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왜 말해야 하지? 사실 자전이 정말로 관심 있는 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자기 자신도 명확하게 알 수 없는데 어떻게 남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얼마 전 셴밍이 신간 에세이 몇 권을 보내왔다. 하지만 그녀는 몇 장 뒤적이다가 이내 옆으로 밀어놓았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글로 쓰는 사람이 있다니. 그녀는 비밀을 누설하는 사람을 경멸했다.
_ Ⅰ. 그날, 37쪽
바람 부는 어느 저녁 혼자 침대에서 잠이 들었다. 그녀는 계단을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를 기대했다. 잘 잤느냐는 한마디 인사를 기다렸다. 그저…… 건성으로 건네는 말이어도 상관없었다. 겨울날 한밤중에 눈을 떴는데 발가락이 얼어붙은 듯 뻣뻣하고 종아리에 한기가 스몄다. 계절풍이 베란다로 파고들어 와 휭휭 휘파람 소리를 냈다. 몸을 모로 돌려 이불을 둘둘 감았다. 그녀는 누군가 옆에 있어주길 사무치게 바랐다. 음습한 밤공기를 조금이라도 쫓아줄 더운 숨결이 필요했다. 누군가의 숨결에 맞추어 그의 몸에 기대고 싶었다. 그토록 습하고 추운 겨울밤에는 메슥거리는 대머리 냄새도 개의치 않을 수 있었다.
_ IV. 모퉁이, 그 모퉁이, 130쪽
늙은 남자에 대한 혐오감일까, 동정심일까, 아니면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다른 무엇일까?
감당하기 힘든 열정에 숨이 막혀서인지, 훙보의 용기가 두려워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자전은 또다시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 순간 자전은 저항 능력을 잃었다. 그녀는 사랑을 갈구하는 어린아이로 되돌아갔다. 남자가 자신에게 무엇을 하든, 부드럽게 쓰다듬든 거칠게 주무르든, 붙잡힌 팔다리가 부서질 듯 아프든, 아니, 무슨 일이 벌어지든 그저 몸을 내맡겼다. 그 순간 자전은 아빠를 갈망하는 어린 소녀로 돌아갔다. 자신을 어떻게 대하든 그녀는 “싫어요”라고 말할 수 없었다.
_ Ⅴ. 소원의 거리, 147쪽
그녀는 엄마가 될 자격을 박탈당했다. 깊숙한 기억 속에 감추어놓았지만 그때의 모멸감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남편은 그녀가 아이 낳는 것을 성가신 일이라고 표현했다.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욱신거렸다. 그녀는 결혼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수많은 일들을 묵묵히 욱여 삼켰다. 남편이 그녀에게 끼얹은 모욕과 상처, 보상받을 수 없는 인생에 대해 털어놓을 기회가 없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보상받을 수 없는 것은 공허하게 보낸 수많은 날들이었다. 그녀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기고 잘근잘근 씹혀 뭉그러졌다. 생리적인 욕구도 벌레 먹은 잎사귀처럼 서서히 시들어버렸다.
_ Ⅴ. 소원의 거리, 162쪽
만일 그때 자전이 셴밍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두 사람이 함께 해결 방법을 찾았더라면 그 뒤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날 편의점에서 자전은 셴밍의 선한 미소를 보고 바닥에 떨어진 팝콘을 주우며 말하지 않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그때를 놓치고 나자 자전에게 “훌훌 털어버려. 과거의 일은 그리 중요하지 않아.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아니야”라고 말해줄 사람이 없었다. 자전에게는 속마음을 털어놓을 친구가 없었다. 그녀에게 “잠깐 기다려. 넌 지금 길모퉁이를 잘못 돌았어. 어서 멈춰. 빌어먹을 그 생각을 떨쳐버려!”라고 외쳐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_ VI . 행복의 거리, 174쪽
사실 돌이켜보면 경고음이 여러 번 울렸다. 결혼 전 누군가가 나이도 많고 살아온 내력이 불분명한 남자와 결혼하지 말라며 그녀를 말렸다.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남편은 일본에서 일시적으로 돈이 돌지 않는다며 그녀에게 생활비를 부담해달라고 했다. 그때 그녀는 남편의 재산이 중매인이 말한 것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들을 중매해준 친구는 그가 어떤 사업으로 큰돈을 벌었고 일본의 어느 작은 섬도 소유하고 있다고 했다. 그저 작은 섬이라고만 했던 것이 속임수였다. 그가 소유한 섬이란 한 푼 가치도 없는 무인도였다. 언젠가는 보상금도 없이 정부에 수용되거나 아예 바다에 잠겨버리거나 둘 중 하나일 터였다. 하루하루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는 이 남자가 자신과 결혼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_ Ⅶ . 기수 지역, 201쪽
“훙보가 계획을 실행에 옮길 때가 됐다고 했습니다.”
자전이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그 시기를 놓치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학기 중에는 훙타이가 점점 바빠져서 커피를 마시러 갈 시간이 없을 거라면서요.”
판사가 물었다.
“그래서 훙보의 계획대로 했나요?”
“계획을 조금 수정했습니다. 한 사람에서 두 사람으로.”
_ Ⅹ. 빛의 거리, 248~249쪽
서문 『검은 강』 : 글쓰기와 독서 윤리에 대한 도전 ― 추구이펀
I. 그날
II. 커피점
III. 안전 거리
IV. 모퉁이, 그 모퉁이
V. 소원의 거리
VI. 행복의 거리
VII. 기수 지역
VIII. 결혼의 거리
IX. 사랑해. 네가 뭘 하든 널 사랑할 거야
X. 빛의 거리
XI. 필연과 우연
후기 검은 단수이허 ― 핑루의 『검은 강』을 읽고 ― 천팡밍
『검은 강』 저자 인터뷰
옮긴이의 말
■ 지은이_ 핑루 平路
1953년 대만 가오슝에서 태어나 대만대학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아이오와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대만 유력 일간지 《중스완바오中國時報》 편집장, 《차이나타임스》 주필, 홍콩 광화문화미디어센터 주임 등을 지냈으며 대만대학 신문방송대학원과 타이베이예술대학 예술경영대학원에서 강의를 했다.
1983년 「옥수수 밭에서의 죽음」으로 일간지 《연합보聯合報》에서 수여하는 최우수 소설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등단했다. 실제 사건 또는 유명인과 관련된 언론 기사나 전기를 소설로 다시 써내는 능력이 탁월하여, 2015년 『검은 강』까지 30여 년 동안 핑루의 작품들은 대만 사회와 맥을 같이해왔다. 쑨원과 쑹칭링의 이야기를 그린 『걸어서 하늘 끝까지』, 대만 국민 가수 덩리쥔(鄧麗君, 등려군)의 삶을 그린 『그대 언제 다시 오려나』, 『파사의 섬』, 『동방의 동쪽』, 『춘가』 등의 장편소설을 썼다. 단편소설집으로 『모니카의 일기』, 『닝즈 온천』, 『옥수수 밭에서의 죽음』, 『금서계시록』 등을 출간했고, 산문집 『낭만적인, 그러나 낭만적이지 않은』, 『마음을 읽는 책』, 『홍콩에서의 지난날들』, 『벌거벗은 마음』 등을 냈다.
치밀한 창작 기교, 단련된 언어, 다양한 형식, 깊이 있는 소재 등으로 대만 문단에서 자신만의 확고한 세계를 개척한 작가로 인정받고 있는, 대만을 대표하는 작가이다.
■ 옮긴이_ 허유영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와 같은 학교 통번역대학원 한중과를 졸업했다. 현재는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가장 쉽게 쓰는 중국어 일기장』이 있고, 옮긴 책으로 『다 지나간다』『삼체』『나비탐미기』『성룡 : 철들기도 전에 늙었노라』『마음 쓸기』『또 고양이』 등 다수가 있다.
대만 사회를 충격에 빠뜨린 실제 카페 살인 사건을 모티브로, 대만 대표 소설가 핑루가 쓴 장편소설 『검은 강』이 현대문학에서 출간되었다. 핑루는 심리학과 수리통계학을 공부하고 통계분석가, 일간지 주필, 칼럼니스트 등을 거친 독특한 이력의 작가다. 이러한 이력은 소설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다른 작가들과 차별되는 역동적 다채로움을 형성하고 있고, 사회에 문제를 제기하는 뚜렷한 주제 의식을 담고 있다. 『검은 강』 역시 사회 구조적 문제로 일어나는 범죄를 다룬 ‘사회파 미스터리’로, 이 소설로 작가는 대만 대표 문학상인 우싼롄 문예상(2016)을 수상하고, 작품은 중화권 우수 브랜드에 수여하는 진딩상 후보작(2016)에 오르는 등 대만 문단에서 크게 주목을 받았다.
대만 단수이허 강기슭으로 흉기에 찔려 피살된 시신 두 구가 떠밀려온다. 늙은 남자와 중년 여자의 시신으로 두 사람은 부부였다. 수사 결과 부근의 카페에서 일하는 젊은 여성의 범행으로 밝혀졌다. 피해자 부부는 카페의 단골손님이었고, 돈 많은 부부의 돈을 노리고 일어난 살인 사건이라고 결론이 났다.
작가는 범인으로 구속된 젊은 여자 ‘자전’과 칼에 찔린 채 물속에 누워 죽어가고 있는 아내 ‘훙타이’, 두 여자의 시선으로 번갈아가며 이야기를 전개한다. 자전은 감옥 속에서 가난하고 불우했던 성장기부터 ‘훙보’라는 늙은 남자가 자신의 삶에 파고들어 온 순간까지를 되돌아본다. 그리고 늙은 남자 훙보의 아내 훙타이는 강물 속에서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돈 많은 노신사인 줄 알고 자신보다 스무 살이나 많은 남자와 결혼해 남의 이목만 신경 쓰며 쇼윈도 부부로 살아온 자신의 삶을 되돌아본다.
혐오 사회에 물음을 던지는
대만 대표 소설가 핑루의 ‘사회파 미스터리’
『검은 강』은 실화를 바탕으로 하여 치밀하게 잘 짜인 미스터리 소설이다. 욕망, 돈, 치정 살인, 죽음이 얽힌 사건이지만 작가 핑루는 선정적이고 화려한 글투를 배제하고, 담담하고 절제된 언어로 사건을 서술한다. 대신 서술 대상이 교차되는 지점마다 의도적으로 검사, 변호인, 판사, 네티즌 등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을 등장시킨다. “살인 사건이 일어난 현장은 관광지인 셈”이라는 중국 패키지 관광객, “집값 떨어지니까 그 얘기는 그만하라”는 동네 주민, “범행 수법이 아주 악랄하다”는 검사, “아무도 피고인의 얘기에는 귀기울여주지 않는다. 포기할까 하는 마음도 든다”는 피고 측 변호인의 의견 등 수많은 사람들이 왁자하게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여 독자들이 다양한 각도에서 사건을 바라보도록 했다.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어 피해자에 대한 동정과 가해자에 대한 비난의 절차까지 모두 끝난 사건을 작가는 왜 다시금 들추어낸 것일까? 대만 사회에서 이 사건이 알려진 후 가해자인 젊은 여자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각은 일방적이었다. 언론에서는 범인을 ‘뱀과 전갈처럼 남에게 해를 가하는 여자’라는 의미의 ‘사갈녀’라고 지칭하며 선정적인 기사를 쏟아냈고, 대중은 쉽게 남의 말을 하고 헐뜯었다. 심지어 ‘무죄추정의 원칙’으로 공정하게 심판해야 할 재판부조차도 ‘참회하라’며 위협적으로 피고를 몰아세웠다. 이에 작가는 ‘살인범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녀 역시 이 사회의 피해자이지 않을까?’라며 그녀가 살인을 저지른 배경에 주목하여 소설적 상상력을 가미했다. 자전과 훙타이, 두 여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결혼과 가정에 대한 여자들의 동경을 살인 사건에 단단히 연결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 가운데 있는 남자의 욕망을 파헤쳤다. 소설 속에서 그는 아내의 재산으로 젊은 여자를 유혹했다. 그의 아내는 속임을 당했고, 자전은 유혹을 당했다. 과연 누가 가장 나쁜가? 작가는 남성 권력의 오만함, 남성 중심으로 돌아가며 여자에게는 순종을 강요하는 사회 분위기, 물질 만능 시대에 보이지 않는 계급 간의 차이 그리고 노인 혐오, 여성 혐오 등 혐오가 만연한 사회에 질문을 던진다.
작가 핑루는 실제 사건 또는 유명인과 관련된 언론 기사를 소설로 다시 써내는 능력이 탁월하다. 특히 여성의 내면을 섬세하게 묘사하기로 유명한데,『걸어서 하늘 끝까지』의 쑹칭링, 『백세 서신』의 쑹메이링, 『그대 언제 다시 오려나』의 덩리쥔(등려군) 등 주로 전기적인 인물을 다루어왔다. 그랬던 작가가 이번에는 살인 사건과 관련된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여, 주인공이 어떻게 마음의 감옥 안에 자신을 가두고 돌이킬 수 없는 결말로 한 걸음씩 들어갔는지 그녀가 하는 얘기를 들어보자고 독자들을 설득한다.
“나는 이 소설을 통해 흑도 백도 아닌 회색 지대를 보여주고자 했다. 우리가 소위 ‘악인’들과 같은 환경에 처했다면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보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평범한 사람들이다. 우리가 그들처럼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은 것은 어쩌면 그저 운이 조금 좋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저자 인터뷰」 중에서
‘검은 강’이라는 제목 속에 다중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검은 강은 커피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고, 오염된 강물을 연상시키며, 또 더러운 물을 대중에게 끼얹는 언론 기사를 상징한다. 평면의 문자 기록에서 특별한 냄새를 풍기게 하고 이를 통해 상당히 매력적인 이야기를 탄생시키는 것은 작가 핑루의 가장 탁월한 기법이다.
- 대만문학연구소 석좌 교수, 천팡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