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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 ある男 (2018)

  • 저자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 역자 양윤옥
  • ISBN 979-11-90885-37-9
  • 출간일 2020년 10월 30일
  • 사양 396쪽 | 131*197
  • 정가 14,500원

소설가 히라노 게이치로 20년의 도달점
★ 2018년 제70회 요미우리문학상 수상작
★ 2019년 제16회 일본서점대상 5위

 

 

한국의 독자 여러분께

 

졸저 『한 남자』의 한글판 간행을 대단히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번에 책을 출간해주신 현대문학, 또한 등단작 『일식』부터 여러 권의 제 작품을 번역하신 양윤옥 님, 그리고 무엇보다 졸작을 선택해주신 한국의 독자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저의 창작 활동도 이제 20년이 넘었지만, 그동안 한국 독자의 존재는 항상 소중한 마음의 위로이자 격려였습니다.

특히 이 작품은 주인공이 재일 3세 변호사라서 다른 어떤 나라보다 우선 한국어로 번역되고 한국 독자분께서 꼭 읽어주셨으면 하는 강한 바람이 있었습니다.

오래도록 ‘나란 무엇인가’라는 아이덴티티를 둘러싼 물음을 작품의 주제로 다뤄왔습니다. ‘나’를 이해하는 것은 자신만이 아니라 한 사람의 ‘나’로 살아간다, 타자를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복수의 서로 다른 인간들은 대체 어떻게 하면 공생이 가능한가. 세계적으로 분단과 대립의 선동이 두드러지는 이 살벌한 시대에 이것은 더 이상 추상적인 질문이 아닙니다.

개개의 인간은 수미일관하고 본질적인 개성을 갖고 있다, 라는 견해보다 저는 그 내적인 복수성複數性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고방식에 훨씬 더 공감합니다. 다양한 대인 관계와 환경 속에서 한 사람의 인간은 다양한 ‘나’를 살아갑니다. 근래에 저는 그것을 ‘분인分人’이라는 단어로 개념화하고 논의해왔습니다.

저마다 개성을 가진 인간을 다시금 큰 가치관으로 통합한다, 라는 공동체의 존재 방식에 저는 저항감을 느낍니다. 거기에서는 결국 우리 개성의 가장 섬세한 부분은 그 공동성 탓에 억압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카테고리로 일체화한 아이덴티티는 항상 사회의 분단과 대립을 획책하는 자들에게 악용될 위험에 노출되고 맙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친구나 가족, 직장 동료나 이웃과의 관계가 매회마다 우리 자신 안에 펼쳐주는 타자성의 경험을 더욱 중시했으면 합니다. 우리 안의 내적인 타자성은 개인과 개인 사이에 그어진 경계를 뛰어넘어 서로 공유되고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순환합니다. 그것이 그물망처럼 에워싼 사회의 공동성에서야말로 저는 가능성을 발견합니다.

또 한 가지, 제가 이 소설에서 쓰고자 했던 것은 타자를 통해 나 자신이라는 인간과 새롭게 만나는 경험입니다. 우리는 왜 소설을 읽는가. 소설의 등장인물을 접하는 것으로 어떻게 이미 충분히 알고 있을 터인 나 자신을 다시 한번 접해볼 수 있는가. 그 또한 우리가 타자와 함께 살아가는 의미를 시사하는 게 아닐까요.

인사말로는 다소 지나치게 추상적일 이 이야기는 부디 일단 잊어주시기 바랍니다.

이 작품의 스토리를 먼저 즐겨주신다면 작자로서 그보다 더 큰 행복은 없습니다.

 

2020년 10월 25일

히라노 게이치로

 


 

『한 남자』는 거짓 인생을 살았던 한 남자의 발자취를 더듬는 기도의 이야기인 동시에, 픽션론이다. 한 남자도 기도도 픽션을 이야기한다. 마찬가지로 히라노 게이치로도 소설을 만들어낸다. 모든 것이 중첩 구조로 되어 있다. 소설가로서 20주년을 맞은 히라노 게이치로가 소설에 대해 이야기한 소설로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_ 사도시마 요헤이 (작가 에이전시 코르크 대표)

 

인간이란 다면적인 존재이고, 어떤 한 가지 속성의 라벨을 붙여서는 이해할 수 없다―라는 것이 이 책을 관통하는 인간관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목도 ‘한 남자’인 것이리라. 그 점은 이 책에서 그려지는 ‘사랑’에 대해서도, 그리고 이 ‘소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소설을 무엇이라고 부르든 간에 이렇게까지 소설을 읽었다는 실감을 주는 작품은 정말이지 드물다. 지금 소설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히라노 게이치로는 훌륭하게 해냈다.
_ 《마이니치 신문》 (2018년 11월 4일 자)

 

레이먼드 챈들러 소설처럼 뒷골목 세계를 보여주는 흥미진진한 책 『한 남자』는 ‘타인’이란 무엇인지 물음을 던지고, 그에 대한 답은 전혀 의미가 없음을 이야기한다. 스타일리시하고, 서스펜스 넘치는 누아르.
_ 《퍼블리셔스 위클리》

 

히라노는 등단 이후 줄곧 새로운 주제와 맞붙어왔다. 이 작품에서 그는 인간의 존재를 성립시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에 이르렀다.
_ 오가와 요코

 

욕망과 정체성에 관한 매혹적인 조사의 기록인 『한 남자』는 실현되지 못한 동경憧憬의 본질을 인내심 있게 한 올 한 올 풀어낸다. 히라노 게이치로는 인간의 재창조에 대한 다층적인―동시에 탁월한 재미와 먹먹한 감동을 선사하는―이야기를 썼다.
_ 타시 오 (『하모니 실크 팩토리』의 작가)

 

『한 남자』는 어떤 소설인가? 히라노는 실존적 스릴러에서 본격 첩보물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가능성을 독자 앞에 제시한다. 정체성의 모호함을 이토록 철저히 다루는 소설이 자신의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해야 하는 것은 전적으로 타당하다. 참, 이 책이 또 그렇게 흡인력 있다고 내가 이야기했던가?
_ 《WWB(국경 없는 말들)》

 

히라노 게이치로의 『한 남자』는 남편을 잃은 아내, 타인의 이름으로 불렸던 죽은 남자, 수수께끼 엽서, 진실을 밝히려는 변호사 등 흥미로운 탐정 이야기에 나올 법한 온갖 미끼를 던진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절제된 제목을 비롯해 이러한 특징들은 대단히 사색적인 소설을 숨기고 있다. 그리고 미스터리를 전제한 소설은 정체성과 예술적 창작의 가장 심오한 질문들의 실험으로 변모한다. 일본 문화사에 비중을 둔 작품 속에서 작가가 제기한 질문들은, 궁극적으로 소설 작법의 관습 자체를 다루는 데로 옮아감으로써 확고하게 문학적인 것이 된다.
_ 「아트 데스크」 (영국 예술 저널리즘 웹진)

 

설령 이름을 바꾸고 호적을 속여도, 누군가의 과거를 제 것인 것처럼 이야기하더라도 인간은 타자를 살아갈 수 없다. 자신이라는 감옥 안에서 조금이라도 행복해지려고 발버둥 치는 것이다. 즉 모두가, ‘한 남자’이다.
_ 「교도통신」

 

히라노 게이치로가 지극히 선구적이고 현대적인 정신을 가진 작가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의 작품은 인류의 정신세계를 분석하고 탐구하는 데 있어 대단히 창의적인 공간을 열었다.
_ 성커이 (『북쪽 언니』 『죽음의 푸가』의 작가)

 

인생은 수많은 선택의 결과라고 말하지만,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스스로 선택할 수 없이 강제로 씌워져 인생을 좌우해버리는 ‘멍에’도 있다. 만일 그런 ‘멍에’가 자신 혹은 가까운 사람에게 씌워졌다면 그 운명이나 과거나 사랑과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가, 라고 이 소설은 묻고 있다. 모든 것을 간단히 ‘자기 책임’으로 몰아가는 시대이지만, 이야기를 다 읽은 독자는 반드시 「서序」로 되돌아가 ‘한 남자’의 존재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작중에서 제기된 문제들을 나 자신의 문제로서 고민해보는 것이 미래에의 희망으로 이어진다고 확신하게 될 것이다.
_ 《다 빈치》

 

‘대체 사랑에 과거란 필요한 것일까?’ 작품 종반에서의 질문은 과연 인간은 다른 사람의 무엇을 사랑하는가, 나아가 한 인간을 그 사람으로 규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근원적인 존재론에 가 닿는다. 타인의 ‘텅 빈 허물’을 둘러쓰고 힘껏 자신의 삶을 살아간 ‘X’의 만년을 생각하면 첫머리에서 인용한 고전적인 질문은 분명 새롭고도 묵직한 무게로 다가올 것이다.
_ 《주간 분슌》 (2018년 11월 15일 호)

 

특히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작가 히라노 게이치로의 설득력 있는 ‘기도’ 변호사 묘사이다. 『한 남자』는 틀에 박힌 행복한 결말은 아닌지도 모르지만, 독자들은 자신의 임무를 다한 기도 변호사를 보며 만족감을 가질 수 있다. 작품 내내 빛을 발하며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것은 기도 변호사의 다양하고 훌륭한 자질이었다.
_ 《재팬 타임스》

 


 

즉 리에의 인생은 누가 생각하더라도 뭔가 지금과는 다른 것이 되었어야 했다. 동창에서부터 이웃 어른에 이르기까지 단 한 사람도 그녀의 행복을 의심한 자는 없었다. 그래서 그녀가 어린 아들을 잃은 데다 이혼까지 하고 고향에 돌아왔다는 것을 알았을 때, 가엾어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보람 없음에 무어라 말할 수 없이 불편한 감정이 들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가 그런 곳이었나, 하고 불안해졌던 것이다. 거기에 또다시, 재혼한 남편마저 겨우 3년 9개월 만에 앞세우고 말았다. […]
― 1, 21쪽

 

리에는 결코 료의 죽음을 대신해줄 수 없었다. 병든 자식에 대한 그야말로 흔해빠진 표현이지만 그녀는 진심으로, 몸서리칠 만큼 강하게, 자신이 대신 죽어줄 수 있기를 빌었다. 그녀는 누구에게인지도 모른 채 오로지 그 기적이 일어나기만을 기도했다. 하지만 료는 결국 자신의 죽음을 자기 스스로 죽을 수밖에 없었다. 리에에게는 리에가 죽어야 할 죽음밖에 없었던 것이다.
‘누가 죽었지?’라고 리에는 마음속에서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다. 호적상으로는 ‘다니구치 다이스케’라는 사람이 죽은 것이었다. 하지만 ‘다니구치 다이스케’의 죽음은 오로지 그 본인밖에는 죽을 수 없다. 그는 대체 누구였을까, 라고 리에는 죽은 남편에 대해 생각했다. 그것은 결국 그가 누구의 죽음을 죽은 것인가, 라는 질문이었다.
― 5, 101쪽

 

그런데 지진의 충격이 아무래도 진즉에 해결되었어야 할 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그를 다시 불안에 빠뜨렸다.
그것은 예전 질문의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나이에 걸맞게―언어로 하면 아주 작은 차이였지만―이렇게 다시 묻고 있었다. 즉 ‘이걸로 괜찮았던 것일까?’라고.
중년의 자연스러운 감각으로서 이름은 역시나 언제든 ‘기도 아키라’였지만 그 나름대로 다면적인 삶을 살아왔고 그는 이제 자신이라는 인간을 그러한 과거의 결과물로서 포착하고 있었다. 예전에 미래였던 인생은 상당한 만큼 이미 달성한 과거가 되어 그가 어떤 인간인지 대부분 판명되어가고 있다.
물론 좀 더 다른 삶의 방식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도 아마 무한대의 다양한 가능성으로서. 그리고 그는 지금 나란 무엇인가, 가 아니라 무엇이었는가, 라는 것을 살기 위해서라기보다 오히려 어떤 인간으로서 죽을 것인가, 라는 것을 의식하며 다시 질문하도록 추궁당하고 있었다.
― 8, 139쪽

 

“[…] 인간은 원래 다면적인 존재인데 재일이라는 출신이 스티그마화 하면 이것도 저것도 다 그걸로 규정되는 거예요. 나쁜 의미뿐만이 아니라 솔직히 나는 재일 동포끼리 우리 재일이잖아, 하고 어깨동무를 하는 것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요. 그건 우리 똑같은 이시카와현 사람이잖아, 라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가가 거지’라는 자학 소재를 들으면 뭐, 그럴싸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매사에 그런 잣대를 들이대면 좀 그렇죠. ……변호사잖아, 일본인이잖아, 라는 식의 규정도 다 마찬가지죠. 아이덴티티를 하나의 뭔가로 묶어놓고 그걸 타인이 쥐어 잡고 흔든다는 건 정말 못 견딜 일이에요.”
― 9, 162~163쪽

 

하지만 기도는, 자신의 과거를 버리고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았던 ‘X’에게 뭔지 모를 동경을 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는 자신의 ‘X’에 대한 관심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딱히 현실에 절망한 게 아니더라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살아보고 싶은 것은 단 한 번뿐인 인생이라는 운명을 짊어진 인간이 흔히 품을 수 있는 바람이 아닐까. 막상 결단을 내리고 실행에 옮기는 무모함이 없어서 그것은 단지 꿈꾸는 단계에 머물 뿐이다. 그는 재일이라는 출신 때문에 자신의 신분을 감추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의 처지를 이래저래 상상해가며 가엾어했지만, 그것도 ‘X’가 실은 리에 같은 여성에게 사랑받을 만한 인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 14, 233~234쪽

 

기도는 말을 잇지 못한 채, 몸을 수그리고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 끝이 자신의 양손과 발을 응시했다. 인간의 마지막 거처일 터인 내 몸이 지옥, 이라는 건 과연 어떤 고통일까. 내 몸이 사랑하거나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야 하는 인생이란.
“우리는 그냥 무심코 아버지 닮았네 어머니 닮았네, 그런 얘기를 하잖아요. 근데 그걸 못 하는 거예요. 아버지를 닮았다는 건 이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될 존재라는 얘기니까. ……그러니 몸과 마음이 일치하지를 않죠. 자신의 몸도 언젠가 미쳐 날뛰어 컨트롤할 수 없는 거 아닌가, 엄청 불안한 거예요. 애초에 주위에서 다들 그렇게 얘기하면서 따돌렸거든. 보통 사람은 아무리 화가 나도 사람을 죽일 생각은 안 한다, 근데 자신은 저질러버릴 수도 있지 않겠느냐, 라는 거예요. 그래서 마코토는 어떻게든 제 몸에 고통을 주려고 했어요. 남에게서 얻어맞거나 트레이닝으로 계속 못살게 굴지 않으면 못 견디는 거죠. 복싱으로 자신의 폭력 충동을 조절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었어요.”
― 15, 260~261쪽

 

하라 마코토 본인이 육체를 갖고 이 세계에 존재할 때에는 그러한 과거는 단지 사라져갈 뿐이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지우고 싶다고 생각했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살아가려고 하는 실체로서의 그에게는 과거란 무거운 짐이자 족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실체가 없어진 지금,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 모든 것을 사랑으로 받아줄 수 있다면 그의 전체는 회복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해서 드러난 한 인간이 ‘하라 마코토’라는 이름으로 불려야 하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기도는 명백히 지금까지 정보의 단편에 휘둘리며 그 자신이 몹시 불안해했던 것에 비해 형태가 만들어져가는 하라 마코토의 존재와 호응하듯이 자신이라는 인간도 말끔히 정리되어 하나로 빚어져가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 16, 270~271쪽

 

그는 그만한 수의 참살 사체를 상상하고, 존재를 빼앗긴 그들의 그 차가움이 직접 피부에 와닿는 듯한 오싹함을 느꼈다. 분명하게 이건 내 동포들이다, 라는 마음이 들었다. 사법연수원 동기의 돌연사로 교토 장례식장에 조문을 갔던 날, 돌아오는 신칸센 안에서 느낀 깊은 불안이 다시금 떠올랐다. 세상에 태어난 뒤로 육체의 형태와 체적으로 딱히 누군가의 허가를 필요로 하는 일 없이 공간적으로 독점하고 있었던 자신이라는 영역이 애초에 없었던 것이 될 듯한 압박감. 그는 재일로서 그런 피해자 감정에 자신이 지금 거의 동일화해가고 있음을 의식했다. 하지만 동시에 이미 일본 국민인 그는 가해자로서 그 역사적 책임을 낱낱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 17, 288~289쪽

 

“정말 특이한 운명이긴 한데…… 그 사람의 인생이 당신에게 뭐였어?”
아내다운 직설적인 질문에 기도는 자조적으로 말했다.
“글쎄……. 처음에는 아무것도 아니었어. 그저 의뢰인의 처지가 딱해서 맡아준 일거리였을 뿐이야. 근데 점점 타인의 인생을 살아보는 것에 흥미가 생기고 그가 그토록 버리려고 했던 인생을 상상해보기도 하고……. 이거, 현실도피인가? 재미있는 소설이라도 읽는 기분이었던 모양이야.”
― 17, 293쪽

 

“따지고 보면 전부 내가 구체적으로 맞붙어야 할 문제들이야. 하지만 생각하기 시작하면 그때마다 몸이 몹시 힘들어져. 나 자신의 존재가 전혀 보장되지 않는 듯한 고통이 느껴지고. 그런데…… 아까 얘기한 인물에 대해 조사하는 동안만은 왜 그런지 마음이 풀렸어. 그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어. 아무튼 타인의 삶을 통해 간접적으로는 내 인생을 마주할 수 있었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것들도 생각해볼 수 있고. 하지만 직접 생각하는 건 아무래도 힘든 것 같아. 몸이 거부해버리는 통에. 그래서 아까 소설이라도 읽는 것 같다고 말했던 거야. 다들 자신의 고뇌를 단지 자신만으로는 처리할 수 없잖아? 누군가 심정을 의탁할 타인을 원하고 있지. […]”
― 17, 295쪽

 

“[…] 우리는 누군가를 좋아할 때, 과연 그 사람의 무엇을 사랑하는 걸까요. 처음 만나서 현재의 그 사람에게 호감을 갖고, 그다음에는 과거까지 포함해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죠. 근데 그 과거가 생판 타인의 것이라는 걸 알았다면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은……?”
미스즈는 그건 그리 어렵지 않다는 얼굴로 말했다.
“알게 된 그 지점에서부터 다시 사랑하는 거 아닐까요? 한 번 사랑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몇 번이고 다시 사랑하잖아요. 여러 가지 일을 함께 겪으니까.”
― 19, 323쪽

 

유토는 동생의 죽음에 대해서도, 아빠의 죽음에 대해서도,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리에는 이 ‘벚나무’는 남편이 ‘내 나무’라고 정했던 그 나무를 말하는 것이라고 직감했다. 그리고 실제로 작년 여름에 유토 혼자 고분군 공원에 찾아가 이런 경험을 했는지 아니면 모든 것이 공상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 나무 아래서 매미 우는 소리를 들으며 홀로 그 허물을 응시하고 있었을 아들의 모습을 상상하고 리에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조숙한 재능’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문학이 아들에게 구원이 된다는 것을 비로소 이해했다. 그것은 리에가 결코 생각해낼 수도 조언해줄 수도 없었던, 아들 스스로 발견해낸 인생의 곤경을 극복하는 방법이었다.
― 23, 3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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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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