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쿠타가와상 수상 작가인 오가와 요코의 대표작 『박사가 사랑한 수식』이 현대문학에서 재출간되었다. 2004년 제1회 일본서점대상과 제55회 요미우리문학상을 수상하며 전 일본을 휩쓸고, 한국에서도 입소문을 타며 꾸준히 판매된 스테디셀러가 새로운 번역과 ‘박사’의 모델인 수학자 후지와라 마사히코의 해설이 추가된 개정판으로 독자에게 다가간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에서는 노수학자와 가사도우미인 ‘나’, 그리고 열 살배기 나의 아들, 이 세 점이 수학과 야구팀인 한신 타이거스라는 두 가지 색의 띠로 엮인 삼각형을 이룬다. 대담무쌍하고 수학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구도에, 문장 몇 개로도 충분히 표현되는 기품 있고 그윽한 문학적 암시가 우아하게 얽혀간다. 여기에 실제의 수학이 곁들여지면서 스토리는 보다 두터워진다.
‘나’의 생일에서 온 숫자 220과 박사의 손목시계 뒤에 새겨져 있는 번호 284는 우애수이다. 즉 220의 약수(220 자신은 제외하고)를 전부 더하면 284가 되고, 반대로 284의 약수(284 자신은 제외하고)를 전부 더하면 220이 된다. 이런 쌍, 즉 우애수는 극히 드물다는 점에서도 박사와 ‘나’ 사이의 특별한 관계가 암시된다. 그 애정이 일방적인 것이 아님을, 박사의 변화를 알아차린 형수-과거 박사와 특별한 관계였으리라 넌지시 시사되는-의 냉랭한 시선이 슬그머니 뒷받침한다. 이렇게 스토리의 핵심이 되는 요소들이 절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일 없이 독자의 가슴으로 조금씩 파고든다.
뚜렷한 윤곽에 흐릿한 암시가 전후좌우로 얽혀 수묵화 같은 고요함을 빚어내는데, 이게 전부가 아니다. 한신 타이거스 얘기가 합세하면서 삼각형은 보다 견고해진다. 세 사람이 야구 카드에 열중하고, 타이거스 경기를 보러 가는 장면 등은 심각해질 수도 있는 이야기에 유머를 선사해준다. 타이거스에 열광한다는 유머가 수묵화에 색채를 첨가해 유화로 변신시키는 것이다.
게다가 주요 등장인물인 불세출의 투수 에나쓰가 수학과 연관되는 서프라이즈가 출현한다. 에나쓰의 등번호 28이 완전수인 것이다. 28은 자신 이외의 약수를 전부 더하면 그대로 28이 되는 흔치 않은 수이다. 이 기적 덕분에 주역 세 사람과 수학, 한신 타이거스가 단숨에 연결되어 탄탄한 구조가 완성된다.
노수학자 ‘박사’와 ‘나’, 그리고 나의 아들 ‘루트’가 숫자로 소통하며 찬란한 순간들을 함께하는 내용의 이 작품은 ‘수’라는 특별한 소재로 따뜻한 감동을 전한다. 그렇다고 해서 고도의 수학적 지식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중학생 수준만 된다면 스토리를 이해하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어 엄마와 아이가 함께 읽는 도서, 선물해서 함께 읽는 도서로 한국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고, 서울시교육청권장도서(중고생)와 출판인회의 선정 이달의책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번 판에 특별히 추가된 후지와라의 작품해설은 수학자의 눈으로 본 작품에 대한 감상과 이 책의 탄생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어, 작품에 대한 독자의 이해를 한층 도와줄 것이다.
?이 책에 쏟아진 찬사들
"지금 누군가에게 가장 권해주고 싶은,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책" -소설가 야마다 에이미
정수, 소수 같은 수학용어가 서서히 시의 언어로 다가왔다. 지금까지 보지 못한 정말 신선한 소설이다. -요미우리문학상 심사위원 가와모토 사부로
이 소설에는 약수, 소수, 자연수, 우애수, 완전수 등의 수학용어가 수식과 함께 빈번하게 등장하는데, 조금도 어렵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기묘한 감동을 느끼게 하는 소설이다.
-저널리스트 오카자키 미쓰요시
수식에 대한 명쾌하고 확고한 신뢰와 사랑이 담겨 있다. 이제까지의 모든 식에 대한 하나의 아름다운 답이다.
-문학평론가 이토 우지타카
네티즌 서평
박사 덕분에 수라는 딱딱해 보이는 세계가 얼마나 따스한지 알게 되었다. _다락방꼬마
수를 사랑하는 것이 삶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서 멀리 있지 않음을 말해주는 책 _미운오리
사람이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예의이자 배려를 보여주는 책 _푸른희망
이 책에 쓰인 숫자들의 조화를 보고 있으면 하늘의 비밀을 훔쳐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런 열정이, 사물에 가치를 부여하는 방식이 아름다워 눈물이 났다. _몽영
■ 본문 중에서
220 :1 +2 +4 +5 +10 +11 +20 +22 +44 +55 +110 =284
220 =142 +71 +4 +2 +1 :284
“정답이야. 자 보라고, 이 멋진 일련의 수를 말이야. 220의 약수의 합은 284. 284의 약수의 합은 220. 바로 우애수야. 쉬 존재하지 않는 한 쌍이지. 페르마도 데카르트도 겨우 한 쌍씩밖에 발견하지 못했어. 신의 주선으로 맺어진 숫자지. 아름답지 않은가? 자네 생일과 내 손목시계에 새겨진 숫자가 이렇게 멋진 인연으로 맺어져 있다니.”
_1장 중에서
나는 종이를 쓰다듬었다. 박사가 쓴 수식이 손끝에 만져졌다. 수식이 죽 이어지면서 한 줄 사슬이 되어 발치로 길게 늘어졌다. 나는 한 단 한 단, 사슬을 내려간다. 풍경이 사라지고, 빛도 비치지 않는다.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전혀 무섭지 않다. 박사가 제시한 도표는 그 무엇도 침범할 수 없는 정확성을 영원히 지닌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내가 서 있는 지면을 보다 깊은 세계가 지탱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 나는 놀라고 감탄한다. 그곳에 가려면 숫자의 사슬을 타고 내려가는 방법밖에 없다. 언어는 무의미하고, 끝내는 내가 깊이와 높이 중 어느 쪽을 지향하려 하는지 구별조차 불분명해진다. 단 하나 분명한 것은 사슬의 끝이 진실과 이어져 있다는 것뿐이다.
_5장 중에서
“물질이나 자연현상, 또는 감정에 좌지우지되지 않는 영원한 진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야. 그러나 수학은 그 모습을 해명하고, 표현할 수 있지. 아무것도 그걸 방해할 수는 없어.”
배가 고픈 것을 참아가면서 사무실 바닥을 닦고 루트를 걱정하고 있는 내게는 박사가 말하는 영원하고 옳은 진실이 필요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눈에 보이는 세계를 지탱하고 있다는 실감이 필요했다. 넓이도 없이 장엄하게 어둠을 뚫고 한없이 뻗어 나가는 한 줄기 진실한 직선. 그 직선이야말로 내게 잠시의 평온을 가져다주었다.
“자네의 그 영리한 눈을 뜨게나.”
박사의 말을 떠올리면서 나는 어둠을 응시했다.
_7장 중에서
π와 i를 곱한 수로 e를 거듭제곱해서 1을 더하면 0이 된다.
나는 다시 한 번 박사의 메모를 쳐다보았다. 한없이 순환하는 수와, 절대로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수가 간결한 궤적을 그리며 한 점에 착지한다. 어디에도 원은 없는데 하늘에서 π가 e곁으로 내려와 수줍음 많은 i와 악수를 한다. 그들은 서로 몸을 마주 기대고 숨죽이고 있는데, 한 인간이 1을 더하는 순간 세계가 전환된다. 모든 것이 0으로 규합된다.
오일러의 공식은 어둠 속에서 빛나는 한 줄기 유성 같았다. 어둠의 동굴에 새겨진 한 줄의 시였다. 거기에 담긴 아름다움에 감동하면서 나는 메모지를 다시 정액권 지갑에 집어넣었다.
계단을 내려오다가 문득 뒤돌아보았지만 수학 코너는 여전히 한산했다. 그렇게 아름다운 것들이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채 조용히 숨 쉬고 있었다.
_7장 중에서
오가와 씨는 이 작품에서 수학과 문학을 결혼시켰다. 기억을 잃고 스스로를 돌볼 수도 없어 애처로운 사람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박사가, 실로 행복한 사람이었다고 절절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 결혼이 행복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오가와 씨의 이 작품은 순문학과 대중문학의 구분을 호쾌하게 뛰어넘어 문학에는 좋은 문학과 좋지 않은 문학밖에 없다는 점을 말없이 증명하고 있다. 때문에 이 작품의 의의는 실로 크다 할 것이다.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하는 이렇다 할 것 없는 편지를 받았을 무렵, 이렇듯 대담한 야심작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동글동글한 눈으로 우아하게 웃는 오가와 씨의 모습을 떠올리자, 역시 여자는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_작품해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