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게 행복이라면 나는 무엇을 찾고 있었던 걸까.”
알게 모르게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주면서 인생을 살아왔다고 생각하는 당신, 상처를 준 스스로를 좀처럼 용서할 수 없는 당신, 수년 수십 년이 흘러도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어서 고통스러운 당신. 그러나 실은 누구보다 상처투성이인 당신을 위한 소설이 제 손에 들려 있습니다. ‘조용히, 그리고 평온하게 자신이 용서받았다’는 것을 일깨워줄 소설을 당신의 책상 위에 두고 갑니다.
_ 김숨(소설가)
1984 기요미
내 인생을 바쳐야 할 것은 어딘가 다른 곳에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없는 것보다 나은 남자’에게 온몸을 던져 의지할 수는 없다. 쓰레기통 속의 둘둘 말린 열성의 잔해가 자기 자신인 것만 같아서 기요미는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전통요리 호텔 가구라>에서 일하는 도다 기요미. 연회장에서는 끊임없이 허벅지며 엉덩이가 만져진다. 이제 지쳤다. 하지만 어디로도 갈 수가 없다. 수험을 앞둔 여동생과 기도회에 다니는 어머니, 이따금 편지를 주고받는 남자친구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느 날 밤, 고등학교 때 도서부 친구 준코로부터 전화가 걸려 온다. “나, 실은 지금 도쿄에 가려고.”
1990 모모코
준코와 함께 있으니 어디에도 모모코의 자리는 없는 것만 같았다. 다다미 바닥에 일어난 거스러미를 쳐다보고 있기도 거북살스럽고, 그렇다고 창문을 내다보면 바람에 흔들릴 일도 없는 팬티며 브래지어가 매달려 있다. 이런 게 준코의 행복이라면 자신은 바다 위에서 무엇을 찾고 있었던 걸까.
카페리 <시러브호>의 승무원 후지와라 모모코. 승선일이 겹치면 기타무라와 살을 맞댄다. 그는 육지에 처자를 두고 있는 남자다. 질투와 쾌락 사이에서 허덕이던 모모코는 문득 고등학교 때 도서부 친구 준코에게서 받은 연하장을 떠올린다. <나는 지금 무척 행복해.>
1993 야요이
내 안에 없는 사람이 되는 것과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 되는 것. 살아서 헤어지는 것과 죽은 사람으로 치는 것. 서로 간에 어느 쪽이 편한지는 앞으로 시간과 세월을 들여 확인해보는 수밖에 없다. 어찌 됐건 오늘로 야요이 안에서 교이치로는 없어지게 된다.
화과자점 <행복당>의 여주인 후쿠요시 야요이. 남편이 자취를 감춘 뒤로 어떻게든 가게를 재건하는 일에만 매달려왔다. 어느 날, 남편과 함께 사라진 어린 점원 아가씨를 소개해준 아버지의 친구에게서 갑자기 편지가 도착한다. <두 사람은 이곳에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2000 미나에
기미가 번진 뺨, 눈과 입에 퍼진 주름이 준코의 현재 삶을 말해주고 있었다. 피부 손질도 못 하고, 유행 따라 옷 한 벌 못 사는 십여 년이 모조리 그 사진에 찍혀 있었다. 이게 지금의 준코다. 한참 보고 있으려니 그 웃는 얼굴이 자신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듯한 마음이 들었다. 온몸에서 스르륵 맥이 빠지는 것 같았다.
고등학교 때 국어 교사 다니카와와 결혼을 앞둔 신부 오자와 미나에. 예식 준비에 별 관심이 없는 그의 모습에 심란하다. 하지만 미나에를 괴롭게 하는 이유는 정작 다른 데 있었다.
2005 시즈에
함께 내뺐다는 남자가 시즈에 자신보다 나이가 많지 않았던가. 아버지뻘만큼 나이 많은 남자와 아직도 함께 사는 건가. 마음속 어딘가에서 남자가 바뀌었기를 기도했다. 그렇다면 엄마로서의 자신의 지난날도 조금쯤은 물 타기가 될 것 같다. 역시 그 엄마에 그 딸, 하고 한결 마음이 편해질 것이다.
<슈퍼 신토미>의 계산대 담당에서 반찬부로 밀려난 스가 시즈에. 물일의 힘겨움 앞에서 늙은 몸은 언제까지 버텨줄까. 버림받고 홀로되는 것이 두려워 어린 딸마저 내팽개치고 오로지 남자에게만 모든 것을 걸어왔지만 결국 혼자가 되었다. 시즈에는 문득 딸 준코가 있다는 도쿄의 연락처가 적힌 엽서를 오랜만에 꺼내본다.
2009 나오코
평생 단 한 번의 사랑은 아마 준코와 비슷한 시기에 경험했을 것이다. 과연 마흔 살이 넘도록 질질 끌고 올 만한 사랑이었는지, 생각하기 시작하면 묘한 반성까지 하게 된다. 지독한 사랑의 기억만으로 스스로를 지켜온 것은 나오코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 문득 준코가 너무도 보고 싶었다. 준코를 만나, 후회도 여한도 없이 살아온 모습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간호사인 나오코의 취미는 스쿠버다이빙. 바닷속에서 보면 태양은 파랗다. 여기서 산소 봄베를 떼어보고 싶다. 머릿속에는 호흡기에 연결된 부모의 모습이 떠오른다. 오키나와로 직장을 옮기려고 하는 후배의 이야기를 들으며 문득 고등학교 때 도서부 친구 준코를 만나러 도쿄에 갈까 생각한다.
1984 기요미
1990 모모코
1993 야요이
2000 미나에
2005 시즈에
2009 나오코
옮긴이의 말
■ 지은이_ 사쿠라기 시노?木紫乃
1965년 일본 홋카이도 구시로 시에서 태어났다. 중고교 시절, 문예반에서 활동하면서 홋카이도 출신 여류 작가 하라다 야스코의 『만가』를 접하고 문학에 눈을 떴다. 고교 졸업 후 재판소 타이피스트 근무. 24세에 결혼하면서 전업주부가 되어 남편의 전근을 따라 구시로, 아바시리, 루모이 등 홋카이도 각지를 전전하며, 오래전 하라다 야스코가 소속되어 있던 문예지 《홋카이 문학》의 동인으로 다시 소설을 공부한다. 북녘 혹한의 홋카이도는 사쿠라기 문학과 함께하는 밑바탕이 되어 작품 대부분이 홋카이도, 특히 구시로 시 주변을 무대로 하고 있다.
2002년 「설충雪?」으로 제82회 올요미모노신인상을 수상하고 2007년에 단편집 『빙평선氷平線』으로 본격적으로 집필 활동에 들어갔다. 2013년 『러브리스』로 제19회 시마세연애문학상 수상, 그리고 신인상 수상으로부터 10여 년 만인 2013년, 『호텔 로열』로 제149회 나오키상을 수상한다.
첫 작품부터 성性에 대한 거침없는 묘사를 펼쳐 ‘신新관능파’라고 명명되었으나, 인간의 본능적인 행위로서의 비애를 묘사했을 뿐 그것이 중점은 아니라고 밝힌 바 있다. 록그룹 ‘골든봄버’의 열렬한 팬이며, 스트립쇼에도 관심이 많다고.
다른 작품으로 『풍장風葬』(2008), 『동원凍原』(2009), 『원 모어』(2011), 『기종점역』(2012), 『순수의 영역』(2013), 『별이 총총』(2014) 등이 있다.
■ 옮긴이_ 양윤옥
일본 문학 전문 번역가. 2005년 히라노 게이치로의 『일식』으로 일본 고단샤에서 수여하는 노마문예번역상을 수상했다. 사쿠라기 시노의 『호텔 로열』, 히가시노 게이고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악의』『유성의 인연』,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중국행 슬로보트』『여자 없는 남자들』, 오쿠다 히데오의 『남쪽으로 튀어』『올림픽의 몸값』 등 다수의 작품을 우리말로 옮겼다.
심사위원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은
제149회 나오키상 수상작 『호텔 로열』의 작가
사쿠라기 시노를 다시 한 번 주목받게 한 걸작 연작소설집
가치관도 행복감도 사람 수만큼 존재합니다. 그런데도 누군가와 비교하고 있을 때 안심합니다. 행운이나 이득을 부러워하고 자신에게 없는 부분만을 보며 애태우지요. 그런 느낌을 그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선데이 마이니치》 인터뷰에서)
특별히 동성 친구의 행복이나 불행은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함께 기뻐하거나 슬퍼하는 한편으로 자신과 비교하게 되고, 괜히 참견하거나 쓴소리 한 마디라도 보태고 싶어진다. 무언가 하나라도 자신이 더 낫게 느껴지는 점을 찾아내어 스스로 혹은 상대방을 설득하려고 든다. 이런 직시하고 싶지 않은 내면 깊숙한 감정을 사쿠라기 시노는 절묘하게 그려냈다.
온다 리쿠, 미나토 가나에, 하라다 마하, 이토 준, 미야우치 유스케라는 쟁쟁한 후보들을 제치고, 심사위원들의 압도적인 지지 속에서 『호텔 로열』로 제149회 나오키상을 수상한 작가 사쿠라기 시노의 또 다른 걸작 『굽이치는 달』(2013)이 양윤옥의 번역으로 현대문학에서 출간되었다. 2001년 등단한 이래로 열다섯 권의 단행본을 선보이며 침체된 일본 문학계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고 있는 그녀는 여러 가지 면에서 흥미로운 작가이다. 우선 이야기꾼으로서의 탁월한 재능과 선명하고 속도감 있는 문장으로 진작부터 평단의 주목을 받아왔다. 그뿐만 아니라 혹한과 폭설의 땅 홋카이도 출신으로 모든 작품이 척박한 홋카이도를 무대로 하고 있고, 『호텔 로열』을 통해 알려졌다시피 부모가 러브호텔을 운영했기 때문인지 작품마다 적나라한 성 묘사가 두드러짐에도 냉담한 느낌을 준다. 어릴 적부터 집인 러브호텔에 드나드는 다양한 인간을 마주해왔고, 스스로가 홋카이도에 붙박은 채 견디기 힘든 환경에서 필사적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지켜봐왔기에 그녀가 알고 있는 삶을 그리다 보면 저절로 홋카이도를 배경으로 절실한 사연을 가졌거나 곤궁한 인물들이 빚어져 나온다고 한다.
남들 눈에는 불행하게 보이더라도 본인 스스로 납득하고 받아들이는 삶이라면 불행한 것이 아니겠지요. 자신이 불행한지 아닌지, 그런 것을 생각하기보다 어떻든 우선은 앞으로 나아가려고 한 사람들의 이야기예요.(《작가의 독서 길》 인터뷰에서)
그리고 극단적으로 불행한 사람을 묘사하면서도 결코 부정적이지 않은 무언가를 포착해내는 사쿠라기 시노만의 특징이 잘 나타난 인물이 『굽이치는 달』의 스가 준코이다.
저마다의 고독을 안고 발버둥 치면서 살아온 여섯 명의 여자들
인생의 갈림길에서 그녀들의 운명을 바꾼 것은 한 여인의 ‘행복’이었다
홋카이도의 도립 습원 고등학교를 졸업한 겨울, 준코는 아내가 있는 스무 살 연상의 화과자점 직인과 도쿄로 야반도주한다. 몇십 년 동안 고향에 돌아오지도 못한 채 온갖 고생을 다 하며 근근이 이어가는 삶을 ‘행복’하다고 말하는 준코. 어떻게든 행복해지려고 발버둥 치면서 살아온 여섯 명의 여자들은 준코를 보며 당연스레 꿈꾸어온 행복이 뿌리부터 흔들리는 것을 느끼게 된다.
『호텔 로열』이 장소를 축으로 연대를 거슬러 올라가며 전개되었던 데 반해 『굽이치는 달』에서는 준코라는 인물을 축으로 나선을 그리듯이 연대를 따라서 여섯 편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편마다 화자가 바뀌는 연작 형태로, 재미있는 것은 준코가 작품의 중심에 있지만 화자가 되는 경우는 없다는 점이다. “각각의 단편을 엮어나가면, 읽고 났을 때 또 하나의 주인공의 인생이 확 가슴에 와 닿게 됩니다. 줄곧 그런 작품을 쓰고 싶었습니다”라고 밝힌 사쿠라기 시노의 말처럼 준코의 삶은, 그녀 자신이 직접 이야기하는 일 없이 주변 인물들이 자기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준코를 잠시 만난 순간이나 준코에 대해 건너 들은 소식을 독자가 재조립하면서 서서히 전체적인 모습이 드러난다. 20대 초반에서 60대까지 다양한 나이대의 여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준코의 25년을 조명해낸 구성은 일본 문단의 극찬을 받기도 했다.
모두가 저마다 누군가에게 있어 ‘준코’ 같은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준코에 대해 껄끄러움과 부러움을 느끼긴 하지만 ‘그래도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하는, 자신만의 가치를 가지고 굽이치며 인생을 디뎌나가야 하지 않을까요.( 인터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