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거리 ●
명문 ‘다카야나기 발레단’의 사무실에서 한 남자가 살해되었다. 용의자는 미모의 발레리나 하루코. 사무실 창문 밖에서 남자의 발자국이 발견된 가운데, 하루코는 무단 침입한 남자를 실수로 죽게 한 것이라며 정당방위를 주장한다. 가가 형사와 동료들은 사건 해결을 위해 조사에 착수하고 마침내 남자의 신원을 밝혀내지만, 남자와 발레단 사이에는 아무런 접점이 없어 사건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설상가상으로 〈잠자는 숲 속의 미녀〉 공연을 앞두고 최종 리허설을 하던 중, 발레단의 안무가이자 연출가인 가지타가 객석에서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범인은 과연 발레단 사람일까? 그리고 범인은 어떻게 가지타를 살해했을까? 불행한 사건이 연이어 터지면서 발레단 단원들은 서로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한편 가가 형사는 발레단 사건을 조사하면서 하루코와 가장 친한 친구이자 발레리나인 미오에게 빠져들기 시작하는데……. 사랑이 허락되지 않는 발레리나에게 숨겨진 슬픈 순애보와 핏빛 살인극, 그리고 화려한 무대 뒤 감춰진 진실을 파헤치기 위한 가가 형사의 활약이 시작된다.
본문에서 ●
하루코가 사람을 죽였다, 라는 연락이 왔다.
미오는 수화기를 움켜쥐고 어금니를 악물었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고, 거기에 맞추어 이명(耳鳴)이 들렸다.
“듣고 있어?”
수화기 속에서 가지타 야스나리의 음울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가 이런 식으로 힘없이 말하는 것을 미오는 지금까지 거의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항상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네”라고 미오는 대답했지만, 가래가 엉긴 것처럼 갈라진 목소리가 나왔다. 한차례 기침을 하고 “듣고 있어요”라고 다시 대답했다.
가지타는 잠시 침묵하고 있었다. 거친 숨소리만 들려왔다. 현재의 상황을 적합하게 전하고 싶지만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느낌의 침묵이었다.
“큰일이 났어.”
침묵 뒤에 그는 말했다. “하지만 걱정할 거 없어. 이건 정당방위야.”
“정당방위…….”
“그래, 그러니까 하루코는 잘못한 거 없어.”
_ 제1장 1 / 7~8쪽에서
갑자기 가가가 나타난 것에 놀랐는지 미오는 눈이 둥그레져서 헉 하고 숨을 들이쉬었다. 이윽고 눈을 질끈 감고 그 숨을 후우 토해내더니 급하게 뛰는 심장을 다독이듯이 손바닥을 가슴에 댔다. 안색이 평소보다 더 창백했다.
“무슨 일이에요?”라고 가가는 다시 물었다. “어디 몸이 안 좋아요?”
미오는 가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침을 꿀꺽 삼키더니 “제발”이라고 말했다. “나를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데려가줘요. 어딘가 공원에라도…….”
“미오 씨…….”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라고 가가는 직감했다.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미오가 그 손을 붙잡았다.
_ 제3장 3 / 230쪽에서
지은이 히가시노 게이고東野圭吾 ●
일본 추소설계를 대표하는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
대학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하고 졸업 후 엔지니어로 일하다 1985년 『방과 후』로 제31회 에도가와란포상을 수상하면서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이과적 지식을 바탕으로 기발한 트릭과 반전이 빛나는 본격 추리소설부터 서스펜스, 미스터리 색채가 강한 판타지 소설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장르의 작품들을 꾸준히 발표해왔다. 이 중 상당수의 작품이 영화와 텔레비전 드라마로 제작되어 큰 사랑을 받았다. 대표작으로 『비밀』(제52회 일본 추리작가협회상) 『용의자 X의 헌신』(제134회 나오키상, 제6회 본격미스터리대상)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제7회 주오코론문예상) 『몽환화』(제26회 시바타렌자부로상) 『기도의 장막이 내려질 때』(제48회 요시카와에이지문학상) 『그대 눈동자에 건배』 『위험한 비너스』 『백야행』 『유성의 인연』 <라플라스 시리즈> <매스커레이드 시리즈> 외 다수가 있다.
옮긴이 양윤옥 ●
일본 문학 전문 번역가. 2005년 히라노 게이치로의 『일식』으로 일본 고단샤에서 수여하는 노마문예번역상을 수상했다. 사쿠라기 시노의 『호텔 로열』 『별이 총총』,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오쿠다 히데오의 『남쪽으로 튀어』, 스미노 요루의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히가시노 게이고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그대 눈동자에 건배』 『위험한 비너스』 『유성의 인연』 <라플라스 시리즈> <매스커레이드 시리즈> <가가 형사 시리즈> 등 다수의 작품을 우리말로 옮겼다.
최근 10년간 한국인이 가장 사랑한 소설가(교보문고 2019년 1월 집계), 히가시노 게이고의 대표작 <가가 형사 시리즈>가 한국 출간 10여 년 만에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독자들을 만난다.
냉철한 머리, 뜨거운 심장, 빈틈없이 날카로운 눈매로 범인을 쫓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에 대한 따뜻한 배려를 잃지 않는 불세출의 형사 가가 교이치로. ‘가가 형사’는 시리즈 캐릭터 사용을 최대한 자제하는 히가시노가 이례적으로 30년 가까이 애정을 쏟으면서 성장시킨 인물로, 작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캐릭터이자 그의 페르소나라고 불린다.
1986년, 20대 후반의 풋풋한 신인 작가 히가시노가 자신의 두 번째 책인 『졸업』에서 처음 등장시켰던 대학생 ‘가가 교이치로’는, 이후 『잠자는 숲』(1989)에서 형사로 변신해 10권의 작품에서 활약한다. 각 권에서 가가가 형사로서 성장하는 모습은 곧 그를 탄생시킨 추리소설가 히가시노의 변화, 발전을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로서 기능한다. 탄탄한 트릭의 재미를 선사하는 『졸업』에서 시작하여, 히가시노표 로맨틱 미스터리의 첫 주자인 『잠자는 숲』, 마지막까지 범인의 정체가 밝혀지지 않는 전무후무한 구성의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1996) 등 초기 작품군에서는 가가의 놀라운 추리력 속에서 작가의 거침없는 발상과 솜씨를 맛볼 수 있다. 또한 90여 권에 이르는 히가시노 전 작품을 통틀어 최고의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악의』(1996)에서 ‘인간의 심리를 가장 완벽하게 꿰뚫는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추리소설을 쓰는 독보적인 작가로서의 면모를 확고히 보여주었으며, 나오키상 수상 이후의 첫 작품인 『붉은 손가락』(2006)에서 사회파 미스터리의 대가로 불리는 히가시노 문학이 정점에 이르렀음을 실감할 수 있다.
이번에 현대문학에서 새롭게 선보인 <가가 형사 시리즈> 개정판은 ‘가가 형사’의 대학 시절부터 네리마 경찰서 소속 형사 시기까지를 다룬 7권의 작품을 아우른다. 개정판에서 옮긴이 양윤옥은 10여 년 전 자신의 번역을 대대적으로 수정, 보완했는데,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바뀐 한글어문규정을 적용하고 기존 판본의 크고 작은 오류를 바로잡은 것은 물론, 권별로 문장 전체를 3,000군데 이상 다듬어 읽는 맛을 온전히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아울러 각 권에 대한 기발한 해석이 빛나는 그림작가 최환욱의 표지화로 시리즈로서의 통일성을 더하여 소장 가치를 높였다.
그의 미스터리에는 평범한 삶 속의 뒤틀림을 아프게 바라보는 공감이 있고, 명랑하지만 섣부르지 않은 희망이 있다. 잔혹함에의 호기심이나 배배 꼬인 내성적 기척은 과감히 생략하는 선 굵은 전개, 추리에의 진지한 실험, 현실을 단단히 짚고 선 치밀한 상상력이 세계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일 것이다. 내가 했던 번역 문장을 한 줄 한 줄 수정하면서 말은 시간과 함께 거듭 태어난다는 것을 실감했다. 가가 형사 이야기는 이번 개정판으로 신기하게도 바로 오늘을 사는 소설로 부활했다. 한달음에 세월을 건너뛰는 기적, 히가시노 게이고였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 독자에게 성큼 옮겨온 책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_ 옮긴이 양윤옥, <가가 형사 시리즈> 개정판에 부쳐
도서 소개 ●
명문 발레단에서 일어난 의문의 연쇄 살인사건
화려한 무대 뒤에 얼룩진 눈물과 한숨, 그리고 한 남자의 비극적 순애보
히가시노 게이고의 ‘헌신적 사랑’, 그 정점에 선 로맨틱 미스터리
<가가 형사 시리즈> 2번째 작품인 『잠자는 숲』에서 가가는 본격적으로 형사로 변신해 도쿄의 유명 발레단에서 연이어 발생하는 의문의 사건을 파헤쳐간다. 완벽한 춤을 추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발레리나와 한 남자의 헌신적인 사랑이 발레 무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미스터리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중 가장 로맨틱한 소설로 손꼽힌다. 로맨틱 미스터리 『잠자는 숲』을 통해 독자들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헌신적 사랑’, 그 원형이자 정점을 만날 수 있다.
비밀이 숨겨진 발레단을 둘러싼 매력적인 이야기
도쿄의 유명 발레단을 배경으로 하는 『잠자는 숲』은 ‘발레’에 모든 것을 건 발레리나들이 전면에 등장한다. 발레단원들 간의 우정, 최고의 춤을 완성하려는 댄서의 집념, 그리고 헌신적인 사랑이 치밀하게 엮인 이야기 구조는 속도감 있는 전개로 절정을 향해 치닫는다. ‘잠자는 숲’처럼 폐쇄적으로 닫혀 있던 발레단. 가가 형사는 그곳에서 화려함의 이면에 감춰진 슬프고 비극적인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그에게 관심 없는 분야라도 절대 “흥미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기에 인간복제, 아동범죄, 시간여행 등 다양한 소재의 작품을 탄생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이번 작품 역시 클래식 발레와 발레단이라는 색다른 소재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유명한 발레 레퍼토리인 <잠자는 숲 속의 미녀>와 <백조의 호수>를 떠올리면서 작가와 두뇌 게임을 벌여간다면 독자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이 될 것이다. 또한 우아한 발레 이야기에 여성의 몸을 규격에 끼워 맞추는 다이어트에 대한 비판을 담은 것은 역시 사회에 대해 냉정한 시선을 견지하는 히가시노 소설만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것이다.
‘헌신적 사랑’을 보여주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로맨틱 미스터리
늘 냉철하고 침착한 가가는 『잠자는 숲』에서 발레단 댄서인 미오와 사랑에 빠진다. 범죄를 계기로 만난 이들의 사랑은 그 끝을 알 수 없어 더욱 흥미를 자아낸다. 단순한 미스터리를 뛰어넘어, 인간의 심리를 꿰뚫는 드라마로 명성 높은 작가는 이번 작품에서 ‘헌신적 사랑’의 감정을 파고든다. 그런 면에서 『잠자는 숲』은 연애소설로 읽어도 매력적인 작품이다. 히가시노 게이고표 ‘헌신적 사랑’의 원형을 간직한 이 작품을 작가의 다른 작품들과 비교하며 읽어보는 것도 독자들에게는 색다른 즐거움이 될 것이다.
『잠자는 숲』은 미스터리로서도 매우 뛰어난 작품이다. 범인이 준비한 살인 도구 트릭과 알리바이 트릭, 그리고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서술 트릭’이 어우러진 가운데 공연을 앞두고 전쟁터처럼 급박하게 돌아가는 무대 뒤편에서 가가 형사의 예리한 추리력은 빛이 난다. 다양한 트릭의 수수께끼를 풀어나가고 범인을 밝혀가는 과정 속에 ‘범행의 이유’를 찾아가는 범인 찾기 게임은 손에 땀을 쥐게 한다. 흡인력 있는 사건을 넘어 가슴 뭉클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는 ‘잠자는 숲’의 세계, 그 무대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의미 없이 난해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자칫 감성의 사설로 흐를 수 있는 등장인물의 자의식이니 내면 풍경이니 하는 것도 최대한 잘라낸다. 오로지 구성력과 트릭, 객관적 상황 서술로 일관할 뿐이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독자는 ‘가슴이 아릿해지는 사랑’이라는 매우 감성적인 체험을 하게 된다. 그래서 『잠자는 숲』은 가가 시리즈 중에서 가장 로맨틱한 추리소설로 손꼽힌다. _ 「옮긴이의 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