도 도발적인 기분에 휩싸였다. 영국제도 최북단의 희끄무레한 황금빛 공기를 헤치고 자동차가 달리는 동안 저물어 가는 태양이 나무와 수풀 사이로 마지막 햇살을 흩뿌렸다.
이 으스름한 땅거미의 빛 속에서도 풀은 짙은 초록빛으로 빛났다. 마치 동화에 나올 법한 초록색, 네버랜드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초록색과 황금색이었다. 이 순간 앨리스는 왜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요정의 존재를 믿었는지 그 이유를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마을 어귀를 지나면서 제러미는 자동차의 속도를 줄였다. 앨리스가 일전에 맥베스 순경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 키가 큰 금발 머리 여성이 아이리시 울프하운드종의 개 두 마리를 줄에 맨 채 길가를 따라 성큼성큼 걷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 여자가 바로 맥베스 순경이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앨리스는 남의 뒷소문을 이야기할 기회가 생기자 신이 나서 말했다.
“전혀 가망이 없겠어요.” 제러미가 쾌활한 말투로 자신도 모르게 레이디 제인과 똑같은 말을 했다. “프리실라 할버턴스마이스 양이잖아요. 제임스 할버턴스마이스 대령의 영애죠. 프리실라 양의 사진이 얼마 전에 《컨트리 라이프》에 실렸어요. 할버턴스마이스가는 이 부근의 땅을 거의 대부분 소유하고 있죠.”
“그런가요?” 앨리스는 갑자기 마을 순경에게 동질감을 느끼며 말했다. “하지만 저 여자분이 순경을 사랑할지도 모르잖아요.”
“그렇게 바보 같은 짓을 할까요? 나라고 해도 명함도 못 내밀 정도인데요.” _본문 97~98쪽
맥베스 부부는 해미시가 태어난 후 길게 터울을 두고 아들 셋과 딸 셋을, 신체적 조건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잇달아 낳았다. 수많은 켈트족 가정에서는 장남이 그 밑의 동생들이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것을 마땅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해미시는 봉급 대부분을 집으로 보내 줄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일부러 장래가 보이지 않는 마을 순경직을 선택했다. 해미시는 솜씨 좋은 밀렵꾼이기도 했기 때문에 로스크로머티에 있는 부모님의 농장에 정기적으로 사슴 고기와 연어 고기 선물을 보내 줄 수 있었다. 닭과 거위의 알을 팔아 얻는 약간의 푼돈 또한 부모님 집으로 보내졌다. 한편 스트래스베인에서 매년 열리는 언덕 달리기 경기에서 나오는 우승 상금도 있었다. 해미시는 벌써 5년 연속으로 우승을 차지하고 있었다.
소작농이었던 해미시의 아버지는 어린 여섯 자녀를 부양하기에 필요한 돈을 충분히 벌지 못하고 있었다. 해미시는 그 태평스럽고 착한 성품으로 세상의 다른 일들을 받아들인 것과 마찬가지로 장남으로 태어난 자신의 운명 또한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_본문 110~111쪽
존은 낚싯바늘에 걸린 무언가가 세차게 소용돌이치는 물살을 벗어나 얕고 잔잔한 물가로 끌려오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낚싯줄을 다시 감아 들였다. 통나무가 틀림없다고 존은 생각했다.
그 순간 대프니 고어, 평소에 냉정하고 좀처럼 동요하지 않는 바로 그 대프니가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공포로 가득한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아름다운 숲과 지저귀는 새들과 콸콸 소리를 내며 흐르는 개울의 풍광을 가르며 퍼져 나갔다.
앨리스는 선반처럼 평평하게 튀어나온 바위 위에 서서 발아래에 출렁이는 금빛 물살을 내려다보았다. 레이디 제인의 눈이 앨리스를 마주 보고 있었다. _본문 126쪽
“네, 뭐.” 해미시가 침대에서 내려서며 말했다. “몰래 숨어서 계단을 내려갈게요. 아무한테도 들키지 않을 겁니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프리실라가 살짝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해미시는 베개에 기대고 누운 프리실라를 내려다보며 싱긋 웃었다. “이렇게까지 도움을 줘서 정말 고마워요, 할버턴스마이스 양.” 그러고는 갑자기 몸을 굽혀 프리실라의 뺨에 입을 맞추더니 불덩이처럼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는 방에서 달음질쳐 나갔다.
“어머나.” 프리실라는 자신의 뺨에 손을 대고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닫힌 문을 빤히 쳐다보았다.
해미시는 토지 관리 사무실의 전화기 옆에 앉아 머릿속에 차곡차곡 들어찬 수많은 친지의 이름을 뒤적였다. 런던에는 로리가 있었고, 뉴욕에는 아치, 홍콩에는 피터, 에일즈베리에는 제니가 있었다. 에일즈베리는 옥스퍼드와 충분히 가까웠다……
마침내 해미시는 수화기를 집어 들고 다이얼을 돌리기 시작했다. _본문 23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