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기』『욕조』『사진기』의 작가, 후기 누보로망의 기수로 명성을 떨치며 세계 각국 다양한 언어층의 확고한 독자들을 확보하고 있는 작가 장 필립 뚜생의 신작 『도망치기』가 현대문학에서 출간되었다. 프랑스 문단의 ‘미니멀리스트’로 불리며 ‘무감동’의 소설, ‘무뚝뚝한’ 소설을 발표해온 뚜생은 인과론에 바탕을 두고 전개되는 전통소설과는 달리, 텔레비전, 욕조, 사진기 같은 지엽적이고 작은 사물을 소재로 다른 작가들이 짧게 설명하는 것을 길게, 길게 설명하는 것을 짧게 생략한 소설을 써왔다. 일상의 작은 소재들이 상징하는 것들을 간결하게 압축시키는 작업을 통해 인간의 본질과 그 본질 자체에 대한 끊임없는 탐색에 몰두하고 있는 그는 이제까지 없었던 감각적인 작품세계를 선보인 『도망치기』를 발표함으로써 각광을 받았다. 『도망치기』는 헤어지려고 하는 과정에 있는 두 남녀를 통해 이별로 치닫게 되는 인간 내면의 혼란한 감정의 속살을 드러내보인 작품으로, 2005년 프랑스에서 가장 실험적인 작품에 주는 ‘메디치상’을 수상하였다.
* 지은이 장 필립 뚜생 Jean Philippe Toussaint 1957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태어났다. 정치학을 전공했으며 알제리에서 2년간 프랑스어 교사 생활을 했다. 한때 영화를 제작하고자 하는 꿈이 있었으나, 경제적인 이유로 종이와 펜만으로도 가능한 문학 세계에 뛰어들었다. 1985년에 발표한 첫 소설 『욕조』는 발간 직후 이십여 개국 언어로 번역되어 명성을 떨칠 만큼 세계적인 주목을 끌었으며, 특히 일본에서는 거리에서 얼굴을 알아본 독자로부터 싸인 공세를 받을 만큼 인기작가로 대접받았다. 로브 그리예 이후의 후기 누보로망의 기수로 지목받았으며 프랑스에서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의 다양한 언어권에서 충실한 독자층을 확보하였다. 그의 작품들은 작은 소재를 상징적, 감각적으로 다룸으로써, 인간의 본질 자체에 대한 끊임없는 탐색에 몰두하고 있다. 2005년 『도망치기』로 프랑스에서 가장 실험적인 작품에게 수여되는 메디치상을 수상하였다. 주요 작품으로는『욕조』『사진기』『망설임』『텔레비전』『사랑하기』 등이 있다. 문학과 영화, 사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예술의 경계를 허물며 전방위적 활동을 보이는 그는 세 편의 영화를 감독했고, 몇 차례 사진전을 열었다. 영화에도 꾸준히 애정을 보이는 그는 2008년 『도망치기』에서 세 사람이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장면을 14분짜리 단편영화로 발표했다. * 옮긴이 이재룡 1956년 강원도 화천에서 태어났다. 성균관대학교 불문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브장송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문학평론가로 활발히 활동하면서 프랑스 문학을 국내에 소개하고 있다. 현재 숭실대 불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꿀벌의 언어』 등, 옮긴 책으로는 장 필립 뚜생의 『사랑하기』『욕조』『사진기』를 비롯해『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정체성』『일 년』『장의사 강그리옹』『해를 본 사람들』『거대한 고독』『고야의 유령』『모더니티의 다섯 개 역설』『코르다의 쿠바, 그리고 체』『벵갈의 밤』『부끄러움』『장엄호텔』『슬픈 흰곰의 노래』『로즈의 편지』『가을 기다림』『외로운 남자』『길고도 가벼운 사랑』『이별연습』『포옹』 등이 있다.
* 이 책은… 『도망치기』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이별’이라는 대전제 앞에서 사랑의 균열과 소멸, 존재의 욕망과 허무로 갈등하는 과정을 아주 섬세하게 그리고 있다. 한 남자가 사랑하던 여자와 헤어지려는, 혹은 헤어져가는 미완의 과정의 심리적 어려움을 그리고 있는 전작 『사랑하기』(2006년 현대문학 출간)의 연장선상에 있는, 또 하나의 이별을 그린 작품이다. 상하이와 베이징, 파리와 엘바 섬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도망치기』는 ‘나’의 시선에 의해 보여지는 배경과 ‘나’와 ‘그녀’가 헤매고 다니는 낯선 거리의 분위기를 통해 ‘이별’이라는 감정의 기복을 감성적인 터치로 부각시키고 있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주인공의 감정과 위태로운 이별의 분위기를 영상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 뚜생 특유의 단문과 교차하는 만연체 문장으로 그 분위기를 더욱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들은, 어느 비평가가 서구적이라기보다 동양적인 분위기, 특히 왕가위의 분위기를 느꼈다고 말할 정도로 감각적이고 몽환적이다. 미니멀리즘 미학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준『도망치기』는 서사가 없던 미니멀한 전작들과 비교하면 이야기로서의 줄거리가 있다는 점에서 뚜생의 감성적 변화를 확인시켜준 작품이다. 이러한 뚜생의 변화는 그가 기존에 고수했던 ‘무감동’에서 ‘감각’으로의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는 평가의 요인이기도 하며, 단연 현대소설의 변모를 보여준 것임에 틀림이 없다. * 줄거리 ‘마리’와 헤어지기 전 여름, ‘나’는 상하이로 여행을 떠난다. 공항에 마중 나온 마리의 홍보담당 ‘장 지앙지’는 내게 선물로 중고 휴대폰을 건넨다. 나는 장 지앙지가 데려간 전시장에서 ‘리기’를 만난다. 여행의 혼돈과 공포 그리고 일탈의 욕망에 사로잡힌 ‘나’는 ‘리기’에게 충동적인 욕망을 느낀다. 그녀는 내게 베이징 여행을 제안한다. 영문을 알 수 없게도 우리가 만나기로 한 장소에 장 지앙지도 함께 나와 있다. 리기와 나는 베이징행 야간열차의 침대칸에서 몰래 빠져나와 키스를 나눈다. 리기와 내가 가까워지려는 그때, 나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한다. 마리가 자신의 아버지의 부음을 전하기 위해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서 건 전화다. 마리는 슬픔으로 정신없이 파리 거리를 헤맨다. 베이징에 도착한 장 지앙지와 나는 시내 관광을 하고 볼링을 하러간다. 볼링장에 돌연, 종이가방을 든 리기가 나타난다. 갑자기 한 통의 전화를 받은 장 지앙지는 리기와 나를 오토바이에 태우고 도망치기 시작한다. 이유도 모른 채 나는 공포에 사로잡혀 탈주에 동참한다. 장 지앙지는 의문의 종이가방을 어느 바에 감추고 서둘러 나를 거리에 내려준 뒤 리기와 함께 사라진다. 호텔로 돌아온 나는 곧바로 마리 아버지의 장례식이 치러지는 이탈리아 엘바 섬으로 출발한다. 장례식 운구행렬을 따라가던 마리는 섬에 막 도착해 갑판 위에 서 있는 나를 보았을 것이고, 마침내 나는 장례식이 거행되는 성당 먼발치에서 마리를 바라본다. 마리 역시 나를 발견하고 슬픔과 고통이 뒤섞인 감정을 죽이며 냉정과 위엄이 서린 표정으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마리는 성당에서 한마디 말도 건네지 않고 사라져버린 나를 찾아 헤매고, 결국 마리와 나는 재회한다. 우리는 아버지가 죽은 곳일지도 모르는 해변에 함께 가는데 마리는 홀로 바다 저 멀리로 헤엄쳐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