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천사
지옥의 쓰기와 천국의 읽기를 지닌 책이다. 저자는 수년에 걸쳐 매달 쏟아지는 프랑스 소설들을 섭렵하고 그 진수를 뽑아 지적인 한국어 문장으로 정리한다. 이 힘든 작업은 감히 누구도 흉내 내기 어려운 지옥의 쓰기라 할 만하다. 그러나 지옥의 쓰기는 천국의 읽기를 보장한다. 프랑스 신작 소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한국 독자들은 편안히 문학적 주유천하를 하면서 프랑스 문단의 높은 지성에 깊숙이 참여할 수 있다. 이 VIP급 문학적 서비스는 프랑스에서 프랑스 독자들도 누리기 어려운 독서 경험일 것이다.
지옥 속에서 씌어졌기에 천국 속에서 읽을 수 있는 이 책에는, 프랑스의 최신 문학적 지성과 저자의 비평적 지성이 불꽃 튀기며 만난다. 그리하여 그것은 프랑스 최신 소설 이야기를 넘어서서 인간의 심연에서부터 사회적 혼돈과 역사의 폭력 그리고 언어의 한계와 예술의 미지에 이르기까지 확대되면서 예사롭지 않은 지혜와 통찰과 성찰의 문을 연다. 그리고 이 문을 들어가다 보면 다시 길이 열린다. 그 길은 우리 모습 우리 시대 우리 문학에 대한 반성적 사유로 이어진다. 이 책은 타자를 통해 자기를 더 깊이 만나게 해주는 최고급 디바이스라 할 수 있다. 우리 문단과 지성계의 예외적 수확이다.
_이남호(문학평론가·고려대 교수)
■ 본문 중에서
흔히 소설은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한다. 19세기 소설가들이 작품 제명 밑에 부제로 붙인 ‘풍속 연구’나 ‘1830년 연대기’ 등을 보면 당시 소설이 겨냥한 목표가 무엇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무릇 소설가라면 거리와 항구를 주유하며 인간사에 두루 밝아야 할 테지만 요즘은 누구나 TV와 컴퓨터로 세상 구석구석에서 돌아가는 일을 쉽게 엿볼 수 있다. 과골삼천?骨三穿이라 했던가. 어찌 보면 뼈가 무르도록 책상물림한 작가보다는 험한 현실을 몸으로 겪은 장삼이사가 세상 물정에 더 밝다. 소설가가 현실을 반영하는 특권적 지위에서 물러나 그나마 남들보다 조금 더 아는 세상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보다 앞서 발표된 남의 소설세계이다. 그래서 소설은 세상의 거울이기에 앞서 남의 소설이 반영된 거울이다. (9쪽)
소설은 다른 어떤 예술 장르에도 존재하지 않는 마음의 창과 마술의 눈이 허용되는 유일한 장르이다. 그래서 다른 예술보다도 소설에서는 인간의 내면성이 가장 치밀하고 적절하게 다뤄질 수 있다. (50쪽)
예술가는 생래적으로 혁명가이다. 특히 아방가르드는 명칭 자체가 군사 용어에서 따온 것이라 일전불사一戰不辭의 비장한 느낌을 풍긴다. 기왕의 오늘보다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내일을 설계하고 그 실현을 위해 과감한 지름길을 택한다는 점에서 예술과 혁명은 의기투합할 소지가 크다. 그래서 혁명과 전위예술은 모두 미래파이다. (71쪽)
타자에 대한 무지와 오해를 거둬내는 데에 문학만큼 효과적인 것은 없다. 과거를 접고 미래를 향한 기투가 인간의 본질이라고 아무리 외친들 식민지 역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우리네에서도 지난 세기에 탄생한 친일파, 위안부, 부역자와 같은 단어가 여전히 강력한 울림을 갖고 지금 작동하고 있지 않은가. (166쪽)
우리가 현실, 세계, 사실이라고 믿는 모든 것은 누구인가에 의해 매개된 현실, 즉 스펙터클이요 환상이다. 그리고 처음에는 현실을 반영하고 재현한 듯한 스펙터클은 어느덧 현실과 대중을 외면하고 자신만의 독립된 논리로 재생산된다. 우리는 그저 그 현란한 언변과 표정과 액션에 홀린 수동적 구경꾼으로 전락하고 만다. (346-347쪽)
나쁜 때에 나쁜 곳에 존재했다는 이유만으로 삶이 꼬이거나 아예 짧아진다. 딱히 프랑스에서만 그러했겠는가. 만약 20세기 초 한반도에서 태어나 어쩌다가 장수한 한 남자의 삶을 머릿속에 그려본다면 파올의 삶과 견주어 그 신산한 행로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일제 치하, 태평양전쟁, 해방, 한국전쟁, 피폐한 전후, 유신시대와 군사정권, 다시 IMF의 경제대란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느 누가 온전할 수 있을까. (477-478쪽)
한 개인의 삶이 역사와 만나는 지점에서 자서전의 의미가 생긴다. 르 클레지오가 어린 시절에 겪었던 공포와 허기가 개인의 체험에 머물지 않고 역사의 일부가 되는 것은 전쟁이 매개되었기 때문이다. 전쟁을 겪은 작가의 자서전은 모두 참여문학, 일종의 앙가주망engagement이 될 수밖에 없다. (579쪽)
근래에 자서전, 오토픽션과 관련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이와 더불어 소설이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문제를 돌아보는 숙제가 주어졌다. 살인 사건을 추적한 보고서 형식의 글, 어린 시절 겪었던 근친상간의 고백과 같은 글이 그저 잠깐 스치고 지나가는 현상이 아니라 하이브리드 장르, 형식 파괴의 실험, 파격적 자기고백과 같은 평가를 받으며 연이어 주요 문학상을 받은 바 있다. 에마뉘엘 카레르가 주장하듯이 “문학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공간”이라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문학에서 논의되는 참과 거짓, 픽션과 논픽션 등과 같은 기본 개념에 대한 논의가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이 논의가 중요한 이유는 적어도 현재 프랑스 소설의 상당 부분이 이와 직간접적으로 연계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현대소설이 허구와 현실, 진실과 거짓 그 중간쯤 어느 회색 지대에서 오가는 양극성장애를 앓고 있는지도 모른다. (646쪽)
■ 차례
소설을 비추는 소설 · 7
어떤 사랑 · 27
상처받은 남자들 · 47
일방적 폭행 · 69
춤추는 생쥐 · 99
아름다운 할머니 · 117
알제리 가족사 · 137
여섯 번째 주인 · 167
공부하는 동물 · 189
벼랑 끝에 선 화가들 · 209
생의 전환점 · 241
한 몸, 두 영혼 · 261
구약 외경 「집회서」 44장 9절 · 285
거울과 수정구슬 · 305
동심이 깨지는 나날들 · 329
죽음의 천사 · 349
동식물 문학 · 369
오리와 파리 그리고 붉은 머리 · 387
걸어가는 사람 · 415
전지적 일인칭 화자 · 435
캐나다적인 삶 · 453
기억의 의무 · 473
다시 떠오르는 사람들 · 491
표범을 찾아서 · 515
소설가의 가을 · 535
대체역사소설의 가능성 · 553
영원한 유배자 · 571
카라바조의 수난 · 587
빠르지만 너무 지나치지 않게 · 607
이상한 사건 2 · 627
에필로그 · 648
참고 문헌 · 650
■ 지은이 : 이재룡
1956년에 태어나 성균관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브장송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숭실대학교 불어불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꿀벌의 언어』 『소설, 때때로 맑음 1·2』가 있으며, 역서로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정체성』, 장 필립 뚜생의 『욕조』 『사랑하기』 『도망치기』, 미셸리오의 『불확정성의 원리』, 장 에슈노즈의 『일 년』 『달리기』, 아니 에르노의 『부끄러움』, 필립 빌랭의 『포옹』, 조엘 에글로프의 『장의사 강그리옹』 『해를 본 사람들』 『도살장 사람들』 『다른 사람으로 오해받는 남자』, J.M.G. 르 클레지오의 『오니샤』, 앙투안 콩파뇽의 『모더니티의 다섯 개 역설』, 로랑 모비니에의 『이별 연습』, 프레데릭 파작의 『거대한 고독』, 파스칼 로즈의 『로즈의 편지』, 알베르토 코르다의 『코르다의 쿠바, 그리고 체』, 외젠 이오네스코의 『외로운 남자』, 자크 아탈리의 『깨어 있는 자들의 나라』, 조르주 페렉의 『W 또는 유년의 기억』, 피에르 드리외라로셸의 『도깨비불』, 다이 시지에의 『달도 뜨지 않은 밤에』, 로맹 가리의 『인간의 문제』, 에리크 뷔야르의 『그날의 비밀』 『대지의 슬픔』 외 다수가 있다.
▲ 이 책에 대하여
우리의 심연을 들여다보게 하는 서른 가지 문학적 디바이스!
문학평론가이자 프랑스 문학 번역가로 활발하게 활동하며 예리한 분석력과 통찰력, 지성미 넘치는 문체로 독자들을 매료시킨 이재룡 교수의 비평에세이 『소설, 때때로 맑음』 세 번째 권을 출간한다. 2019년 12월, 월간 『현대문학』에 무려 8년에 걸친 연재에 마침표를 찍으며, 2018년 『소설, 때때로 맑음 2』 출간 후 3년 만에 내놓는 마지막 저작이다. 프랑스의 최신 문학 동향과 흐름을 기민하게 포착해, 문학적 성취가 두드러지는 다양한 분야의 화제작, 문제작들을 선별하여 현장 비평가답게 소개한다. 더불어 정치, 사회, 문화, 역사, 환경 등 시대를 대변하는 문학 작품을 둘러싼 다방면의 정보들을 바탕으로 비평적·객관적 시선을 통해 프랑스 소설과 문학의 기능을 고민해온 오랜 작업의 완결편이라 할 수 있다.
수록된 30여 편의 글에는 각 편별로 테마 작품과 작가가 등장한다. 밀란 쿤데라, 장 필립 뚜생, 아니 에르노, 로맹 가리 등을 비롯한 프랑스의 대표적 현대 문학 작품들을 국내에 번역 소개해온 저자는 이 책에서 플로베르, 에밀 졸라 등 대문호의 고전에서부터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파트릭 모디아노, J.M.G. 르 클레지오 등 거장의 반열에 오른 작가들의 최신작과 내놓는 작품마다 프랑스 문단에 화제를 몰고 오는 미셸 우엘벡, 자기만의 분야를 개척하며 독자들의 마음을 훔친 실뱅 테송 등 베스트셀러 작가들의 대표작까지 국내 미번역 신작을 포함한 50여 편의 작품을 비평에세이의 테마로 삼고 있다. 작품 분석뿐 아니라 이와 관련 있는 최근 프랑스 문학계 크고 작은 이슈들, 방대한 문학사적 자료와 작가의 흥미로운 에피소드 및 중요 정보들이 폭넓게 곁들여지면서 상호 텍스트성으로 함께 언급되는 작품은 150여 편에 이르는 가히 총체적 교양서로 자리매김한다.
저자는 이 고단하고 녹록지 않은 작업을 두고, ‘에필로그’에서, “매달 프랑스 현지의 일간지와 잡지에 실린 서평을 참고하여 작가를 고르고 작품을 읽는 것은 행복한 일이었지만 글로 옮기는 재간은 시간이 지나도 늘지 않고 갈수록 타성에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고 토로한다. 그러나 시간이 더해갈수록 독파해야 될 책 종수가 산더미처럼 쌓일 수밖에 없는 다독의 독서 방식과 전방위적으로 문제작들의 핵심을 파고드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동원한 언어의 밀도는 하나의 완성될 건축물을 위해서 뼈대에 살을 붙이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방대한 독서 편력의 이야기는 비단 프랑스 문학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소설, 때때로 맑음 3』에서 주목한 프랑스 최신 현대문학의 흐름은 “사실의 소설”이라고 적시하면서, 인위적 구성을 배제한 채 삶의 편린을 재구성한 진실에 가까운 픽션 아닌 픽션이 주목을 받는 현 추세를 여러 작품을 통해 다각적으로 조명한다. 실존 인물의 실제적 삶을 객관적으로 보여주고자 한 베로니크 올미의 『바키타』, 놀라우리만치 솔직하고 거침없는 자전소설로 화제의 중심에 선 크리스틴 앙고의 『생의 전환점』, 2차 대전 당시 전쟁과 인간의 야만성을 고발하는 에리크 뷔야르의 『그날의 비밀』과 올리비에 게즈의 『나치 의사 멩겔레의 실종』 등은 모두 같은 맥락에서 논의할 수 있는 텍스트들이다. 작가는 최근 “오토픽션과 관련된 논란이 끊이지 않”는 한국 문단계의 현주소를 돌아보며, “소설이 무엇인가” 다시 고민하는 시간을 가진다. 더불어 “문학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공간”이라는 에마뉘엘 카레르의 말에는 동의한다면서도 “현대소설이 허구와 현실, 진실과 거짓 그 중간쯤 어느 회색 지대에서 오가는 양극성장애를 앓고 있는지도 모른다”며 일침을 놓는다.
문학과 예술, 삶과 세계에 대한 냉철한 분석력을 동원한 비평적인 사유의 매력을 십분 발휘한 이 책에 대해 이남호(문학평론가?고려대 교수)는 프랑스 문학의 정수만을 정리해놓은 이 작업은 정작 프랑스 독자들도 누리기 어려운 독서 경험이라면서, 저자의 “누구도 흉내 내기 어려운 지옥의 쓰기”는 독자에게 보다 간결하고 접근이 용이한 “천국의 읽기를 보장한다”라고, 문학을 향유할 독자들에 대한 저자의 그칠 줄 모르는 열정과 투지를 되짚는다. 또한 “프랑스 최신 소설 이야기를 넘어서서 인간의 심연에서부터 사회적 혼돈과 역사의 폭력 그리고 언어의 한계와 예술의 미지에 이르기까지 확대되면서 예사롭지 않은 지혜와 통찰과 성찰의 문을 연다. (……) 타자를 통해 자기를 더 깊이 만나게 해주는 최고급 디바이스라 할 수 있다. 우리 문단과 지성계의 예외적 수확이다”라며 상찬을 아끼지 않는다.
작가의 책을 나침반 삼아 풍부한 스토리텔링과 흥미로운 스펙터클의 세계에 발을 들인 독자는 아름다운 프랑스 문학과 우리 시대 한 지성의 비평적 시선의 그 불꽃 튀는 만남의 현장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