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으로 유유히 휩쓸려 내려가다 잦아드는 강물을 바라보며, 다리에 매달린 하나뿐인 등불의 일렁임 속에서 갈색 거품으로 일어나는 물결을 지켜보았다. 그러자 천천히 휘몰아치는 물결을 따라 네 다리를 허공으로 들어 올린 듯 떠 있는 개의 시체가 나타났다. 시체는 다리 밑을 지나 멀어져갔다.
그곳 아르노강 가에서 나는 자신에게 맹세했다.
앰브로즈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겪은 고통과 괴로움의 대가가 무엇이었든, 그 원인을 제공한 여인에게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반드시 앙갚음을 해주겠다는 맹세였다. 레이날디의 이야기를 믿지 않기 때문이었다. 나는 오른손에 쥐고 있는 두 통의 편지에 적힌 진실만을 믿었다. 그것은 앰브로즈가 나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였다.
언제든, 어떻게든, 나의 사촌 레이첼에게 앙갚음을 해줄 것이다. (본문 91~92쪽)
유언장 문제가 불거진 건 3월이었다. 당시 나는 몸이 좋지 않았고 실은 두통 때문에 거의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단다. 레이날디가 그런 문제를 끄집어낸 것도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차가운 계산속을 드러낸 셈이겠지.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두 사람이 서로 의논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겠지. 나로선 그걸 알아낼 방도가 없다. 이제는 나를 감시하듯 따라다니는 그녀의 이상한 시선을 종종 마주한다. 내가 그런 사실을 지적하자 레이첼은 두려워하는 것 같더구나. 대체 무엇을, 누구를 두려워할까? (본문 350~351쪽)
내 손에 잡힌 그녀의 손은 더 이상 따뜻하지 않았다.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는 그녀의 앙상한 손가락은 차갑기만 했고, 반지에 긁힌 손바닥이 아파왔다. 나는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지 만, 그러면서도 다시 잡고 싶었다.
“왜 그런 눈으로 나를 보죠? 내가 당신한테 무얼 잘못했다고? 당신 얼굴이 변했어요.” 레이첼이 속삭였다.
나는 또 무엇을 주어야 그녀의 마음을 얻을지 생각하려고 애썼다. 그녀는 재산과 돈, 보석을 가졌다. 그녀는 나의 영혼과 몸, 마음을 가졌다. 나에게 남은 건 이름뿐이었지만, 이미 그것은 그녀가 갖고 있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다. 남아 있는 게 있다면 그건 두려움뿐이었다. 나는 그녀의 손에서 촛불을 빼앗아 계단 위 선반에 올려놓았다. 나는 양손으로 그녀의 목을 졸랐다. 이제 꼼짝도 할 수 없게 된 그녀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본문 453~454쪽)
■ 지은이_ 대프니 듀 모리에 Daphne du Maurier
‘서스펜스의 여제’ ‘최고의 이야기꾼’으로 불리는, 20세기 영국의 가장 대중적인 작가 중 한 명. 스릴러의 제왕 앨프리드 히치콕의 영원한 뮤즈로 추앙받는 듀 모리에의 작품들은 지금껏 50여 차례나 영화, 연극, 뮤지컬, 드라마 등으로 옮겨졌다. 1907년 저명한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나 문화적 세례를 듬뿍 받으며 성장한 듀 모리에는 런던과 파리에서 교육받던 십 대 시절부터 책 읽기와 글쓰기에 몰두했다. 1931년 첫 장편소설 『사랑하는 영혼』을 발표해 작가로서 두각을 드러냈고, 이후 70년이 넘도록 단 한 번도 절판된 적 없는 미스터리의 고전 『레베카』를 비롯해 『자메이카 여인숙』 『희생양』 『프렌치맨 크릭』 『헝그리 힐』 등 특유의 이야기와 서스펜스가 결합된 걸작들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듀 모리에의 나이 44세, 작가적 기량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에 발표한 『나의 사촌 레이첼』(1951)은 여러 걸작들 중에서도 상업적 성공과 평단의 호평을 모두 거머쥔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출간 이듬해인 1952년 이미 한 차례 영화화된 바 있으며 TV 시리즈, 연극, 라디오 드라마 등으로도 수차례 제작되었다. 그리고 2017년 여름, 또 한 번 영화화되어 전 세계 영화 팬들과의 만남을 앞두고 있다. 듀 모리에는 평생 소설과 논픽션, 희곡 등 장르를 넘나들며 30권이 훌쩍 넘는 작품들을 내놓았고, 이러한 문학적 공로를 인정받아 1969년 남자의 기사에 해당하는 데임 작위를 받았다. 1977년에는 미국 미스터리작가협회가 수여하는 그랜드 마스터 상을 받았으며, 1989년 81세를 일기로 그녀의 수많은 작품들의 무대가 되었던 콘월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 옮긴이_ 변용란
건국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며, 옮긴 책으로는 『시간 여행자의 아내 1, 2』, 『시간의 경계에 선 여자 1, 2』, 『대실 해밋』, 『모든 것의 이름으로 1, 2』, 『프린세스 브라이드』, 『파인즈』, 『웨이워드』, 『라스트 타운』, 『인생은 행복이라는 이름의 조각들이었다』 등이 있다.
“얼음을 띄운 프로세코와인처럼 이국적이고,
이탈리아 빵 파네토네처럼 달콤하며,
뾰족한 스틸레토 힐만큼이나 위태롭다.” _로저 미첼(영화 「나의 사촌 레이첼」(2017) 감독)
2017년 여름 레이첼 바이스, 샘 클라플린 주연 영화 개봉!
출간 후 70여 년간 전 세계 미스터리 팬들을 사로잡아온
‘서스펜스 여제’ 대프니 듀 모리에의 최고 걸작 국내 초역
『레베카』 『자메이카 여인숙』 『프렌치맨 크릭Frenchman’s Creek』 『헝그리 힐Hungry Hill』 등 정통 문학과 대중소설의 경계를 허무는 걸작들로 수십 년간 전 세계 독자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아온 ‘20세기 영국 최고의 이야기꾼’ 대프니 듀 모리에의 『나의 사촌 레이첼』(1951)이 출간되었다. 미스터리 고전의 반열에 오른 대표작 『레베카』를 시작으로 듀 모리에의 저작들을 엄선하여 꾸준히 선보여온 현대문학이 다섯 번째로 국내에 소개하는 작품이다. 듀 모리에의 나이 44세, 작가적 기량이 정점에 이르렀을 무렵 발표한 이 소설은 머나먼 타국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은 한 남자와 그의 아름다운 미망인 레이첼, 그리고 레이첼을 살인범으로 의심하고 증오하면서도 서서히 그녀에게 빠져드는 젊은 상속자 필립의 이야기를 그렸다.
찻잔에 타 넣은 독처럼 서서히 퍼져가는 의혹과 불신의 그림자
그 속에서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죽음의 미스터리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영국 콘월에서 부유한 사촌 형 앰브로즈의 보호 아래 살아온 스물네 살 청년 필립. 건강 악화로 피렌체에 머물며 요양 중이던 앰브로즈로부터 갑작스러운 결혼 선언이 날아들고, 뒤이어 의심과 불안, 두려움으로 가득 찬 편지들이 속속 도착하자, 불길한 예감에 그를 찾아 이탈리아로 향한다. 하지만 그곳에서 마주한 것은 황폐해진 대저택과 앰브로즈의 황망한 사망 소식뿐. 미망인 레이첼은 저택 문을 닫아걸고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앰브로즈가 레이첼에게 살해당했다고 확신한 필립은 복수를 다짐하지만, 얼마 후 그의 저택으로 검은 상복 차림의 매혹적인 여인 레이첼이 찾아오면서 두 사람의 기묘하고 위태로운 동거가 시작된다.
어린 시절 네거리 한복판에 쇠사슬로 매달려 있던 남자를 본 일이 지금도 기억난다. 그의 얼굴과 몸에는 부패 방지를 위해 타르가 검게 칠해져 있었다. 사형수의 시신은 5주간 그렇게 매달아두었다가 거두는데, 내가 그 광경을 본 건 넷째 주였다.
그는 교수대에 매달려 땅과 하늘 사이에서, 나의 사촌 앰브로즈의 설명대로라면 천국과 지옥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본문 13~14쪽)
아름다운 여성을 연상케 하는 제목과 달리, 과거 네거리에 세워져 있던 교수대와 그곳에 목 매달린 사형수의 기억으로부터 출발하는 『나의 사촌 레이첼』은 대프니 듀 모리에의 여러 소설들 가운데서도 독자의 예상을 쉴 새 없이 뒤집으며 반전을 계속하는 작품이다. 그 중심에는 좀처럼 선악을 판단할 수 없는 의문의 여인 레이첼이 있다. 그녀는 특유의 우아한 몸짓과 다정한 말투로 필립을 무장해제 하고, 서서히 그와 그의 저택을 장악해간다. 레이첼을 향한 필립의 감정은 증오와 원망, 의혹과 불신에서 애정과 갈망, 이해와 맹신으로 옮겨 가고, 둘 사이에는 연인인 듯 아닌 듯 미묘한 기류마저 흐른다. 그러나 모든 의문과 갈등이 사라진 듯 보일 때쯤, 작가는 치밀하게 준비해두었던 죽은 이의 편지, 레이첼의 어두운 과거 따위를 차례차례 꺼내놓으며 소설에 새로운 긴장감을 부여하고, 로맨스와 서스펜스 사이에서 영리하게 줄타기하며 자신이 의도했던 모호성을 이어간다. 화사한 꽃을 피우지만 꼬투리 속에 맹독을 간직한 소설 속 금사슬나무처럼 레이첼의 아름다운 겉모습 뒤에는 해소되지 않은 ‘죽음’의 의혹이 계속해서 어른거린다. 그러는 사이 찻잔에 은밀하게 타 넣은 독처럼 이야기에 의심이 스며들고, 이들의 운명은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향해 달려간다.
『레베카』의 명성에 버금가는 또 하나의 화제작
듀 모리에의 독자와 평론가들 사이에서 『나의 사촌 레이첼』은 종종 상업적으로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던 대표작 『레베카』와 비교된다. 각 작품의 중심축인 레이첼과 레베카는 공통적으로 선과 악, 순수함과 음탕함 사이를 교묘하게 오가며 소설 속 등장인물 모두를 압도하고, 나아가 “독자의 넋을 빼앗고 유혹”(뉴욕 타임스)한다. 뛰어난 묘사와 극적인 전개로 일찍이 영화계의 주목을 받았다는 점도 유사하다. 『레베카』는 1940년 ‘스릴러의 제왕’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에 의해 스크린으로 옮겨졌고, 이후 뮤지컬로도 제작되어 오늘날까지 대중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나의 사촌 레이첼』 역시 출간 이듬해인 1952년 당대 최고의 배우였던 리처드 버턴,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 주연으로 한 차례 영화화된 바 있으며, TV 시리즈, 연극, 라디오 드라마로도 수차례 제작되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영화 「레베카」의 주연을 맡았던 조앤 폰테인과 「나의 사촌 레이첼」에서 레이첼을 연기한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가 자매라는 점이다.)
그러나 두 작품 간의 이러한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도 『나의 사촌 레이첼』을 전작 『레베카』의 인기에 편승한 복제품으로 평가 절하 하지 않는다. “『레베카』와 같은 범주에 있는 작품이지만 그보다 더 완성도 높은 스토리텔링을 보여주었다”(가디언)는 평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듀 모리에는 『나의 사촌 레이첼』에서 한 단계 진화한 절정의 기량을 선보여, 당대 독자들의 사랑과 평단의 호평을 한 몸에 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초판 출간으로부터 70여 년이 지난 2017년 여름 레이첼 바이스, 샘 클라플린 주연으로 또 한 차례 영화화되어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킴으로써, 이 작품이 세기가 바뀌어도 여전히 유효한 걸작이라는 것, 전혀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독자들에게도 변함없이 흥미진진하고 매력적인 이야기라는 것을 다시금 증명해 보이고 있다.
듀 모리에는 “이 소설을 집필하면서, 나는 완전히 필립에게 감정이 이입되어 매혹당한 나머지, 그녀가 온 세상을 독살했다고 하더라도 상관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말로 자신의 작품과 여주인공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문학을 넘어 영화와 뮤지컬, TV 시리즈 등으로 다양하게 변주되어온 듀 모리에의 작품들은 국내에도 이미 확고부동한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다. 현대문학에서 출간된 『나의 사촌 레이첼』에는 특별히 2017년 판 영화를 연출한 로저 미첼 감독의 서문을 실어, 작가나 문학 평론가의 관점이 아닌 영화인의 색다른 시선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이 작품의 출간을 기다려온 팬들에게는 뜻밖의 반가운 선물이 되어주고, 작가를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는 듀 모리에 작품의 묘미를 온전히 느끼게 해줄 훌륭한 입문서가 될 것이다.
■ 추천사
듀 모리에는 강렬한 명암 대조를 특징으로 손꼽는 카라바지오의 그림처럼 작품 속 장면의 조명을 전환하며, 히치콕 감독처럼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 각 장은 벼랑 끝 같은 클라이맥스 에서 끝난다. 냉혹하고 계산된 손길로 찻잔에 타 넣은 독처럼 의심이 이야기에 스며든다. 약간 이상하다고 느끼는 정도일 뿐, 속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만큼 명확하진 않다. 가끔 너무 어설프게 버무려 넣은 플롯 때문에 B급 영화처럼 느껴지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비록 이따금씩 삐걱거리는 느낌이 있지만, 작품 속에 감추어졌던 두 번째 플롯이 전하는 내적인 긴장감 덕분에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던 서사의 급반전이 이루어지면서 독자들은 다시 불편한 관성의 힘으로 내동댕이쳐진다. _로저 미첼(영화 「나의 사촌 레이첼」 감독)
듀 모리에는 독자의 넋을 빼앗고 유혹하기 위해 글을 쓰는 작가다. 『레베카』에서 그랬듯이, 『나의 사촌 레이첼』에서도 그녀는 어깨 너머로 다정하게 미소 지으며 양쪽 모두를 해냈다. _《뉴욕 타임스》
듀 모리에의 또 다른 걸작 『레베카』처럼 신비롭고도 매혹적인 작품.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걸작. _《가디언》
『레베카』와 같은 범주에 있는 작품이지만 그보다 더 완성도 높은 스토리텔링을 보여주었다. _《가디언》
독자의 뇌리에 남아 끈질기게 괴롭힐 결말을 선사하는, 악마같이 영리한 소설. _《데일리 텔레그래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