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중에서
사랑의 종말은 타자의 존재 그 자체가 불편해지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해체 과정은 떨어뜨린 유리잔처럼 한순간의 방심으로 산산이 부서지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하찮은 일상에 마모된다는 데에 그 특징이 있다. 사랑이 조그만 먼지가 모여 단단한 보석으로 결정되는 수정화 과정, 혹은 구축 과정이라면 그것의 해체는 역순으로 진행된다. “설거지가 사랑을 죽이는 것 같다. 당신은 한 번도 그것을 믿은 적이 없고 그런 진부한 이미지에 갇히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나 그의 담배 연기가 짜증 난다. 그것이 징후이다. 당신은 그 징후의 해석을 거부한다.”
―p. 44, 「사랑의 적정가」
철학을 포함한 인간의 모든 문제가 언어에 귀결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프랑스 철학자가 이제 미국 대학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푸코, 데리다, 들뢰즈, 라캉은 정 작 프랑스보다 미국에서 유명세를 떨치며 미국 문학계와 지성계에서 그들은 “포스트잇”으로 통했다. 몰락 위기에 몰린 인문학자, 특히 영문학 비평계는 아무 데나 라캉의 한 구절, 들뢰즈의 한마디를 끼워 넣어 글의 품위를 높이는 데 몰두하여 프랑스 철학자가 미국 비평계에서 편리하게 여기에서 떼었다가 저기에 다시 붙이는 포스트잇 구실을 하게 된 것이다. 프랑스 이론은 일종의 지식계의 명품으로 통용되었고 위신재의 지위를 톡톡히 누리는 프랑스 이론가들은 미국 학술회의의 단골 고객이 되었다. 프랑스의 철학은 대서양을 건너면 “문학화”되어 전문 철학자보다도 비평가들이 애용하는 방언이 되었고 대학평가제도로 서열화에 시달리는 미국 대학은 프랑스의 명품을 수입해서 전시하는 데에 열을 올렸다.
―p. 208, 「언어의 일곱 번째 기능」
작가들 중 45퍼센트가 정부가 정한 최저 생계비 수준도 벌지 못하는 반면 4.2퍼센트의 작가가 월평균 10678유로(대략 1500만 원)의 소득을 올리고 있다. 앞서 말했듯 이 4.2퍼센트의 작곡가, 안무가, 사진가 중에서 소설가는 극소수, 즉 스무 명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스무 명은 매년 절반 이상씩 바뀌고 있다. 매년 꾸준히 베스트셀러를 내는 작가는 없다는 뜻이다. 그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으나, 서울에서 바라본 프랑스 소설가의 날씨는 ‘대체로 흐림’, 혹은 항구적 빙하기이다. 남의 나라 날씨가 우리에게 위로가 될지 모르겠다. 감히 경제학자 흉내를 내본다면, 책 한 권을 사면 작가가 살고, 번역가가 살고, 출판사의 교정·교열 전문직이 살고, 인쇄소가 살고, 제지업자가 살고, 서점 주인, 도서관 사서가 살고, 내 집 문 앞까지 책을 가져다주는 택배 아저씨가 살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작가가 살아야 평론가가 그 곁에서 기생하며 겨우 살 수 있다.
―pp. 317~318, 「소설가, 대체로 흐림」
우리의 모든 불행은 가족에 뿌리를 두고 거기에서 뻗어나간 비극의 가지와 결실이 우리의 현재 모습이다. 인간의 추한 모습을 과장되게 드러내는 TV 드라마는 한결같이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벌어지고, 신문과 뉴스는 현실이 이보다 더욱 잔인하고 처절하다는 것을 하루가 멀다 하고 증언한다. 동화가 “그래서 두 사람은 결혼해서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지만 소설은 그 이후의 환멸을 그려낸다. 그래서 적어도 유년기부터 가족을 이뤄 살아야 하는 포유류에 속한 인간은 불행하다. 그 진실을 증명하는 데는 세 명의 정족수만 채워지면 충분하다.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삼각형, 그 꼭짓점에 한 사람씩 앉히는 것이 비극의 필요조건이다.
―pp. 321~322, 「항상 행복한 가족」
환갑을 넘긴 부부 앞에 요정이 나타났다. 요정은 금슬 좋게 살아온 부부에게 소원을 하나씩 들어주겠다고 제안했다. 먼저 말문을 연 부인은 세계일주를 하고 싶다고 했다. 요정은 남편과 함께 떠나라며 호화 유람선 표 두 장을 아내에게 건네주었다. 이제 남편이 소원을 말할 차례이다. 남자는 “이런 기회가 두 번 다시 올 수 없을 텐데……”라며 망설이다가 겸연쩍은 표정으로 부인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입을 열고 자기도 여행을 떠나고 싶지만 동반하는 여자가 자기보다 서른 살쯤 연하였으면 좋겠다고 했다. 요정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남자를 향해 마술봉을 겨누었다. 펑 소리와 함께 연기가 피어올랐다. 연기가 걷히자 남편은 아내보다 서른 살 많은 아흔 살 노인으로 변해 있었다.
―p. 341, 「소설, 심리적 표절」
알제리 전쟁은 드레퓌스 사건과 유사하게 지식인, 혹은 작가에게 곤혹스러운 질문을 제기했다. 개인의 윤리를 앞세워 집단의 불의, 특히 국가의 비윤리를 가차 없이 단죄하는 쪽에 설 수도 있고 집단의 질서와 안녕을 위해 개인적 신념을 뒤로 미룰 수도 있다. 훗날의 역사는 주로 국가이성에 맞선 개인의 결단, 그 과감한 용기와 대쪽 같은 지성의 손을 들어주었다.
―pp. 436~437, 「국가이성과 개인윤리」
▲ 차례
뱀, 코끼리, 그리고 나귀
사랑의 적정가適正價
두 죽음을 둘러싼 재수사
어머니의 청춘
이상한 사건
화양연화
노인의 연적들
객관적 우연
죽은 자의 이름
언어의 일곱 번째 기능
어렵고 위험한 일
노숙자와 유기견
대동강과 한강
콩고 이야기
소설가, 대체로 흐림
항상 행복한 가족
소설, 심리적 표절
궁핍한 시대의 희망
카불의 로쟈
국가이성과 개인윤리
에필로그
참고 문헌
▲ 지은이 이재룡은
1956년에 태어나 성균관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브장송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숭실대학교 불어불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꿀벌의 언어』 『소설, 때때로 맑음 1』이 있으며, 역서로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정체성』, 장 필립 뚜생의 『욕조』 『사랑하기』 『도망치기』, 미셸리오의 『불확정성의 원리』, 장 에슈노즈의 『일 년』 『달리기』, 아니 에르노의 『부끄러움』, 필립 빌랭의 『포옹』, 조엘 에글로프의 『장의사 강그리옹』 『해를 본 사람들』 『도살장 사람들』 『다른 사람으로 오해받는 남자』, J.M.G. 르 클레지오의 『오니샤』, 앙투안 콩파뇽의 『모더니티의 다섯 개 역설』, 로랑 모비니에의 『이별 연습』, 프레데릭 파작의 『거대한 고독』, 파스칼 로즈의 『로즈의 편지』, 알베르토 코르다의 『코르다의 쿠바, 그리고 체』, 외젠 이오네스코의 『외로운 남자』, 자크 아탈리의 『깨어 있는 자들의 나라』, 조르주 페렉의 『W 또는 유년의 기억』, 피에르 드리외라로셸의 『도깨비불』, 다이 시지에의 『달도 뜨지 않는 밤에』, 로맹 가리의 『인간의 문제』 외 다수가 있다.
이 시대의 빛나는 한 지성이 안내하는 문학의 향연
프랑스 문학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하는 신예부터 거장의 작품까지,
미래의 고전 40여 편을 만나다!
▲ 이 책에 대하여
문학평론가이자 번역가로서 국내에 프랑스 문학을 심도 깊고 활발하게 소개해온 대표적 불문학자 이재룡 교수가 『소설, 때때로 맑음 2』를 선보인다. 2013년부터 『현대문학』에 연재 중인 동명의 비평에세이 가운데 2014년 9월~2016년 11월까지의 수록작 스무 편을 묶은 것으로, 이전 연재분은 『소설, 때때로 맑음 1』로 출간된 바 있다. 이번에 출간되는 『소설, 때때로 맑음 2』는 1권을 낸 지 3년, 연재를 시작한 지 5년 만에 나오는 후속권이다.
이 책에 소개되는 최신작 프랑스 소설들은 모두 동시대 프랑스 문학의 흐름을 주도하는 문제작들로, 문학적 성취를 이룬 작품들이다. 프랑스 현지에서의 화제성만큼 대중성까지 겸비해 독자들의 흥미를 돋우기에 충분하다. 생애 첫 소설로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른 신예부터 이름만으로도 문단을 대표하는 거장의 작품까지, 이 책이 테마로 삼은 작품의 수만 해도 40여 편(국내 미번역 신작 포함), 상호 텍스트성으로 추려져 언급되는 작품만 해도 80여 편에 달한다. 저자는 예리한 변별성으로 작품을 선별하는 통찰력을 발휘한다.
저자가 “훗날 고전으로 대접받을지도 모를 보석”이라고 칭한 방대한 양의 신간 소설과 관련 정보들이 집약돼 있는 『소설, 때때로 맑음 2』에서 주목한 프랑스 현대 문학의 흐름은 트랜스픽션과 비(非)프랑스 출신 작가들의 등장이다.
트랜스픽션이란 원작을 해체, 재구성한 작품으로서 『마담 보바리』를 재해석한 『엠마 보바리의 죽음에 대한 재수사』(필립 두멩크), 『이방인』을 재해석한 『뫼르소, 살인사건』(카멜 다우드), 『죄와 벌』을 재해석한 『저주받을 도스토옙스키』(아리크 라히미) 등 이번 책에서는 세 편의 트랜스픽션이 조명을 받는다. 저자는 “좋은 작품은 일차적으로 많은 독자를 모아들이지만 궁극적으로 많은 작가의 관심을 끌고 그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킨다”고 말하며 이 실험적 시도에 관심을 기울인다.
두 번째 흐름으로 꼽힌 비프랑스 출신 작가들의 등장. 저자는 그들의 등장과 더불어 타자적 시선으로 프랑스와의 지역적, 인종적 관계를 재조명함으로써 현대사에 대한 냉철한 비판을 일목요연하게 짚어본다. 예를 들어 프랑스 문단에서 인정받은 비프랑스 출신 작가의 대표 주자로 2015년 『작은 고추Petit piment』를 발표한 콩고 출신의 소설가 알랭 마방쿠가 있다. 저자는 이 소설로 마방쿠가 콜레주 드 프랑스의 강단에 선 최초의 흑인 교수로 기록되었다고 전하며, 이 외에도 알제리, 아프가니스탄 출신 작가의 부상 등 근래 들어 프랑스 문학이 전 세계 프랑스어권 전역으로 외연을 넓히고 있음을 주시한다.
이 밖에도 현재 프랑스 문단을 대표하는 에마뉘엘 카레르, 델핀 드 비강, 장 에슈노즈, 에릭 포토리노, 2016년 생애 첫 소설로 베스트셀러 작가로 등장한 올리비에 부르도에 이르기까지, 『소설, 때때로 맑음 2』를 통해 독자들은 최신 프랑스 문학의 흐름을 한눈에 접할 수 있다. 또한 소설만 읽어서는 알 수 없는 작품의 뒷이야기―로맹 가리와 폴 발레리에 관한 일화, 화가 에두아르 마네와 베르트 모리조의 관계, 미들급 세계 챔피언 마르셀 세르당과 가수 에디트 피아프의 사연, 카미유 로랑스와 마리 다리외세크가 표절을 두고 벌인 날 선 논쟁 등, 이 책이 안내하는 문학의 향연은 단순히 신간을 소개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작가의 개인사부터 소설을 둘러싼 정치, 사회, 문화, 역사에 대한 폭넓은 지식과 혜안까지, 풍성한 읽을거리로 가득 채워져 있다.
한 달에 한 편씩 에세이를 써 내려간 저자는“주어진 한 달의 시간은 깊게 숙고하며 다듬어 쓰기에는 부족했고 대상 작품이 신간이기 때문에 믿고 기댈 만한 자료도 드물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소설, 때때로 맑음 2』에서 소개되는 프랑스 문학이 지향하는 개성적인 소설들은 문학을 바라보는 시야를 넓히고 나아가 문학과 예술, 삶과 사회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구축하는 데 큰 기여를 할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될 <소설, 때때로 맑음> 시리즈는 수십 년간의 지적인 독서로 쌓아 올린 한 지식인의 고유한 성찰의 세계와 다름없으며, 독자들은 마지막 책장을 넘길 때까지 끊임없는 독서삼매에 매혹당하는 값진 경험을 선사받게 될 것이다.
▲ 작가의 말
남들에게 마음 놓고 권할 수 있는 책은 시간의 검증을 거친 고전에 속한다. 고전은 불멸의 생명을 얻었지만 저자의 육신은 대부분 지상을 떠난 지 오래되었다. 그리고 마차, 고작해야 증기기관차가 달리는 고전의 세계는 지금의 시대감각에는 어긋나기 일쑤이다. 전편과 마찬가지로 『소설, 때때로 맑음 2』에 소개된 작가는 우리와 같은 시대를 호흡하고 차기작을 기대할 수 있는 경우에 속한다. 그러나 동시대 문학을 골라 읽고 나아가 평가까지 곁들이기에는 다소 불확실성이 따를 수밖에 없다. 현지 문단의 반응이나 수상 경력 등 객관적 요소를 고려하여 작품을 골랐지만 어쩔 수 없이 필자의 개인적 취향도 개입했다. 또한 엄밀히 따지면 전기 (「화양연화」 「노인의 연적들」), 사회학적 보고서(「소설가, 대체로 흐림」)로 분류되는 글도 다뤘지만 나머지는 넓은 의미에서 소설이라 불릴 수 있는 터라 책 제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가급적 중복을 피하려 했으나 중요 작가가 발표한 신작은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매번 새로운 작품의 첫 문장을 대할 때마다 먼 훗날 고전으로 대접받을지도 모를 보석을 미리 읽는다는 작은 흥분이 동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