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의 소설이 그 자신이 말하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말하게 할 수도 있을까. 황종연의 소설 읽기는 최상급의 비평이 보여주는 심미와 통찰, 경이로운 지성의 힘으로 한 편의 소설에 스며든 의미의 맥락을 정확하고 풍성하게 일깨운다. 명작 이후의 명작을 발견하고 호명하면서 황종연의 언어는 바로 그 명작의 운명을 함께 수행한다. 비평이 작품을 읽는 일이 이토록 아름답고 정밀한 사유의 곡선과 언어를 수반할 수 있을까. 말 그대로 그의 소설 읽기가 ‘명작’이 되고 있다. 지금 우리 시대 최량의 소설들을 황종연이 그려놓은 문학의 성좌를 따라가며 읽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 행운이다.
―정홍수(문학평론가)
클래식의 어원 클라시스는 함대艦隊라는 뜻이어서 클래식은 함대를 소유할 수 있는 재력을 가진 최상위 계급을 의미하는 말이 되었다. 황종연이 운용하는 레퍼런스의 목록을 볼 때마다 나는 거대한 함대가 진군하는 환영이 보이고, 내가 넘볼 수 없는 능력을 가진 지성의 최상위 계급이 있음을 실감한다. 이 함대를 두고 ‘현학적’ 운운하는 사람은 핵심을 놓치고 있는 것인데, 왜냐하면 황종연은 “비평은 세상에서 알려지고 사유된 최상의 것을 배우고 퍼뜨리려는 사심 없는 노력”(매슈 아놀드)이라는 명제를 실천하기 위해 언제나 거인들의 어깨 위에서 시작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30년간 변함없는 이 압도적인 치열함이 황종연 자신을, 전후세대와 4·19세대 이후 한국 평단의 드문 거인으로 만들었다. 이 책은 작품론의 클래식이고, 우리가 올라타야 할 거인의 어깨다.
―신형철(문학평론가)
서문을 대신하여
문학적 동물들의 아나키즘―최윤, 「회색 눈사람」
여성의 슬픈 향유―신경숙, 「배드민턴 치는 여자」
하이퍼리얼한 타자의 환각―윤대녕, 「카메라 옵스큐라」
사랑이 상상의 베일을 벗을 때―전경린, 「꽃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민중의 탈신화화와 재신화화―김소진, 「건널목에서」
이야기 전승의 놀이와 정치―성석제, ?조동관약전?
고독한 대중문화 마니아의 타나토스―김영하, 「바람이 분다」
스크린을 보는 눈의 역설―하성란, 「당신의 백미러」
세속 너머를 향한 식물-되기―한강, ?내 여자의 열매?
동물화한 인간의 유물론적 윤리―은희경, 「내가 살았던 집」
순진한 사람들의 카니발적 공동체―윤성희, 「유턴지점에 보물지도를 묻다」
반권력을 위한 인간 우화―이기호, 「발밑으로 사라진 사람들」
정치 이성 레짐의 바깥으로―김연수,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동성사회적 욕망과 팝 모더니즘―박민규,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사후의 생을 위하여―김인숙, 「감옥의 뜰」
인간 사육의 숭고한 테크놀로지―편혜영, 「사육장 쪽으로」
소비주의의 역병과 싸우는 농담―김애란, 「성탄특선」
강남 밖의 청년, 그의 망상과 익살―김경욱, 「런닝 맨」
미니멀리즘, 아이의 마음, 코뮌주의―황정은, 「디디의 우산」
비극적 파토스의 민주화―권여선, 「봄밤」
후기
색인
그러나, 글이란 어떤 문화에서는 신성한 것이지만 어떤 문화에서는 위험한 것이다. 고대이집트에서는 글의 발명이 위대한 업적으로 칭송되는 한편으로 글의 해악이 크게 염려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파이드로스』에는 글이 사람들에게 기억 연습을 게을리하게 해서 결국 건망증이 심해지게 만들고, 게다가 무지함에도 유식한 척하며 거짓 지혜를 늘리게 한다고 경고한 이집트 현자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 이야기를 파이드로스에게 들려준 소크라테스는 글의 문제점을 두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는 말이 없다는 것. 글은 그림과 같아서 언제나 같은 것을 가리키고 사람들의 물음에 대해 침묵하기에 영혼이 살아 있는 학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 둘째는 그와 정반대로 말이 많다는 것. 적당한 사람, 부적당한 사람 가리지 않고 사람들의 손에 들어가 읽혀 오용과 모욕을 당한다는 것. 그러니 글은 아버지 없는 아이와 같다.
_문학적 동물들의 아나키즘―최윤, 「회색 눈사람」
기자를 한사코 단념하려고 하는 동시에 열렬히 그리워하는 그녀의 심리를 서술자는 “욕망”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슬픈 육체”와 “불안한” 마음의 접경에서 움직이는 그 심리는 충동이라고 부르는 편이 낫다. 프로이트는 모든 심리 활동을 주동하는 에너지의 원천인 이 충동을 정신생활에 가해진 신체의 요구라고 보았다. 라캉 이후 널리 통하는 욕망과 충동의 구분에 따르면 그녀의 심정은 욕망보다 충동에 확실히 가깝다. 모호한 요약의 잘못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욕망과 충동의 차이는 법 혹은 상징계의 질서에 대한 관계에서의 차이다. (중략) 사진기자가 “여자 킬러”라는 귀띔을 받았음에도, 자신에게 다시 다가온 “슬픔”이란 운명임을 직감했음에도 그녀는 충동의 압력을 피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녀는 그의 직장을 마주 보고 있는 찻집의 커다란 유리창 앞에 자리를 잡고 그에게 다시 자신을 보이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다.
_여성의 슬픈 향유?―신경숙, 「배드민턴 치는 여자」
인간과 동물의 유사성은 어느 시대의 문학적, 철학적 인간학에나 나타나는 제재이지만, 1990년대 이후 한국 문학에서 동물 같은 인간의 출현은 의미 있는 사건처럼 보인다. 무엇보다도, 동시대를 한동안 풍미한 역사철학적 담론과 긴밀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기억하고 있듯이, 1989년 베를린장벽 철거와 함께 사회주의 체제가 몰락하면서 한국의 사상계에도 주목할 만한 기류가 나타났다. 전후 냉전 질서가 붕괴했다는 생각은 물론, 보다 중대한 의미를 지니는 어떤 대전환을 인류가 경험하고 있다는 생각이 확산되었고, 그러한 생각을 분절하기 위해 부활된 혹은 창안된 개념들이 유행을 보았다. 그 개념 중 하나가 헤겔로부터 유래한 ‘역사의 종언’이다.
_동물화한 인간의 유물론적 윤리 - 은희경, 「내가 살았던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