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속으로
지금부터 내가 풀어놓을 이야기가 바로 그렇다. 나는 이 이야기가 모두에게 잊힌 역사적 사실인지, 혹은 고향에 대대로 전해지는 꿈과 환상이 빚어낸 허상의 기억인지 명확하게 말할 수 없다. 나는 이 이야기의 원작자가 아니라 성실한 기록자일 뿐이다. 만약 누군가 사실이냐고 묻는다면, 그 근거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 이 이야기는 나처럼 적봉에서 나고 자라 지금은 현실 세계와 완벽한 혼연일체를 이룬 것이라고.
이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됐다.
_본문 8쪽
클로비스는 광고 내용을 확인하는 순간 그대로 굳어버렸다. 한 줄기 서광이 그의 가슴을 뚫고 들어오자 갑자기 온 세상이 환해졌다. 초원에 영사기를 가져가려던 이유가 무엇인가? 화국상의 기적을 재현하기 위해, 초원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켜 선교 사업의 성공률을 높이기 위함이었다. 계획의 핵심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방법이다. 그 일이 꼭 영사기만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서광이 비추는 순간 클로비스의 마음도 환해졌다. 이와 동시에 떠오른 기괴한 생각이 빛을 빨아들이며 점점 커져갔다. 만생원의 진귀한 동물을 사들여 적봉에 동물원을 만들면,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는 매한가지가 아닌가? 초원의 사람들은 수사자의 우렁찬 포효를, 아나콘다의 공포를, 얼룩말처럼 털 모양과 색깔이 특이한 동물을 경험해보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이 동물들을 데려가 초원 사람들 눈앞에서 포효하고 달리게 할 수 있다면, 영사기 화면보다 더 큰 놀라움을 안길 수 있지 않겠는가! 초원에 동물원을 세운다니! 이 얼마나 기발하고 절묘한 생각인가!
_본문 37쪽
잠시 후 만복이 거대한 몸을 두어 번 흔들더니 두 앞발을 바닥에 꿇고 앉았다. 만복이 서 있는 위치가 갈라진 가산 틈 아래였고 마침 정오라, 만복이 몸을 낮추는 순간 원래 가려 있던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졌다. 만복의 이마와 클로비스 사이로 쏟아지는 성스러운 황금빛 햇살이 두 사람을 따뜻하게 감쌌다. 어쩌면 이 동작은 특별한 의미가 아니라 몸 상태가 좋지 않은 만복이 더는 버틸 힘이 없어 주저앉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클로비스는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이 불쌍한 영혼의 고통스러운 마지막 외침은 신의 계시가 분명했다. 그는 만복의 몸을 탁탁 두드리며 또 한 번, 미친 결정을 내렸다.
“나와 함께 적봉에 가자. 그곳이 우리를 받아줄 땅이니까.”
_본문 50-51쪽
“우리는 장사꾼이 아닙니다. 전지전능하신 주님을 흥정거리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서커스단의 삼류 마술사처럼 경박하고 값싼 행동으로 미래의 신도들을 현혹시켜서는 안 됩니다. 이런 생각과 행동은 모두 우리의 신앙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심하십시오. 이러다 우상 숭배에 빠질 수 있어요.”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아요. 이건 하나의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 옛날 예수께서 가다라의 악귀를 돼지 몸에 옮겨 절벽 아래로 떨어지게 하지 않았습니까?”
총부 책임자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형제님은 이것이 아주 재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혹시 하느님을 핑계로 본인의 호기심을 채우려는 것이 아닙니까?”
핵심을 찌르는 한마디였다. 사실 클로비스 자신도 동물들을 초원에 데려가는 계획에 이렇게 집착하는 것이 신의 계시이기 때문인지, 단순히 신기하고 재미있는 광경을 만들기 위함인지 헷갈렸다. 총부 책임자 말이 옳다면 이것은 확실히 위험한 생각이다. 성직자가 경건하지 못한 생각에 사로잡혀 하느님의 뜻보다 개인의 갈망을 우선시하는 셈이니까.
“동물원을 만들고 싶어 적봉 선교를 떠나는 것인지, 적봉 선교를 위해 동물원을 만드는 것인지, 도대체 어느 쪽입니까?”
총부 책임자가 계속 날카롭게 추궁하자 클로비스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가슴 앞에 십자가를 그린 후 경건하게 대답했다.
“저는 제 마음의 목소리에 따를 뿐입니다. 하느님이 제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하듯, 제 마음은 저를 가장 잘 이해합니다.”
_ 본문 55-56쪽
은백색 달빛이 쏟아지는 초원의 깊은 밤, 검은 목사복을 입고 쓸쓸히 걷는 선교사 뒤로 머나먼 타향에서 건너온 동물들이 줄지어 걸어가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코끼리, 사자, 얼룩말, 개코원숭이, 호피앵무새, 비단뱀. 동물들은 서로 다투거나 어수선하게 날뛰지 않고 군대 행렬처럼 질서정연하게 일렬로 늘어서서 묵묵히 걸었다. 달빛을 받으며 걸어가는 클로비스와 동물들은 그림자극을 하는 것처럼 엄숙해 보였다. 그들은 지평선 위를 걸어 거대한 달 앞 을 지나 깊은 초원으로 멀어졌다. 말로는 다 표현하기 힘든 이 신비로운 풍경은 지금까지도 적봉 사람들의 꿈속에서 수없이 반복되고 있다. 하지만 그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이 이야기는 이렇게 흘러갔다.
_본문 170쪽
■ 차례
머리말
제1장 귀화성
제2장 만생원
제3장 승덕부
제4장 해포자
제5장 미친 라마승
제6장 백살만
제7장 영삼점
제8장 마왕묘
제9장 허락의 땅
■ 지은이_마보융
본명은 마리(馬力), 마보융은 필명이다. 1980년 내몽골자치구 츠펑시에서 태어난 만주족 출신이다. 뉴질랜드에서 유학 후 다국적 기업에서 근무하던 중 인터넷 대형 커뮤니티에 발표한 글들이 큰 반향을 일으키며 작가로서 이름을 알렸다. 2005년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장편소설 『풍기농서』로 데뷔해 치밀한 자료 조사와 고증, 흡인력 있는 문장과 유머 감각으로 젊은 중화권 독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다. 중편 「적막의 도시」로 2005년 중국의 SF문학상인 은하상을 받았고, 수필 「비바람-낙신부」로 2010년 인민문학산문상, 「공작동남비 코드」로 2012년 주즈칭산문상을 수상하며 수필가로도 인정받았다. 단편 코미디, 대중적인 역사 논문까지 다양한 글을 발표하면서 ‘문학 귀재’라는 별명을 얻었다. ‘골동품 감별 및 수집’이라는 소재를 차용한 소설 『고동국중국』(2012)이 대중적으로 크게 성공하며 제4회 중국도서세력방 문학 부문 10대 도서에 선정되었다. 대표작으로 장편소설 『풍기농서』, 『삼국기밀』, 『용과 지하철』, 『초원동물원』, 『고동국중국』, 『장안 24시』 등이 있다.
■ 옮긴이_양성희
이화여자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베이징사범대학에서 수학했다. 『장안 24시』, 『용과 지하철』, 『위장자』, 『참새 이야기』, 『란란의 아름다운 날』, 『도시를 읽다』, 『다그치지 않는 마음』, 『마윈』, 『샤오미처럼』, 『채근담』, 『와신상담』 등 60여 권의 책을 번역했다. 중국어 번역 온라인 카페 ‘저울’을 운영하며 출판 기획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문학의 귀재’ 마보융이 전하는, 따뜻하고 색다른 역사 판타지
미스터리, SF, 판타지 등 다양한 문학 장르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전방위적 엔터테인먼트 작가, ‘5·4 혁명 이후 중국 역사소설의 계보를 잇는 대표 작가’로 평가받는 마보융의 『초원동물원』이 현대문학에서 출간되었다. 역사적 사실에 허구를 덧칠해 시대를 새롭게 조명하는 마보융의 작품답게『초원동물원』 역시 치밀한 시대 묘사와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인다. 앞서 국내에 소개된 『장안 24시』와 『용과 지하철』이 당나라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면 『초원동물원』은 의화단 운동의 실패로 서구의 열강들이 중국 대륙에 진출한 청나라 말을 그린다. 서태후의 죽음과 함께 몰락한 청 왕조의 역사를 쇠락한 ‘만생원’(현재의 베이징 동물원)의 모습에 빗대고, 여기에 가상의 인물인 미국인 선교사의 요란하고 황당한 중국 선교 이야기를 천연덕스럽게 녹여 색다른 판타지를 창조해냈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초원의 도시 ‘적봉(츠펑)’은 마보융이 나고 자란 곳이다. 작가는 고향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을 담아, 초원의 독특한 문화와 신앙이 보존된 또 다른 모습의 중국을 독자에게 소개하고 있다. 『초원동물원』은 2018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다. 다양한 동물들과 인간의 특별한 교감, 긴 여행에서 마주한 외로움을 그린다는 점에서 ‘중국판 『파이 이야기』’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 줄거리
태후의 버림받은 동물들,
약속된 땅에서 새 삶을 시작하다
서양인들이 대거 유입되던 청나라 말, 미국인 선교사 클로비스도 중국 대륙에 발을 내딛는다. 신문에서 서태후의 죽음 이후 경매로 나온 동물원(만생원) 광고를 본 클로비스는 기발한 선교 방법을 떠올린다. 몽골 초원에 동물원을 짓고 사람들을 끌어 모은 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겠다는 것. 모두의 반대에도 클로비스는 전 재산을 쏟아 코끼리와 사자, 얼룩말, 원숭이, 비단뱀, 앵무새를 사들여 초원으로 향한다. 말썽쟁이 동물들과 함께하는 선교 여행, 클로비스는 책으로는 배울 수 없는 수많은 일을 경험하며 자신의 진정한 소임에 대해 깨닫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초원의 도시 적봉은 다양한 민족, 다양한 종교가 뒤섞인 곳이었다. 클로비스와 동물들은 호기심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새롭게 사귄 친구들의 도움으로 동물원 건설에 성공한다. 연일 북적이며 흥하는 초원동물원, 그러나 진짜 목적인 교회 건설은 자꾸 미뤄지면서 선교사의 고민은 깊어져만 간다.
□ 작품 소개
서로의 쉴 곳이 되어주는 인간과 동물
함께 사는 법을 깨쳐가는 아름다운 여정
신기한 동물들로 사람을 모으고, 진실한 태도로 그들의 마음을 얻을 거라 낙관하던 클로비스는 곧 큰 벽에 부딪히고 만다. 다양한 신을 섬기는 초원의 주민들에게는 유일한 신이라는 말 자체가 이해할 수 없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계몽’과 ‘교화’의 대상으로 보았던 클로비스는 결국 시행착오를 인정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척박한 환경과 외로움 속에서 믿음마저 흔들리게 된다. 그런 그의 마음을 다잡아준 것은 지금까지 선교의 도구로만 여겼던 동물들이다. 용맹한 사자 호분과 듬직한 코끼리 만복이 호시탐탐 동물원을 노리는 적들에게서 일행을 지키고, 고민에 빠진 클로비스를 호피앵무새가 적절한 조언으로 도와주면서 초원의 동물원은 함께 위기를 극복해나간다.
교회 대신 세운 초원의 동물원은 동물들에게는 몸의 쉴 곳이, 선교사 클로비스에게는 마음의 안식처가 되어준다. 그리고 이들은 서로를 버팀목 삼아 초원에 차근차근 적응해나간다. 작가는 작중 화자의 입을 빌려 ‘사람이 도시의 꿈을 꿀 때, 도시도 사람의 꿈을 꾼다’고 말하면서, 세상의 모든 것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초원의 꿈속에 전해지는 동물원의 전설을 통해 암울한 시대를 견디게 해준 희망을 이야기한다. 서양과의 다툼과 민란으로 인해 피폐해진 청나라의 가장 소외된 지역, 몽골의 초원에서 불가능한 꿈을 꾼 미국인 선교사와 동물들의 이야기. 『초원동물원』은 ‘공존과 상생’의 가치를 조명하고, 독자에게 종교를 초월한 감동과 따뜻한 휴머니즘을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