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 언어로 사유하는 유럽 최고의 지성 조르조 아감벤,
침묵과 광기 속에 거주한 시인 프리드리히 횔덜린을 잇다
우리 시대가 잃어버린 인간다움, 그 복원에 관한 매혹적인 사유
“40세가 되던 해에 횔덜린은 인간으로서 이성을 잃는 것이
현명하다고, 그러니까 재치 있다고 생각했다.” -로베르트 발저
세계적 석학으로 꼽히는 우리 시대 가장 도전적인 사상가 조르조 아감벤의 『횔덜린의 광기―거주 하는 삶의 연대기 1806~1843』이 현대문학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은 ‘시인들의 시인’이자 철학자들이 가장 많이 호출한 작가인 프리드리히 횔덜린의 삶과 문학을 통해 그의 침묵과 광기를 철학적으로 재조명한 작품이다. 문학, 철학, 신학, 정치학 등 다양한 분야를 가로지르며 첨예한 언어로 독창적인 사유를 펼쳐온 조르조 아감벤은 유럽 문학사상 가장 비극적인 시인을 호출함으로써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라는 현대성이 끝내 외면한 근본 질문을 급진적으로 소환한다.
‘횔덜린’ 하면 반생을 정신착란 가운데 외롭고 불우하게 살아야 했지만 셸링, 헤겔과 함께 독일 이상주의 철학에 기초를 놓고 헤세와 릴케, 파울 첼란 등 독일의 내로라하는 후대 문학가뿐 아니라 니체와 하이데거, 벤야민, 블량쇼 등 사상가에게까지 깊은 영향을 준 천재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삶은 36세까지 세상과 소통하며 살았던 전반기, 그리고 이후 36년간 정신착란에 빠져 외부 세계와 단절한 채 튀빙엔의 한 목수 집에 은둔하며 살았던 후반기로 나뉘는데, 아감벤은 소위 ‘광기의 시기’로 정의되어온 1806년 이후의 삶과 작품을 조심스레 더듬으며, 철저히 문학적인 동시에 존재론적 독해를 시도한다. 이를 통해 횔덜린의 광기를 단순히 병리적 차원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인간 존재의 근원적 방식, 즉 ‘거주하는 삶das wohnende Leben’이라는 시적, 철학적 가능성을 포착한다. 그럼으로써 그가 병들고 무너진 존재가 아니라 “인간은 이 지상에 시적으로 거주한다”는 자신의 문학적 명제를 온 삶으로 증명해낸 시인이었음을 밝힌다.
『횔덜린의 광기』는 단지 한 시인의 삶에 대한 분석을 넘어 철학과 문학이 공유하는 존재론적 질문의 자리를 복원하려는 시도이자, 여전히 “궁핍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잃어버린 인간다움을 회복하기 위한 미학적 고찰이다. 따라서 이 책은 문학과 예술이 단순한 표현의 도구를 넘어 단절된 삶의 균열을 어떻게 봉합하고 새로운 삶의 가능성으로서 어떤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지 성찰해볼 계기를 마련해줄 것이다.
아감벤에게 횔덜린의 삶은 하나의 ‘패러다임’이다…… 그는 근대성의 여명기에 ‘광인’으로 취급되었던 시인 횔덜린의 연대기 복원을 통해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 물음에 답한다. 이 작업들에서 아감벤은 성공적으로 작동한다고 간주되었던 근대성의 시스템, 즉 ‘인류학적 기계’의 심각한 오작동을 지적하고, 인간이 세계에 ‘거주’하는 대신 그것을 ‘점령’해왔다고 비판한다. 그가 인간다움의 가능성을 회복할 대안적 영역으로 지시하는 곳은 다름 아닌 문학과 예술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근대성에 의해 내쳐진 횔덜린은 단순한 문학적 인물을 넘어, 근대성 자체를 재고하게 만드는 ‘실패의 패러다임’이자 ‘시스템의 균열’로서 아감벤의 사유 안에서 결정적인 위상을 점하게 된다. -「옮긴이의 글에서」
□ 지은이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
이탈리아의 철학자이자 미학자, 비평가. 1942년 로마에서 태어났다. 시몬 베유의 정치철학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파리의 국제철학원, 이탈리아 베로나대학교 등을 거쳐 베네치아 건축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1995년 푸코의 생철학과 슈미트의 비상사태를 토대로 로마 시대의 ‘호모 사케르homo sacer’를 현대 정치에 비추어 쓴 『호모 사케르』를 발표하면서 이 시대 가장 중요한 사상가 반열에 올랐다. 벤야민과 하이데거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푸코, 비트겐슈타인, 데리다, 블랑쇼, 들뢰즈, 바디우 등의 현대 사상가들과 플라톤, 스피노자, 유대-기독교 경전의 이론가와 학자들을 아우르는 사유 탐험을 지속해왔다. 2015년에는 20여 년에 걸쳐 집필한 9부작 『호모 사케르 프로젝트』를 완성했다. 그의 저서는 전 세계에 번역되고 있으며, 국내에도 『피노키오로 철학하기』『내가 보고 듣고 깨달은 것』『저항할 권리』『얼굴 없는 인간』『내용 없는 인간』『불과 글』『말할 수 없는 소녀』『왕국과 영광』『행간』『도래하는 공동체』『세속화 예찬』『목적 없는 수단』『예외상태』 등 다수의 도서가 번역 소개되었다.
□ 옮긴이 박문정
이탈리아 작가와 문학을 중심으로 근현대 유럽 사회의 문화와 정치를 연구하는 데 관심이 있다. 한국외대 이탈리아어과를 졸업한 후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안토니오 타부키와 지식인의 역할에 관한 논문으로 이탈리아 피렌체대학교, 프랑스 소르본 4대학, 독일 본대학 등 3개 대학 공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외대 외국문학연구소 인문학술사회연구교수로 재임하고 있다. 아감벤의 팬데믹에 대한 인문적 사유를 담은 에세이 모음집 『얼굴 없는 인간』과 『저항할 권리』, 『피노키오로 철학하기』를 우리말로 옮겼다.
“시는 철학이 되어야 하고, 철학은 시가 되어야 한다”
가장 깊고 아픈 방식으로 아감벤에 응답한 시인 횔덜린
“시는 철학이 되어야 하고, 철학은 시가 되어야 한다.” 이는 아감벤의 사유를 관통하는 핵심 명제로, 그는 이번 『횔덜린의 광기』에서 시와 철학의 오래된 동행을 새로운 방식으로 선보인다. 횔덜린은 아감벤의 오랜 철학적 기조에 가장 깊고 아픈 방식으로 응답한 시인이며, 횔덜린의 생애와 문학은 그가 평생 다뤄온 문제들에 가장 깊이, 가장 조용하게 응답하는 일종의 ‘철학적 실천의 장’이다.
이 책에서 아감벤은 횔덜린의 시를 단순히 언어의 형식으로 보지 않고, 존재론적 진리를 탐사하는 하나의 ‘철학적 사건’으로 읽는다. 이를 통해 횔덜린은 ‘광인’이 아니라 언어를 극한으로까지 몰아붙이면서 오히려 철학보다 더 철학적인 ‘시적 언어의 가능성’을 열어 보인 인물로 다시 태어난다.
철학은 무엇보다 한 개인이 개인들 사이에서 느끼는 소외다. 즉 철학자가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에 거주하면서 여전히 이방인인 채로, 여전히 부재하는 조국에게 집요하게 말을 거는 존재 방식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철학적 조건의 역설을 극적으로 보여준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조국에게 너무나 낯선 존재가 되어 결국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그 선고를 받아들임으로써 자기를 추방한 바로 그 조국에 여전히 구속되어 있음을 천명한다. 근래의 문턱에 이르러 시인들조차도 더 이상 조국에게 말을 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시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하더라도 들을 수 없고 들으려 하지 않는 조국에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모순이 폭발하는 지점에 바로 횔덜린이 있다. 이 순간, 시인 횔덜린은 철학자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며……‘철학이라는 병원’에서 피난처를 찾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결국 시인은 자신의 조국이 그를 정신병자로 진단한 것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럼에도 그는 마지막까지 글쓰기를 멈추지 않고, 어두운 밤 속에서 ‘독일의 노래’를 끈질기게 찾아 헤맸다. (48~49쪽)
“나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삶을 형상으로 드러낸다는 것
『횔덜린의 광기』는 구성면에서도 특이한 면모를 보인다. 아감벤은 철학적 분석이나 문학이론적 해석보다 먼저 횔덜린의 생애를 시기별로 구성한 일종의 연대기적 서술을 채택한다. 여기에 시인과의 대화와 편지, 기록, 문헌, 진단서, 주변 인물의 증언들을 통해 횔덜린의 생애를 입체적으로 나열하는데, 이러한 구성적 선택은 한 인간의 삶은 결코 분석이나 해석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오직 ‘형상’으로서만 접근할 수 있다는 믿음에 기인한다.
횔덜린은 말년의 삶 속에서 스스로 자신의 존재로부터 모든 역사적 흔적을 제거하기로 결단한 인물이었다. 전기 작가들의 가장 오래된 증언에 따르면, 그는 일관되게 “나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Es geschieht mir nichts”라고 말하곤 했다. 이 단언은 자기 삶의 사건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더 이상 사건의 연속으로 환원할 수 없는 어떤 ‘형상’으로 전환하는 시적 선언이다.
횔덜린이 탑에서 보낸 삶은 이 형상적 진실에 대한 끊임없는 검증이다…… 형상 안에서의 삶은 순수하게 인식 가능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결코 그 자체로 앎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 책에서 시도하려는 바처럼, 삶을 형상으로 드러낸다는 것은 삶을 앎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포기하고 그의 삶을 훼손되지 않은 인식 가능성 자체로 지켜내는 것을 의미한다. (17~18쪽)
따라서 아감벤에게 있어 연대기란 단순한 사실의 배열이 아니라, 오히려 그 형상성의 리듬을 따라가는 윤리적, 철학적 실천에 다름 아니다. 광기 이후의 횔덜린을 분석하거나 해석하려는 모든 시도는 그 삶의 진실을 흐릴 뿐,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가 아니라 그의 삶이 ‘무엇을 견디고 있었는가’다. 탑 안에서의 고요한 일상, 기이한 응답, 그리고 시의 잔광들은 인식될 수는 있지만 해석될 수 없는 ‘형상 안에서의 삶’을 방증한다.
“인간은 이 지상에 시적으로 거주한다”
거주 불가능한 시대를 위한 거주의 철학
아감벤은 “인간은 이 지상에 시적으로 거주한다”라는 횔덜린의 시구에서 존재론의 핵심 명제를 발견한 하이데거를 깊이 있게 계승한다. 하이데거는 횔덜린의 시를 통해 인간 존재의 본질을 사유했으며, 시야말로 인간이 세상과 진정으로 관계 맺는 방식이라 보았다. 즉 “시란 존재를 언어 속에서 근원적으로 보존하는 행위”이며, “시적 거주란 인간이 존재에 응답하는 가장 본질적인 거주의 형식”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아감벤은 하이데거가 종국에는 신학적 구조 안에 머물고 있음을 지적하며 삶의 구체적인 형식이나 실천의 가능성을 열어놓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와 거리를 둔다.
횔덜린은 신들의 부재를 비극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곧 그의 시대를 규정하는 방식으로 사유하고 경험한다. 블량쇼에서 하이데거에 이르기까지 후기 횔덜린의 무신론에 주목한 이들은 횔덜린의 대표 시 「빵과 포도주」의 한 구절을 종종 인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잦은 인용에도 그들은 횔덜린이 보여주는 (어쩌면 니체조차 도달하지 못한) 일종의 신학적 허무주의를 간과했던 듯하다. 이때 신의 죽음이나 부재는 결코 비극적인 상황도 아니며, 후기 하이데거처럼 또 다른 신적 형상의 도래를 기다리는 어떤 상태로도 이해되지 않는다. 오히려 횔덜린은 “고대의 탄탈로스처럼”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을 볼 수 있는 심오하면서도 역설적인 통찰력으로 신들과의 이별을 목가 또는 희극이라는 시적, 실존적 형식 속에 위치시킨다. (79쪽)
아감벤에게 ‘거주한다는 것’은 단지 공간에 머무는 물리적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언어 속에, 침묵 속에, 무너진 세계 속에서조차 자신을 일상적으로 지속하는 존재의 형식이다. 흥미롭게도 아감벤은 이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고대 그리스어 문법에서 기원한 중간태 개념(주체가 행위자인 동시에 대상이 되는, 능동도 수동도 아닌 상태. 가령 ‘기뻐하다, 부끄러워하다, 미치다와 같은 동사)을 끌어오기도 한다.
아감벤은 시인 횔덜린의 삶이야말로 이러한 ‘중간태적 삶’의 전형이라고 보았다. 횔덜린은 강한 의지를 통해 위대한 업적을 성취한 능동태적 영웅도, 시대에 의해 일방적으로 희생된 수동태적 피해자만도 아니었다. 그의 삶은 의지적 결단 이전에 존재하는 순수한 성향과 횔덜린만의 고유한 습관에 따라, 그 자신에 의해 끊임없이 영향을 받으며 ‘살아진’ 삶에 가까웠다. (348쪽)
횔덜린은 정신적 침묵의 시기에도 시작詩作을 완전히 멈추지 않았으며, 이 시기의 언어는 파편적이고 균열되어 보이지만, 오히려 그 안에서 철학과 시, 광기와 사유의 경계가 무너진 새로운 언어 실험이 전개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횔덜린은 단지 거주를 상실한 존재가 아니라, 새로운 거주의 가능성을 열어젖힌 인물로 해석된다. 그는 언어가 무너지는 곳에서 새로운 언어의 형식을 탐색했고, 철학이 도달하지 못한 경계에서 삶을 지속하는 방식을 실험했다. 아감벤은 이러한 횔덜린의 실존과 시를 통해 현대인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세계 속에 어떻게 거주할 수 있는가라는 철학의 가장 오래된 질문을 던진다. 따라서 이 책은 하나의 전기나 비평서이기보다는 우리로 하여금 다시 쓰는 시, 다시 생각하는 철학, 다시 살아보는 삶의 가능성을 열어 보이려는 횔덜린의 열망이 깃든 하나의 안내서이다.
횔덜린에게 거주하는 삶은 “인간은 이 지상에서 시적으로 거주한다”라고 했던 것처럼 ‘시적dichterisch인 삶’이다. 독일어 동사 ‘dichten(시를 짓다)’은 어원적으로 라틴어 ‘dichtare(받아쓰게 하다, 구술하다)’에서 유래하는데, 고전 작가들이 종종 필경사에게 자신의 작품을 구술하기 시작하며 점차 ‘시를 짓다’ ‘문학 작품을 창작하다’라는 의미로 자리 잡았다. 시적인 삶, 즉 시적으로 거주하는 삶이란 하나의 ‘구술된 삶’, 곧 우리가 스스로 결정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살아지는 삶이다. 이는 하나의 습관, 하나의 주어짐에 따른 삶으로 우리는 그것을 소유할 수 없고, 다만 거주할 수 있을 뿐이다. (34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