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 아니면 맛볼 수 없는 이야기,
문장으로만 표현할 수 있는 영상보다도 더 영상 같은 세계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_이사카 고타로
▶ 이 책은……
이름 앞에 항상 ‘천재’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작가 이사카 고타로의 장편소설 『러시 라이프』(김선영 옮김)가 현대문학에서 새로운 번역으로 출간되었다. 이사카 고타로의 두 번째 작품인 이 소설은 2006년 국내에 소개되어 많은 사랑을 받은 바 있는데, 이번의 『러시 라이프』는 일본에서 2002년 발행된 최초의 단행본이 아니라 2005년에 작가가 좀 더 다듬어 보완한 문고본으로서 한층 완성도를 높인 것이다.
『러시 라이프』는 평단과 독자들의 극찬을 받은, 이사카 고타로의 작가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다져 준 작품이다. 이사카 고타로는 첫 소설 『오듀본의 기도』를 출간할 당시 어느 인터뷰에서, “할리우드 영화 같은 소설이 아닌 작품”을 쓰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박진감 넘치는 전개와 허를 찌르는 반전 등 엔터테인먼트적 요소를 충분히 갖추고 있다. 전매특허라 할 수 있는 기상천외한 설정과 개성 넘치는 캐릭터, 특유의 입담과 재치 있는 대화는 혁혁한 빛을 발한다. 이와 더불어 신과 인간, 정의와 악에 관한 철학적 탐색과 물질만능주의, 경쟁사회, 구조조정과 같은 사회적 화두를 담아내면서, 그 자신의 바람대로 “소설이 아니면 맛볼 수 없는” 이사카 고타로만의 훌륭한 “영상 같은 세계”를 완성시켰다.
이사카 고타로 작품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소설들이 서로 연결되어 소위 ‘이사카 월드’라 불리는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는 점이다. 『러시 라이프』는 그의 초기작이자 대표작인 만큼 이후 작품의 모티브들이 소설 곳곳에 포진해 있다. 특히 팬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캐릭터이자 『목 부러뜨리는 남자를 위한 협주곡』, 『피쉬 스토리』 등에서 도둑 겸 탐정으로 활약하는 구로사와의 첫 등장 소설이며, ‘요코하마 영화관 폭파 미수 사건’(『명랑한 갱이 지구를 돌린다』), ‘가면 은행 강도 사건’(『칠드런』), 자신을 동물원의 엔진이라고 생각하는 ‘정체불명의 사나이’(「동물원의 엔진」(『피쉬 스토리』)) 등 다른 소설 속 이야기들이 화려하게 덧붙어져 한층 더 풍성한 재미를 선사한다.
문고본 발간 당시 수록된 문학평론가 이케가미 후유키의 작품 해설은 『러시 라이프』에 관한 깊이 있는 이해를 도울 뿐 아니라, 산토리미스터리대상 가작을 수상한 『악당들이 눈에 스며들다』(1996)부터 『사신 치바』(2005)에 이르는 ‘이사카 월드 제1기’ 중반까지의 작품 세계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게 해 줄 명안내서이기도 하다.
▶ 줄거리
인생이 릴레이면 즐거울 것 같지 않아?
‘한 장의 장대한 트릭아트’ 로 펼쳐지는 릴레이 모험 활극!
연쇄 토막 살인 사건이 일어난 센다이에 흉흉한 괴담이 떠돈다. 시체가 절로 토막 났다가 다시 들러붙어 시내를 활보하고 다닌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 센다이 역을 오가는 다섯 명의 범상치 않은 인물인 신인 화가 시나코와 좀도둑 구로사와, 화가 지망생 가와라자키, 정신과 의사 교코, 실직자 도요다가 있다. 이 문제적 인간들의 별난 일상은 불안과 냉소, 비관이라는 어두운 내면을 지니고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엎치락뒤치락하며 위태롭게 이어 나가는 그들의 모험 활극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은 한 가닥의 희망이다. 어떤 이의 풍요롭기만 한 ‘어제’가 삶의 기반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다른 이의 비루한 ‘오늘’로 이어지고, 그것은 또 다른 이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 ‘내일’로서 그렇게 희망을 향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소설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독특하고 실험적인 구성 방식인데, 에셔의 그림 <올라가기와 내려가기Ascending and Descending>에서 계단의 시작과 끝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무작위로 나열된 듯한 다섯 개의 이야기들이 작품 후반부로 갈수록 토막 살인 사건을 중심으로 정교하게 직조됨으로써 짜릿한 쾌감을 준다. 이처럼 『러시 라이프』는 잘 짜여진 구성미가 돋보이는 ‘한 장의 장대한 트릭아트’를 감상하는 즐거움과 함께, 매일 똑같은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삶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 지은이 _ 이사카 고타로伊坂幸太郞
발표하는 작품마다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이름 앞에 항상 ‘천재’란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일본 작가. 미국을 비롯해 프랑스, 중국, 한국, 대만 등 10개 이상의 국가에서 번역되었으며 국경을 넘어 수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고 있다. 고등학생 때 부모님에게 선물 받은 책에서 ‘짧은 인생을 상상력에 내던질 수 있다면 그것만큼 행복한 일은 없다’라는 문장을 보고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일본 추리소설계의 전설 니시무라 교타로西村京太郞의 이름과 같은 획수의 한자를 조합한 필명 이사카 고타로는 베스트셀러 작가를 닮으라는 바람을 담아 가족들이 지어 주었다고 한다.
1996년 「악당들이 눈에 스며들다」로 산토리미스터리대상의 가작을 수상, 2000년 『오듀본의 기도』로 신초미스터리클럽상을 수상하면서 등단했다. 2002년 『러시 라이프』로 평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으며, 2003년 추리소설 독자는 물론 대중으로부터 대단한 인기를 얻은 『중력 삐에로』로 나오키상 후보에 올랐다. 이후 2004년 『칠드런』 『그래스호퍼』, 2005년 『사신 치바』, 2006년 『사막』, 그리고 2008년에는 『골든 슬럼버』로 여섯 번째로 나오키상 후보에 오르나 ‘집필에 전념하고 싶다’는 이유로 고사한다. 2004년 『집오리와 들오리의 코인로커』로 요시카와에이지 문학신인상, 같은 해에 『사신 치바』로 일본추리작가협회상 단편 부문에서 수상했고, 2008년 『골든 슬럼버』로 야마모토슈고로상과 서점대상뿐만 아니라 2009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의 1위에 올라 3관왕을 달성했다. 서점대상의 제1회부터 제6회까지 매회 최고작 10위권에 선정된 유일한 작가이며, 2015년 제12회에는『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와 『캡틴 선더볼트』 두 작품이 동시에 최고작 10위권에 올라 변함없는 저력을 과시하고 있다.
기상천외하고 독창적인 세계관을 중층적이고 정교한 구성력과 경쾌하고 소탈한 필치로 풀어내는 것이 작품의 특징이며, 최근에는 대중문학 베스트셀러 작가로서뿐만 아니라 순문학 작가로서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한편, 『집오리와 들오리의 코인로커』를 비롯한 11개의 작품이 영화화되는 등 이사카 고타로의 작품은 영화나 연극, 만화, 드라마 같은 다른 분야로도 확장되어 독자에게 새로운 재미를 선사하고 있다.
▶ 옮긴이 _ 김선영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본어과를 졸업했다. KBS를 비롯한 다양한 매체에서 전문 번역가로 활동했다. 옮긴 책으로는 이사카 고타로의 『종말의 바보』『목 부러뜨리는 남자를 위한 협주곡』, 미나토 가나에의 『고백』『꽃 사슬』, 사사키 조의 『경관의 피』, 나가오카 히로키의 『교장』, 오리하라 이치의 『실종자』『원죄자』, 야마시로 아사코의 『엠브리오 기담』, 쓰지무라 미즈키의 『열쇠 없는 꿈을 꾸다』『츠나구』,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주홍색 연구』『쌍두의 악마』, 다카기 아키미쓰의 『파계 재판』『대낮의 사각』, 미나가와 히로코의 『열게 되어 영광입니다』 외 다수가 있다.
▶ 등장인물 소개
시나코
“Lush Life, 풍요로운 인생. 좋잖아?”
돈을 지상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화상(?商)인 도다에게 휘둘리는 젊은 신인 화가. 자본과 예술 사이에서 고뇌하는 시나코는 늙은 갑부인 도다로부터 께름칙한 내기를 제안받는데, 만약 시나코가 내기에서 질 경우 도다의 모든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구로사와
“댁의 집에서 훔친 게 뭔지 써 두면 안심하겠지?”
인생에서는 아마추어를 자처하지만 직업 정신만큼은 누구 못지않게 투철한 프로 좀도둑. 주특기는 빈집털이고, 특징은 현장을 떠나기 전에 피해자에게 반드시 메모를 남긴다는 것. 초보도 하지 않을 실수를 연발하던 날 동창생 사사오카를 만난다.
가와라자키
“신을 분해할 거야.”
아버지의 투신자살로 인한 충격으로 다카하시를 신격화하는 신흥종교에 빠져든 화가 지망생. 토막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을 잡는 데 결정적 단서를 제공한 다카하시가 자신의 삶도 구원해 주리라 믿는다. 교단의 간부 쓰카모토는 그가 진짜 신인지 증명하기 위해 신의 구조를 분해해 보자는 기묘한 제안을 한다.
교코
“오늘이야말로 특별한 기념일이야.”
오만하고 독단적인 성격의 정신과 의사. 자신의 정부이자 축구 선수인 아오야마와 함께 서로의 배우자를 살해할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의문의 남자로부터 카운슬러가 되고 싶다는 전화를 받는 순간부터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친다.
도요다
“그렇다, 강도를 직업으로 삼으면 된다.”
40전 40패, 마흔 번 연속으로 재취업에 실패하고 가족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실업자. 늙은 떠돌이 개를 데리고 센다이 역 근처를 배회하다가 충동적으로 우체국 강도가 되기로 결심한다.
▶ 본문 속으로
하지만 오늘은 반드시 권총이 필요했다. 그 건방진 여자를 죽이려면 권총이 있어야 한다. 어느 쪽이 우위인지 가르쳐 주기에 알맞은 도구다. 총구를 겨냥하는 자와 겨냥당한 자 사이에 명확한 입장 차이, 상하 관계를 만들어 낸다. 권총이란 분명 그런 도구다._85쪽
경찰에게 자세한 사정을 들은 가와라자키는 충격을 받았지만 아버지답다고 생각했다. 비상계단을 올라간 아버지는, 분명 20층 꼭대기까지 가다가 지쳤을 것이다. 도중에 ‘이쯤이면 되겠지’라고 생각했을 게 틀림없다. 그래서 17층이었던 것이다. 골 직전의 8부 지점. 그의 인생은 늘 그런 지점에서 꺾였다._28쪽
“하지만 인생에 관해서는 모두가 아마추어야. 그렇잖아?”
사사오카는 그 말에 눈을 번쩍 떴다.
“모두가 첫 출전이야. 인생에 프로는 없어. 뭐, 이따금 자기가 인생의 프로인 것처럼 으스대는 놈도 있지만, 어쨌든 실제로는 모두가 아마추어고 신인이지.” _263쪽
“어디선가 나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아오야마가 그런 소리를 했다.
“그 두루뭉술한 말은 뭐야?”
“누군지 몰라도 어디선가 신이 분노할 만한 외람된 짓을 저지른 거야. 그래서 일어날 리 없는 현상이 일어나는 거지.”
“외람된 일이라니, 예를 들면 어떤 거?”
“누군가가 신을 죽여서 토막 냈다거나.”
“당신 신도 믿어?”
“다들 곤란할 때는 신에게 매달리는 법이야.” _283쪽
“글쎄. 다만 플라나리아가 ‘싫증’을 내서 그렇다는 설이 있어. 똑같은 반복에 싫증이 난 거지. 그 증거로 용기 안쪽의 재질을 바꾸거나 상황을 바꾸면 또다시 학습을 계속한다나 봐. 어쨌든 그런 원시적인 동물조차 같은 일을 반복하느니 자살을 택해. (…) 그렇다고 해도 이상할 것 없잖아? 사람은 더해. 몇십 년이나 똑같은 생활을 반복하고, 똑같은 일을 해. 원시 생물도 싫증을 낼 법한 끝없이 이어지는 그 지루한 시간을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일 것 같아? ‘인생이 원래 그런 법’이라고, 다들 그렇게 자기 암시를 거는 거야. 기묘하게도 그걸로 수긍을 해. 참 이상하지. 인생을 얼마나 알기에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는지 난 정말 의아해.” _258~259쪽
“인생이 릴레이면 좋을 것 같지 않아?”
“릴레이?”
“어제는 우리가 주인공이었고, 오늘은 내 아내가 주인공. 그다음은 다른 사람이 주인공.
그런 식으로 연결되면 재미있을 것 같지 않나? 인생은 한순간이지만 영원히 이어지는 거야.” _39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